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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드 푸티지가 슈퍼히어로를 만났을 때
김도훈 2012-03-22

<크로니클>은 지금 영화를 만드는 세대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봤을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된 영화다. 만약 <클로버필드>와 <블레어 윗치 프로젝트> 같은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형식을 지금 할리우드를 휩쓸고 있는 슈퍼히어로물과 접목한다면? 이 아이디어를 실현시킨 사람은 스물일곱 동갑내기인 감독 조시 트랭크와 각본가 맥스 랜디스다. 조시 트랭크는 <스타워즈>의 제다이와 스톰트루퍼가 십대들의 파티에 갑자기 나타난다는 내용의 파운드 푸티지 단편 <레아의 22번째 생일날의 칼부림>(Stabbing at Leia’s 22nd Birthday)으로 유튜브에서 돌풍을 일으킨 바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난 조시 트랭크는 “실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아주 평범하고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갑자기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영화 말이다. 어느 날 여객기를 타고 날아가다 창밖을 봤는데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생각했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내가 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다면 어떨까? 친구들과 같이 구름 위에서 축구공을 가지고 놀고 나는 그 모습을 촬영하는 거다. 그러다가 비행기 한대가 날아와 그중 한명을 치고 날아가는 거다. 그리고 문득 나는 그게 영화의 줄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실제 인물들이 촬영한 동영상을 편집해서 보여준다는 형식의 파운드 푸티지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하는 장르다.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이 장르를 시리즈화하면서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파운드 푸티지 영화는 일회성 이벤트에 가깝다. 하지만 파운드 푸티지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는 장르다. 특히 조시 트랭크처럼 적은 예산으로 장르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감독이라면 파운드 푸티지는 값싼 특수효과를 살짝 가리면서 장르의 관습을 비트는 재주를 발휘하는 데 제격이다. 게다가 유튜브 시대의 젊은 관객에게 파운드 푸티지는 어떤 실험이 아니라 매일매일 눈으로 목도하는 일반적인 영상에 가깝다. 조시 트랭크는 “우리 세대에서만 솟아오르는 뭔가 예술적인 느낌 같은 게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역사상 자기 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그런 세대다. 이런 분위기에서 영감을 받는 영화들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쯤 되면 이 영화의 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영어사전에서 가장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있을 거다. ‘크로니클’은 ‘기록’이라는 의미이며, <크로니클>은 일상을 기록해야 한다는 유튜브 세대의 강박관념에 대한 슈퍼히어로 영화다.

그런데 <크로니클>이 지금까지의 파운드 푸티지 장르영화들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 역시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영화는 앤드류가 들고 다니는 HD카메라에 기록된 영상을 주요 소스로 활용하고, 클라이맥스로 가면서 CCTV 화면과 TV 뉴스 화면을 함께 버무려넣는다. 그러나 <크로니클>에는 <클로버필드> 같은 영화들이 유튜브 시대의 리얼리티에 다가가기 위해서 구사한 거친 핸드헬드의 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감독은 영화의 주인공인 앤드류가 염력의 소유자라는 걸 장르적으로 활용한다. 앤드류는 염력을 이용해 24시간 내내 카메라가 자신의 주위를 맴돌면서 모든 상황을 기록하게 만든다. 특히 시내 한가운데서 빌딩과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며 벌이는 클라이맥스의 카메라 움직임은 <크로니클>이 파운드 푸티지 영화라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안정적이다. 조시 트랭크 감독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일반적인 영화들과 많이 다르다. 정교하게 계산된 방식의 촬영을 원했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염력으로 카메라를 움직이며 모든 장면을 기록한다는 설정 자체는 작위적이지만, 클라이맥스로 가면서 관객은 작위적인 설정 자체를 잊어버리고 전통적인 액션영화처럼 <크로니클>을 즐기게 된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수법 같지만 의외로 효과는 자연스럽다. 어쩌면 우리는 이걸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새로운 진화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네필 세대와 유튜브 세대의 근접조우

재미있는 건 <크로니클>이 유튜브의 시대정신을 슈퍼히어로 장르와 결합하고 파운드 푸티지 장르 자체를 비트는 이중의 서커스를 벌이면서도 동시에 꽤 고전적인 장르영화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크로니클>은 70∼80년대 할리우드 선배들의 장르영화에 꽤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장르 팬이라면 이 영화를 보면서 브라 이언 드 팔마의 <캐리>(1976)와 <전율의 텔레파시>(1978),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스캐너스>(1981)를 거의 본능적으로 떠올릴 게 틀림없다. 슈퍼히어로 장르가 지금처럼 발화하기 이전, 70년대와 80년대 장르영화들이 ‘슈퍼파워’를 다루는 방식은 훨씬 더 어두침침하고 무시무시했다. 드 팔마와 크로넨버그가 염력을 가진 주인공들을 다룬 방식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시절 엑스맨들은 블록버스터의 병기가 아니라 호러장르 속 괴물이었다. <크로니클>의 감독 조시 트랭크와 각본가 맥스 랜디스는 자신들이 쓰고 연출한 영화가 어떤 선배들의 유산으로부터 출발했는지 잘 이해하고 있으며, 선배들의 유산을 이 새로운 형식의 영화에 적절하게 집어넣는 데도 근사하게 성공한다.

특히 각본가 랜디스가 <애니멀 하우스>(1978)와 <런던의 늑대인간>(1981)을 만든 존 랜디스 감독의 아들이라는 걸 한번 생각해보시라. 두 사람은 ‘스필버그 제너레이션’이라 불릴 법한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이다. 블록버스터 시대가 개막하면서 모든 게 PG13등급의 공장생산 오락거리로 추락하기 전, 70년대 중반과 80년대 초반까지의 할리우드 장르영화들은 아메리칸 뉴시네마 이후의 이글이글한 에너지를 여전히 품고 있었다. 그런 영화들을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체득한 세대가 지금 막 할리우드의 중심부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조시 트랭크의 말을 들어보라. “내가 큰 영향을 받았던 <스타워즈>와 <에이리언>, 그리고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들에서 보았던 모든 것들을 영화에 등장시키고 이렇게 말하는 거다. ‘좋아.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진짜 내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되는 거야!’라고 말이다.” 어쩌면 <크로니클>은 스필버그와 동료들이 쏟아냈던 장르영화를 바이블로 삼는 80년대생이 내놓은 첫 번째 스튜디오 장르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66년생인 J. J. 에이브럼스보다 훨씬 더 젊은 세대가 발화를 시작한 것이다.

<크로니클>을 설명하면서 한 가지 더해야 할 키워드는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다. <아키라>는 <공각기동대>와 함께 서구의 팝컬처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80년대 일본 만화다. <아키라>의 오토모 가쓰히로는 당시 아즈마 히데오, 다카노 후미코 등의 새로운 작가군과 함께 일본 만화계에 등장했다. 이 새로운 세대는 당대의 유럽과 미국 코믹스로부터 받은 영향력을 전통적인 일본 만화의 문법과 버무림으로써 일본 열도에 머무르던 ‘망가’를 국제적인 예술로 진화시켰다. 특히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와 (일종의 <아키라> 프롤로그라고도 할 수 있는 단편) <동몽>은 제임스 카메론 같은 할리우드 감독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크로니클>은 사실상 <동몽>, 혹은 <아키라>의 첫 번째 실사 극장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능력을 갖게 된 평범한 인물이 결국 힘을 이기지 못해 폭주하자 같은 능력을 가진 인물이 이를 막아세우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당대 젊은이들이 사회에 느끼는 근원적인 분노를 초능력이라는 매개를 통해 표현하는 방식도 <아키라>를 쏙 빼닮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연배우 중 한명인 마이클 B. 조던은 “촬영 전 조시 트랭크 감독이 <아키라>를 권했다”고 말하고, 조시 트랭크 역시 주인공인 앤드류를 “나의 미국판 데츠오(<아키라>의 주인공)”라 불렀다고 고백한다. 어떤 면에서 <크로니클>은 일본 만화의 영향력 속에서 태동한 거대로봇물을 최초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이식했던 <트랜스포머>를 떠올리게 만드는 데가 있다.

지금의 할리우드 시스템은 젊고 재능있는 감독이 자신의 비전을 당차게 밀어붙여 SF, 판타지영화를 만드는 걸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계획되고 검증되어 마모된 채 시장에 나온다. 가끔 극적인 일도 생긴다. 젊은 감독의 1200만달러짜리 저예산 장르영화가 스튜디오 시스템의 도움을 받고 세상에 나와 관객과 평론가들을 동시에 매혹시키는 그런 일 말이다. 조시 트랭크의 <크로니클>은 (신성모독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냥 말해보자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스물여덟살에 <죠스>를 만들었을 때, 제임스 카메론이 서른살에 <터미네이터>를 만들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어리고 야심만만한 감독들이 익숙한 장르의 법칙 속에서 이야기, 캐릭터의 힘과 아이디어로 불멸의 상업영화를 만들었던 옛 시절 말이다. 파운드 푸티지와 슈퍼히어로 장르를 결합하고 70~80년대 장르영화의 유산과 일본 팝컬처의 영향력을 버무려넣은 <크로니클>은 시네필 세대와 유튜브 세대의 제3종 근접조우다. 그리고 조시 트랭크는 이제 겨우 스물일곱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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