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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야기를 쏟아내다

주목할 만한 재능의 발견, 이광국 감독의 데뷔작 <로맨스 조>

이광국의 <로맨스 조>는 씨네21i와 보리픽쳐스(대표 임순례)가 공동으로 추진한 신인 발굴 프로젝트 당선작이다. 이미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로테르담영화제 등에 초청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이 데뷔 감독의 이야기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의 이야기 솜씨란 특별한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뜻이 아니라 특별한 형식의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씨네21i가 발굴한 신인감독이므로 더 주목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사도 어쩔 수 없다. 올해의 주목할 만한 신인감독 중 한명이 될, 이광국 감독과 그의 데뷔작 <로맨스 조>를 소개한다.

이광국의 데뷔작 <로맨스 조>는 싸구려 모텔의 복도에 걸려 있는 그림, 야생마들이 늠름하게 내달리는 그 그림에서 시작한다. 그야말로 거기엔 말(馬)들이 몰려온다. 카메라가 천천히 트랙 아웃하는 동안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음악이 흐르는 걸 보면 이때의 말들은 유머이며 신호다. 실은 그 말이 아니라 다른 말들이 이제 몰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내 밀어닥칠 그 다른 말들의 정체는 말(言)이다. 이 ‘말(馬, 言)장난’은 직설적이면서도 애교스럽다. 누구라도 알 수 있도록 해놓은 걸 보면 여기에서 감독의 보편적인 영화적 욕심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로맨스 조>의 인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단 하나의 운명이 있는데 그들은 그 어느 밤의 모텔에 앉아 있건 허름한 술자리에서 마주 보건 혹은 마주 보는 그 사람이 점잖은 신사이건 다방 종업원이건 어른이건 아이이건 간에 “그럼 내가 이야기를(말을) 해줄까요”라고 하거나 “그럼 내게 이야기를(말을) 해주세요”라고 한다. 그들은 입만 떼면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들의 이야기란 구체적으로 볼 때 서로 다른 종류의 것이지만 어쨌든 그들은 이야기라는 운명의 형식으로 묶여 있다.

대강 몇개의 이야기 꾸러미만 먼저 풀어보자. 첫 번째는 어느 무명 감독의 이야기다. 그가 극중의 로맨스 조(김영필)다. 오랜 시간 시나리오를 준비했지만 여전히 앞날이 불투명한 그는 그냥 죽어버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지방의 한 모텔로 흘러든다. 거기서 다방 여종업원(신동미)을 만난다. 두 번째는 전작으로 300만 관객을 동원한 한 감독(조한철)이 차기작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지방의 모텔에 잠시 기거하게 되고 거기서 커피 배달을 온 다방 여종업원(신동미)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세 번째는 어린 로맨스 조(이다윗)에 관한 이야기다. 어린 로맨스 조가 좋아하는 초희(이채은)라는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네 번째 이야기는 무명 감독의 친구인 담(김동현)이라는 남자의 새 시나리오 내용인데, 한 아이가 집 나간 엄마를 찾는다며 다방에 와서 여종업원(신동미)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첨언은 불가피해 보인다. 영화는 이 인물 그룹들을 차례대로 연속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갈랐다 붙이고 한쪽의 바깥이 다른 쪽의 안이 되도록 뫼비우스 띠를 만든다. 예컨대 다방 여종업원이 300만 감독에게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할 때 마치 동시간대의 어떤 일처럼 느껴졌던 무명 감독의 앞선 장면은 로맨스 조라는 이름을 얻어 여종업원의 이야기 안으로 돌아온다. 담이라는 이름의 로맨스 조의 친구가 자신의 새 시나리오에 관한 말을 꺼내자 현실 세계에서 로맨스 조와 일면식이 있는 다방 여종업원은 옷만 바꿔 입고 갑자기 담의 허구 속 인물로 바뀌어 등장한다. 그 허구 속에서 여인과 함께 등장한 또 다른 허구의 인물인 아이 하나가 자기의 엄마 이름이 초희라고 말하자 우리는 다시 어린 로맨스 조가 과거에 사랑했던 실제 여자아이가 초희였음을 기억해낸다. 그렇게 <로맨스 조>의 이야기란 소문, 회상, 허구, 사연 등으로 나뉘어 있되, 이쪽의 인물들이 이건 자기의 허구라며 구술할 때 저쪽의 인물들에게 그건 자기의 사연이며 이쪽의 인물들이 나의 회상이라고 구술할 때 저쪽의 인물들에게는 자기에 관한 소문의 한 종류일 뿐이다.

서로가 꼬리의 꼬리를 무는 이야기다. 동일한 배우(특히 다방 여종업원 역의 신동미)가 1인 다역을 하고 있으므로 <옥희의 영화>와 유사해 보이지만 <옥희의 영화>의 인물들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면 <로맨스 조>의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존재들’이다. 그건 <로맨스 조>가 지향하는 이야기의 그 상대적 구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오로지 상대방의 이야기가 있어야만 그 자신도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니 그 내용의 사실성이나 구체성이 워낙 상대적이어서 어느 편의 확실성을 손들어주기 어려운 가운데 오로지 중요한 건 한 가지밖에 없다. 무슨 내용이 구술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구술되어가느냐다. 구술의 내용이 아니라 구술의 형식이 중요한 영화가 <로맨스 조>다. 감독의 목표도 거기에 닿아 있었던 것 같다. 이광국은 <로맨스 조>를 에셔의 판화인 <그리는 손>처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는 손>은 한손이 다른 손을, 그 다른 손이 다시 이 손을 그리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여기에는 홍상수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다. 홍상수의 조감독을 여러 차례 하며 영화를 배운 <로맨스 조>의 감독 이광국은 이 영화의 흥미로운 구조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홍상수의 그것에 빚진 것 같다. 다만 그동안 홍상수 영화의 영향력하에 나온 영화들 중에서 그 영향력을 가장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으며 가장 근접하게 재구현하고 있다. 물론이다. 그것으로 <로맨스 조>의 가치를 따질 일은 아니다. 이광국이 홍상수가 미친 긍정적인 영향력을 회피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영화만이 가져야 할 아름다운 차이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로맨스 조>를 가치있게 만드는 진짜 이유다.

차이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염려스러운 면들이 있긴 하다. 예컨대 홍상수 영화의 저 유명한 대구와 반복의 구조란 일반의 상투적 세계관을 상대로 홍상수의 세계관이 밀도 높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승화된 것이다. 거기에 비해 <로맨스 조>의 복잡하게 설계된 구조는 어딘지 모르게 어떤 세계관의 저항적 승화라기보다는 스타일의 정교함이라는 기술적 필요에 의해 지금 도입된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를 숨기지 못하겠다. <로맨스 조>의 구조가 흥미 만점이면서도 어딘가 아슬아슬하다는 느낌은 거기에서 오는 것 같다. 하지만 염려는 거기까지, 이 영화는 아무래도 장점이 더 많다.

감독 자신은 장르적인 상투성을 버리지 못한 장면이라며 애석함을 표했으나 <로맨스 조>에서 예상외로 연출력이 돋보인 곳은 이채은이라는 괴력의 배우와 이다윗이라는 재능있는 신인배우가 등장하는 초희와 어린 로맨스 조의 부분이다. 이광국이 영화적 구조를 짜는 것 외에도 배우들의 자질을 끌어내는 연출력에서도 완숙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장면들이 그 부분에서 여럿 등장한다. 한편으로는 영화 전체를 하나의 분위기로 감싸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빼놓을 수 없다. 카메라는 패닝은 물론이고 (홍상수 영화라면 쓰지 않을) 트래킹 숏을 통해 인물들의 포즈나 동선과 어우러지며 여러 장면에서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광국은 무엇보다 용기있는 선택 한 가지를 하는데, 이를테면 홍상수 영화의 가장 지독한 매혹 중 하나를 그가 자신의 첫 번째 영화에서 애써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홍상수 영화가 지닌 그 강력한 즉물적인 장면들, 통영의 언덕배기 집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세기, 눈이 내리는 속도와 인물들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속도가 어울려 만들어내는 새벽의 육체와 사물과 그 시간성. 그것들은 흉내내고 싶을 만큼 강한 유혹을 주지만 쉽게 남의 것이 되지는 않는 유일무이한 홍상수 영화의 즉물적 아름다움이다. 이광국은 현명하게도 그런 걸 흉내내려 하지 않았다. 대신 영화 전체를 자신의 곤경으로부터 동기화 한 뒤, 이야기의 곤경으로 세공하여 뫼비우스의 다발로 묶은 다음 그 형식의 정교함을 통해 감정이 생기기를 바라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하여 <로맨스 조>의 라스트신은, 도대체 이렇게 이야기가 서로의 꼬리를 잇고 퍼지다가 어디에서 어떻게 멈추려는 걸까 걱정이 될 즈음에 도착한 그 라스트신은, 눈이나 바람 같은 자연성도 없고 즉물적이지도 않은, 오로지 자신이 선택한 이야기의 동화적 해결로서 산뜻하게 마무리된다. 이 점에서 이광국은 그의 영화적 정서를 향해 한발 더 나아간다.

<로맨스 조>는 간섭하고 교차하고 겹치며 교집합을 이루는 이야기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와 같은 한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건 대체로 필사적인 일이 되기도 한다. 특히나 무엇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되어가는가에 관한 이야기들이므로 내용보다는 형식으로 필사적이게 된다. <로맨스 조>는 그 점에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른 것 같다. 그러니 그 필사적인 형식으로 이미 정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 중 극장에 관한 이야기이고 극장 앞에서 벌어진다고 하여 <극장전(傳, 前)>이라 이름 붙여진 작품이 있으니, <로맨스 조>가 말(馬)처럼 활력 넘치는 말(言)의 이야기이므로 이 영화를 ‘말(馬, 言) 이야기’이라고 애칭해도 되는 걸까. 그래도 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로맨스 조>가 주목할 만한 신인감독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고는 말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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