영화가 종말의 광경을 상상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여기서 종말이란 말 그대로 세상의 끝, 인간이 사라지고 역사가 중단되는 순간이다). 중요한 건 대체 그 종말의 광경을 영화로 불러들이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인류 멸망의 위기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의 목록을 굳이 꼽아보지 않더라도- 만약 그렇다면 제법 긴 목록이 될 것이다- 종말은 대개의 경우 지금/이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범용한 감각을 문제삼기 위해 스크린에 호출된다는 걸 깨닫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즉 ‘종말영화’를 지탱하는 건 무엇보다 현재에 대한 감각의 문제인데- 이런 영화들이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곧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 영화가 경이의 스펙터클로 그려내는 대상(외계인 침공, 소행성, 환경 재해)이나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관계의 드라마나 그도 아니면 정치사회적 암시(냉전, 포스트 9·11)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이는 관객의 탓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종말영화’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한데, 종종 이들 영화는 범용한 감각을 문제삼기 위해 불러온 일련의 특별한 사건들을 영화의 중심에 두고 특별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임박한 종말에 너무 호들갑스럽게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가장 한심한 사례는 임박한 종말에서 인류를 구원하겠다며 달려드는 영웅들이 등장할 때다. 최근 영국영화에 풍성함을 더하고 있는 재기 넘치는 장르영화들 가운데 조 코니시의 <어택 더 블록>(2011)은 그런 식의 종말영화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었지만 여태 미국에서조차 개봉되지 않은 아벨 페라라의 신작 <4:44 라스트 데이 온 어스>는, 임박한 103종말을 지금/이곳의 광경을 반추하기 위한 가설적 조건으로 적절히 활용하면서 오늘날의 각종 전자적 스크린의 풍경에 대한 담담한 사색을 가미한 특별한 작품이다. 페라라의 또 다른 SF영화 <바디 에이리언>(1993)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주요 무대는 주인공 연인(윌렘 데포와 페라라의 실제 연인인 섀닌 리)이 거주하는 뉴욕 이스트사이드의 옥탑방에 한정되어 있다. 오존층 파괴로 인해 이튿날 새벽 4시44분이 되면 지구 종말이 예고된 가운데, 영화 속 두 연인은 그 어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들의 외부와의 소통은 거의 전적으로 여러 전자적 스크린에 의해 매개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경이로운 장치들은 아니고 저명인사들의 인터뷰나 뉴스가 방영되고 있는 텔레비전, 아이패드의 유튜브 동영상, 웹캠이 장착된 노트북의 스카이프를 통한 화상통화 등 일상적인 것들이다. 페라라가 이 고요한 종말의 풍경을 관찰하면서 특별히 과거 영화에 대한 향수나 전자적 스크린의 시대에 대한 혐오를 내비치진 않는 것 같다. 다만 세상에 임박한 종말이라는 가설적 상황의 힘을 빌려오되 그것을 철저히 이야기의 배경으로만 삼음으로써 오히려 너무나도 평범하기에 눈에 띄지 않을 법한 지금/이곳의 풍경- 예컨대 여기서 뉴욕은 페라라의 어떤 영화에서보다 더욱 생생한 일상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에 윤곽과 색채를 더하고 관객에게 그것을 감각하게 만드는 식이다. <4:44 라스트 데이 온 어스>는 페라라가 여전히 자신의 영화적 뿌리를 인디영화에 두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자 현재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소중히 여기는 진정 시네마토그래픽한 종말영화의 드문 사례 가운데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