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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since 2009: 하정우가 자신의 연기를 돌아보다 ①
김혜리 사진 오계옥 2012-03-13

하정우가 프로야구 매니저 게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가 직접 쓴 책에서 읽고, <머니볼>을 재미있게 봤다는 소감을 듣고, 슬며시 웃은 적이 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별명을 붙여주고 어울리는 헤어스타일 골라주기를 즐기는 눈치다. ‘FC 하정우’를 결성해 마음 맞는 후배들과 축구를 하는가 하면, 올해 본 영화 중 최고의 연기를 골라 ‘하정우 어워드’를 수여해 달라는 기자의 지나가는 농담에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열심히 기억을 뒤적인다. 스스로 규칙의 시스템을 발명하고, 한 공간을 울타리 쳐서 취향에 맞게 꾸미고 경영하는 작업만큼 하정우의 흥을 돋우는 일은 없어 보인다. 인터뷰를 위해 옮겨간 하정우의 단골 술집도 그의 ‘영역’ 중 하나였다. 사방의 벽과 문이 하정우가 그린 벽화와 직접 찍은 사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구석자리에 마주앉자 그가 아담한 벽 램프를 만지작거렸다. “어제 떡볶이 먹으러 왔다가 달았어요. 이 테이블에 자주 앉는데 늘 어둡다고 느꼈거든요. 훨씬 아늑해졌어요.” 그가 택한 메뉴는 막걸리. <멋진 하루>에서 그가 연기한 백수 병운이가 스페인 마드리드에 “코리안 트래디셔널 하이퀄리티 라이스 와인”으로 전파해 대박을 터뜨리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친 이후 즐겨 마시게 되었다고 했다.

-2009년 <국가대표>에 앞서 개봉한 김영남 감독의 한·일 합작영화 <보트>는 <두번째 사랑>에 이어 다른 모국어를 쓰는 배우와 공연한 경우인데요. 이 작품이 남긴 것은 무엇입니까. =1번은 일본 영화제작시스템 경험, 2번은 쓰마부키 사토시라는 배우입니다. 일본 영화계는 시간 약속에 엄하고 제작부가 매우 유능합니다. 반면 더 많이 고민하며 만드는 환경은 열악하다는 인상이었어요. 일본에서는 어떤 연기가 좋은 연기로 평가받는지도 어렴풋이 느꼈어요. 한국보다 친절하고 극적인 연기를 요구하는구나 싶었고 배우들을 오브제로 사용하는 경향이 강했어요. 리허설을 10번씩 하는 걸 보고 저는 거부했어요. 한국영화와 달리 배우와 스탭의 유대가 별로 없는데 제가 한국쪽 스탭과 친하게 지내는 걸 보고 신기하게 여기더군요. 사토시씨는 저를 보러 2박3일 서울에 찾아오기도 했어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매일 즐겁게 술을 마셨죠. (웃음) 한국에서 영화 찍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어요.

-<국가대표>에 임하면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다는 분명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시나리오를 읽으며 공항 장면에서 강한 한번의 울컥함이 있었고 스키점프라는 새로운 볼거리가 있었기에 흥행이 될 거라는 예상을 했어요. 원래 제 취향도 재미있는 영화를 선호하고요.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했지만 비슷한 이유에서 연극을 관람할 때는 조금 지루함을 느낄 때가 있죠.

-연극은 물리적으론 배우가 눈앞에 존재하니까 더 직접적인 체험이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반대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불이 꺼지면 영화배우와 나 사이엔 아무것도 없는 일대일 접촉 같은데 연극은 프로시니엄 아치가 확고하게 객석과 무대를 구분하니까요. 배우가 관객을 의식해서 관객의 존재감이 연기에 포함된다는 점도 보는 입장에서는 좀 긴장이 되고요. =연기 표현에서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봐요. 다만 배우들이 포즈(pause)를 구사할 때 너무 개인적 감흥이 드러나니까 불편한 순간이 있죠. 1.5배속으로 해도 전달이 될 것 같은데 연기자가 느끼고 이야기하고 느끼고 이야기하는 템포가 마음에 걸릴 때가 있어요. 그러나 <의뢰인>의 법정 장면을 찍으며 느꼈다시피 그동안 제 몸이 영화에 최적화됐다는 불편한 현실도 있겠죠.

-<국가대표>가 명백한 대중영화라서 좀더 설명적인 방식의 연기를 한 면이 있나요. =그럼요. 좀더 안전하고 편하고 친절하게 표현했죠. TV드라마 연기 스타일에 가까웠다고 할 수도 있고요.

-말씀하신 결말부 장면, 밥이 귀국길 공항에서 기자와 인터뷰하며 눈으로는 생모를 보는 장면을 보면서 드라마적 구도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그 안에 있는 하정우씨가 좀 생경하기도 했고요. 그 신의 연기를 설명해주십시오. =이승엽 선수가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에서 투런 홈런을 치고 인터뷰한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그간 부담되었던 점을 죽 이야기하다 갑자기 가슴이 막혀서 “잠깐만요”(이승엽 목소리 모사) 하고 앵글을 피했다가 다시 인터뷰를 속개하는 모습이 통째로 담겼어요. 얼굴과 눈빛은 보이지 않는데 순간의 떨림이 확 왔죠. <국가대표>의 공항 장면을 그렇게 연기하려고 했어요. 감정이 워낙 노골적이다 보니 쑥스러울 것 같아서 감정에 절대 기대지 않고 내내 눈을 가리고 기술적으로 할 생각이었죠. 어떻게 각을 돌리고 움직일지 면면이 다 계산했어요. 왜냐하면 전 연기에서 감정은 절대 믿지 않거든요. 감정은 와주면 땡큐인 무엇이고, 감정이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감정이 안 오더라도 표현하는 게 연기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그래서 어머니 역의 이혜숙 선생님, 아버지(김용건 배우)는 맞은편 앵글 촬영과 리액션, 롱숏을 다 마치고 먼저 가시게 했어요. 그래서 롱숏에선 제가 내내 눈을 가리고 있어요. 그런데 기자 역 배우와 남아서 투숏을 찍는데 그날따라 신의 선물을 받아 시나리오 볼 때 왔던 감정이 쿵 와버린 거예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현장이 눈물바다 됐죠. 분위기 만드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김용화 감독님이 모니터 앞에서 울먹이시면서(흉내) “어흑, 이것 좀 봐. 형은 솔직히 오케이야. 더 안 찍어도 돼. 근데 어떻게, 정우야, 한번 더 해?” 하시고. (좌중 폭소) 저도 뭔가가 왔으니 오케이하고 보너스 한번 더! 외치며 한 테이크 더 갔죠. 그래서 그날 결국 감독님이 귀가한 선배님들 다시 불러서 횡계에서 전체 회식을 주최하셨습니다.

-회식을 부르는 연기였군요. (웃음) <국가대표>는 동료 연기자들과 학교 영화과 시절처럼 즐겼던 현장이 아닐까 짐작도 가는데요. =주연배우의 책임감에 대해 깨달았다고도 할 수 있죠. 그 책임감을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생각진 않지만 리드하는 방식은 다 다르니까요. 저 자신이 그럼으로써 에너지를 받고 책임감이 좋은 방식으로 승화될 수도 있고 결과적으로 즐거워지고 유연해진 현장 분위기가 저를 도울 수도 있죠.

혼자 연기한다는 것이 그토록 힘들고 지루할지 몰랐어요

-다음 작품인 <평행이론>에 카메오 출연을 하셨고 당시 주연이었던 지진희 배우가 이번 <러브픽션>에서 품앗이처럼 우정 출연하셨습니다. <울학교 이티>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등 하정우씨는 촘촘한 작품 스케줄 중에도 우정 출연이 많은데 섭외에 응하는 기준이 뭔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으로선 한번 더 고민할 문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순수한 마음의 교류이고 함께 작업했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제가 ‘소모’되는 건 아니라고 봐요.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값진 무엇이 남는 거죠. <평행이론>은 참여하는 나도 개인적 명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긴 가발을 쓰고 새로운 외모를 시도해봤는데 마치고 나서 감독님께 과했다고 사과드렸어요.

<황해>의 엔딩 크레딧. “영화를 마치고 제일 짜릿한 순간이었어요. 이거 하나로 모든 보람을 얻었어요.”

-그리고 2010년 12월 말에 <황해>가 개봉했죠. 연기를 하다보면 동물의 이미지로부터 캐릭터 표현의 힌트를 얻는 경우가 있다는 말씀을 오달수 배우가 한 적이 있습니다. <황해> 서두의 “개병이 돌았다”는 내레이션 때문인지 김구남에게는 계속 병든 개의 모습이 겹쳐졌어요. =맞아요. 구남이가 그 개였어요. 이리 치이고 저리 차이는 동네 똥개의 모습. 실제로 개시장에 가서 보기도 했는데 뭐 지옥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황해>의 1, 2부는 구남이 혼자, 대책없이 그야말로 맨땅에 몸을 부딪고 있는 장면이 대다수입니다. 서울 논현동을 물어물어 찾아온 이 남자에겐 무기도 없고 대책도 없고 대사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지금 무엇을 궁리하고 있는지 매 순간 명확히 전달이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구남 혼자 있는 대목들이 영화적으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배우에겐 어땠습니까. =혼자 연기한다는 것이 그토록 힘들고 지루할지 몰랐어요. 혼자 연기하니 테이크를 많이 갈 수가 없더라고요. 받아줄 데가 없으니 뼈를 깎는, 내 살을 깎아먹으며 테이크를 반복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른 변수가 없으니 테이크를 가면 갈수록 더욱 작위적인 연기가 된다고 느껴서 힘들었어요.

-그러고보면 하정우씨가 꼽는 영화 속 좋아하는 장면들은 본인 영화나 남의 영화나 대체로 투숏이네요. =그래서 혼자 연기를 하다 보니 카메라 감독이 보이고 스탭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상대 배우가 없으니까 앞에서 스탭들이 움직이는 게 시야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어느 시점 이후로는 부탁을 드려서 스탭들이 제 앞에서는 얼음이었어요. 그런데 발견한 게 하나 있어요. 컷을 하고 모니터하러 가는데 저쪽에서 달려오는 A카메라 감독님 감정이 배우의 그것인 거예요. 내가 잘했나? 누를 안 끼쳤나? 잘 잡았나? 포커스 안 나갔나? 핸드헬드를 잡은 촬영기사의 마음도 배우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황해> 찍을 때 처음 알았어요.

-배우는 숏의 사이즈와 움직임을 사전에 인식하니 분명히 카메라는 배우의 영향을 받지만, 거꾸로 카메라도 배우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실제로 그렇군요. =A, B, C 카메라까지 있었던 <황해>의 촬영은 매우 힘든 경우였죠. 300mm 망원렌즈도 써보고 장비적으로 시도가 많아서 초반에 시행착오도 많았고요. 재재재촬영도 있었어요.

-<황해>는 구남 혼자 끌어가는 액션이 아닌 부분에서도 앵글이 다양해서 잘게 찢어붙인 롱테이크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본디 영화가 시간을 조각조각 붙이는 일이긴 하지만 <황해>에서는 그 극단을 체험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정우씨가 ‘후유증’을 언급한 작품은 <황해>가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요. =꼬박 11개월을 찍었으니까요. 제가 힘들었던 점은 작품 내적인 문제가 아니라 너무 오래 한 인물에 묶여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나홍진 감독은 쫓기는 와중에도 배우가 이야기하면 모든 걸 멈추고 들어줘요. 그런 배포가 있어요. 그래서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내게 하죠. 뭔가 페이크를 써서 배우에게서 억지로 연기를 끌어내려고 하는 면이 없어서 좋아요. 다만 저는 지루한 걸 제일 싫어하는데, 똑같은 수염과 머리, 똑같은 얼굴로 1년을 보냈으니 얼마나 다른 걸 하고 싶었겠어요. 호기심도 더이상 안 생기고 연기가 습관이 된 거 같고. (웃음) 영화가 아니라 제 생활이 지루해졌고, 그 반동으로 지난해에 세 작품을 연달아 찍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죠.

-<황해> 초반에 면가가 구남을 가리켜 “성질 더러운데 깡패는 아니고 만날 맞고 다니는데 불쌍해 보이지는 않고”라고 요약하죠. 그처럼 캐릭터를 정리하는 대사는 연기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러브픽션>에도 그런 대목이 있고요. =상상에 도움이 되는 정보고 참고사항일 뿐 거기에 갇히진 않아요.

-지난 인터뷰에서 크랭크인 뒤 몇달이 지나 옌볜에 갔을 때 진작 여기서 찍었다면 훨씬 구남을 잘 표현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아쉬웠다고 했는데요. =<황해>는 논현동 사건과 마지막 탈주까지를 다 찍고 부산에서 선상 액션과 컨테이너 액션을 촬영한 다음 구남이 울면서 산속을 헤매는 장면을 문경에서 찍었어요. 그러고는 민박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진행되는 전반, 후반 장면을 몰아서 촬영했어요. 거기까지 거의 혼자 기능적인 연기를 한 셈이죠. 12월16일에 크랭크인했는데 김윤석 형은 2월9일이 첫 촬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연기에서 시간적인 순서의 뒤섞임, 점프는 그리 상관하지 않아요. 의식 안 하려고 하죠. 어차피 <추격자>도 경찰서에서 풀려나 담배 피우는 장면이 첫신이었고 <범죄와의 전쟁>은 형배가 도박장에 들어가는 몽타주 장면과 이발소에서 면도하다 담배 피우는 두신이 첫 촬영이었어요. <국가대표>는 성동일 선배와 승합차 타고 가는 장면이 첫 촬영이었고…. (막힘없이 출연작들의 첫 촬영신을 나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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