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하이킥3>) 17회 일명 ‘광견병 에피소드’.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이웃집 굶주린 개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노량진 지나고등학교 박하선 선생은 끝내 측은지심을 이기지 못해 사료를 사들고 월담한다. 제법 스포츠맨스러운 동작이 허리를 졸라맨 빨간 코트에 뾰족구두 차림과 부조화하다. “왜 이렇게 짖어, 이 좋은 날…” 하며 다소곳이 개를 달래던 이 여자, 흥분한 개에게 한입 물려 보건소에서 광견병 가능성을 경고받자 대뜸 입매가 찌그러진다. 그날 밤 옆집 윤 선생(윤지석)은 포장마차에서 꽥꽥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녀를 만난다. “비련의 여주인공이면 병이라도 그럴듯하든지! 광견병이 뭐예요, 광견병이!”
박하선은 지켜보고 있자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는 배우다. 현재 20대 여자 연기자 가운데 이만큼 표정이 풍부한 이가 있나 싶다. 울컥하면 윗입술이 사정없이 말려 올라가고 환하게 웃을 때는 꿀단지를 앞에 둔 새끼곰마냥 혀까지 나온다. 울 때는 슬픔보다 억울함이 느껴진다. 일부 연기자를 포함한 뭇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배우의 아름다움은 이목구비의 비율이 아니라 표정의 생동감에서 비롯되는데 박하선은 표정의 보고(寶庫)를 가졌다. 시트콤 작가에게는 ‘에피소드를 부르는 얼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이킥3> 김병욱 PD의 예화를 들어보자. “광견병 에피소드 포장마차 장면에서 하선이의 연기를 보는데 이 친구가 울면서 웃고 있는 거예요. 거기서 앞으로 이 캐릭터를 어떻게 그릴지 감을 잡았어요. …(중략)… 하선에게는 웃을 때 아이처럼 해맑으면서도 해코지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이 있는데 예컨대 윤 선생에게 장난으로 반말을 하거나 딱밤을 먹이고 땅굴로 쏙 들어가버리는 상황은 그런 얼굴에서 만들어지죠.” 한편 허진호 감독은 2년 전 연출했던 연극 <낮잠>의 여고생 이선 역 오디션에 모교 교복을 입고 찬물로 세수한 얼굴로 나타났던 박하선을 기억한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배우가 있는데 그런 친구였어요. 많은 종류의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박하선은 특히 울거나 웃는 연기에서 안면근육을 우아하게 관리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냥, (관리가) 안되니까요. 제가 봐도 너무 못생겼어요. 헤헤. 그런데 오기도 부려요. 연기 못해놓고는 ‘뭐! 괜찮네. 그럼 사람이 저렇게 울지!’라고 우겨요. 현실에서 누가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리며 울어요? 물론 그런 한 방울이 필요할 경우도 있죠. 그래서 첫사랑 회상 에피소드에서 그런 연기도 잠깐 했어요. 팬들한테는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거라고 보여주고 싶어서요. 헤헤. ‘봤지?’ 하는 기분으로 반응을 뒤져봤는데 또 ‘우는 연기 또 못한다’ 그래서 ‘아이씨’ 하며 (머리칼 쥐어뜯는 시늉) 포기했어요. 남은 에피소드에서 눈물 흘리는 장면이 있으면 그냥 멋대로 하려고요. (웃음)” 하고픈 말이 많아 서술절이 부사절보다 먼저 나오기 일쑤인 화법으로 양가감정을 오락가락하며 묘사하는 박하선의 표정은 카드섹션처럼 천변만화한다. 눈과 귀가 홀려 타자치는 손가락이 자꾸 게을러진다.
기획사 명함을 받은 소녀가 연기에 눈을 뜨다
<하이킥3> 1회에서 박하선은 소파에 걸려 나뒹굴며 첫 등장한다. 다들 <거침없이 하이킥!>의 ‘꽈당 서민정 선생’을 연상했으리라. 태도가 유순해 학생들에게 무시당하고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여자라는 면에서 서 선생과 박 선생은 동류지만 하선은 숨은 다혈질이라는 점에서 민정과 다르다. 말투도 널을 뛰지만 힘 조절도 용이하지 않아 사람을 깨운다는 것이 구타로 귀결되기도 한다. “민정과의 차이라면 순간적인 폭발성? 박 선생이 위기상황에서 하는 행동은 살인미수에 가까워요. 윤건 선생 입을 막겠다고 2층에서 밀어버린다거나. (웃음) 위기의 순간일수록 예뻐 보이는 것이 하선이의 특징이기도 하고요.” 김병욱 PD의 설명이다. 중간이 없는 성격은 얼마간 실제 박하선의 모습이기도 하다. TV드라마를 보며 ‘내가 해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하기도 하고 연예인을 봐도 짐짓 쿨한 척 곁눈질만 하며 속으로 ‘나도 앞으로 할 건데 내가 왜 구경을 해?’ 샐쭉해지는 게 전부였던 소녀는 길거리 캐스팅이 유행하던 고3 봄방학 무렵, 영화 <키다리 아저씨> 시사회에서 기획사 명함을 받기까지 사는 게 도무지 심심했다. “만날 학교 가서 공부하고 집에 돌아와 자고, 눈 뜨면 다시 학교 가는 일상이 재미없었어요. 학교를 그만둘까도 고민했지만 소심해서 그러지도 못하고. 연기를 배우면서, 처음으로 살면서 집중해봤어요. 순간적으로 어딘가에 들어갔다 빠져나오는데 뭘 했는지는 모르겠더라고요. 첫 영화 <바보>를 찍을 때도 그랬어요. 슛 들어가면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지는데 그 정적이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생전 처음 몰두하고픈 일이 생긴 소녀는 드라마 <사랑은 기적이 필요해>로 데뷔한 뒤 쉬지 않고 일했다. 그러다 2008년 <전설의 고향>을 끝으로 8개월 동안 일이 뚝 끊겼다. 오디션에 여러 번 낙방하다 보니 8개월 동안 그 좋아하던 TV도 켜기 싫었다. “틀면 제가 하고 싶었던 작품이 나오니까 속상해서 보기 싫었어요. 그러다 또 좋은 작품, 잘하는 연기라고 소문을 들으면 슬그머니 봐요. 어떻게 하나, 얼마나 잘하나 보자. 근데 보면 진짜 잘하는 거예요! 그래, 잘한다. 내가 떨어질 만하네.” 집착도 강하지만 체념도 참으로 신속하다. 덕택에 모처럼 또래들과 대학 생활을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연애도 했다. 여중고 출신 맏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기자 아버지가 급작스레 경계를 강화해서 힘들긴 했지만. “사실 장남처럼 막 자랐거든요. 눈 내리면 연탄 부숴서 뿌리고 아침마다 마당 쓸고, 쌀가마니랑 생수통 옮기고. 동생이 몸이 약해 부모님이 제게 관심을 덜 가지셨어요. 그런데 연애를 하니까 아버지가 부쩍 신경을 쓰시는 거예요. 지금도 전 스캔들은 두렵지 않아요. 다만 아빠가 무서워서 스캔들이 나면 안돼요. 하하.” 공백의 마침표는 전수일 감독의 <영도다리>였다. 긴 테이크와 침묵, 그리고 참다참다 터져나오는 오열로 이뤄진 영화. “제 싸늘한 얼굴을 봤어요. 저도 몰랐던 모습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았고 무엇보다 다시 연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그리고 인지도의 변곡점이 된 <동이>가 왔다. 박하선과 이병훈 감독의 인현왕후는 앞서 나온 인현왕후들과 좀 달랐다. 그녀는 장희빈에게 “한때 자네를 부러워했건만, 이제 보니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네”라고 경멸을 표하고, 임종 직전까지 국모로서 정치적 역할을 인식하는 왕비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로지 ‘착한 여자’만 보았다. “나름 다양한 캐릭터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착한 인물로만 기억되는 게 싫었어요. 저는 착하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세상에 착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냥 사람은 사람이죠. 아마 오랫동안 저 자신이 착하게 살려고 애썼기 때문에 싫기도 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노력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다음부터는 착한 모습이 그리워졌어요. 그즈음 <하이킥3>를 시작했고요.”
평범한 여자들이 예뻐 보이는 찰나를 구현하다
박하선이 어느 때보다 본인의 모습과 가까운 상태로 <하이킥3>를 시작할 수 있었던 까닭은 촬영이 시작된 지난해 7월까지 3개월의 시간을 부러 자유롭게 보냈기 때문이다. 아무런 강박없이 내키면 피아노도 치고 클라이밍도 가고 하루 종일 틀어박혀 울어보기도- 연기에 도움이 될까 해서- 했다. <동이>를 함께 찍은 지진희 선배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공연한 배우 류덕환의 조언이 작정한 휴식의 계기였다. “좀 위험해 보인다고, 네가 없는 것 같다고, 너를 찾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저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어요. 엥? 내가 난데 왜 날 찾아야 하지?” 하지만 계속 듣다보니 선배, 동료의 염려가 납득이 된다. 박하선은 굳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캐릭터와 본인 사이의 담장이 낮은 배우다. “얼마 전 길거리를 혼자 걸어가는데 갑자기 윤 선생님(<하이킥3>의 극중 연인)은 어디 갔나 싶으면서 굉장히 외롭고 이상한 거예요. 그래서 ‘아니야, 윤 선생님 잠깐 출장 간 거야. 내일 촬영장 가면 다시 볼 수 있어’라고 달랬어요. …(중략)… 지난 12월 말에는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연예대상 MC를 보았는데 나중에 모니터링하면서 무서웠어요. 제가 없고 그냥 박 선생님이더라고요. 그래서 아, 또 나를 잃어가고 있나, 찾아와야겠구나 싶었어요.” 박하선이 들려주는 일련의 일화들에서 재미있는 점은 그것이 번뇌하는 배우의 심각한 존재론적 위기라기보다 마치 주부건망증에 대한 수다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여기는 배우의 함정에서는 안전해 보인다. <영도다리> 유럽 로케이션 촬영에서 눈물이 나지 않아 서른번씩 NG를 내고 알프스 샤모니 눈더미에 파묻혀 죽고 싶었던 악몽, <동이>에서도 사나흘간 눈물이 나지 않아 포기한 스탭들의 동정어린 시선 속에서 땅에 드러눕고 싶었던 속상한 추억을 털어놓아도, 마치 오만 군데 입사시험을 보고 겨우 들어간 사무실에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보통의 20대 초반 여성이 커피숍에서 친구에게 털어놓는 고충처럼 들린다. 그건 곧 배우 박하선의 저력이기도 하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사이보그나 여신 같은 저 너머의 것이 아니다. 대신 박하선에겐 우리가 평범하다고 믿는 주변의 여자들- 엄마, 누이, 직장동료, 학교 친구- 이 어느 날 오후 교실에서, 사무실에서 놀랄 만큼 예뻐 보이는 찰나를 자유자재로 구현하는 신통방통함이 있다.
어느덧 드라마 9편, 영화 7편을 이력서에 올린 박하선의 연기 소사(小史)에서 <하이킥3>는 어떤 단락으로 기억될까. “원래는 불안이 많아서 이만큼 준비해야 요만큼 나오는 스타일이었어요. 텍스트에 충실하고 걱정을 줄이려고 자료도 웬만큼 찾아보고요.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아버지로 분한 김갑수 선배님이 그러셨어요. 왜 상대방 말을 안 듣냐고, 기초 안 배웠냐고. 분명히 배웠고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하이킥3> 하면서는 정말 많이 듣게 됐어요. 본능을 써서 연기해본 것도 처음이에요. 예전에 강혜정, 김옥빈 언니 같은 배우들이 많이 부러웠거든요. 물론 많이 준비하겠지만 보기에 그냥 다짜고짜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분들. 그런데 <하이킥3> 하면서 시간에 치여 본능 반, 머리 반으로 연기한 장면이 많아요.” 요컨대 박하선에게 <하이킥3>는 ‘너, 있는 그대로도 괜찮아’라고 속삭이며 그녀를 껴안아준 작품이다. “불안이 언제나 트라우마였어요. 제가 안고 있는 불안은 배우로서 단점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김병욱 감독님이 거기에도 가치가 있다고 알려주셨어요.”
오후 7시 반. 유난히 본방사수에 집착하는 그녀를 위해 인터뷰를 마쳤다. “본방송을 시청자와 같이 실시간으로 보면 이미 연기가 끝났는데도 나 실수하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이 들어요. 음악이 얹히면 느낌이 달라지기도 하고요. 현실의 삶에서도 음악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슬프면 슬픈 음악, 기쁠 땐 기쁜 음악.” 박하선을 전송하고 나서 오늘 들은 마음의 가짓수를 꼽아보았다. 희열, 자학, 각오, 비관, 감사….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의 녹음 파일은 가장 우울한 날의 알약으로 복용하기 위해 한동안 간직할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