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는 이날 그의 두 번째 일과였다. 하정우는 파주의 서울액션스쿨에서 <베를린>의 북한 첩보원 표종성이 연기할 액션의 합을 연습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특정한 체격이 목표는 아니지만 <러브픽션>의 구주월을 연기하느라 근육을 몽땅 없애놓은 상태라 웨이트 트레이닝도 병행하고 있다. 한때 카페에서 편안히 앉아 대화하는 연기 좀 해봤으면 좋겠다고 농담할 만큼 치고받고 뛰고 구르는 사나이 영화가 필모그래피의 대종을 이루는 하정우지만 류승완 감독이 창조한 투철한 첩보원 표종성의 액션은, 희생자를 장난감 다루듯 하는 지영민(<추격자>)의 폭력, 살아남기 위해 버르적거리는 김구남(<황해>)의 싸움, 구경꾼을 의식한 체벌에 가까운 최형배(<범죄와의 전쟁>)의 주먹질과도 다르다. 표종성은 촬영 콘티와 밀착해서 안무된 지극히 프로페셔널한 액션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가 경험하지 못한 도전이다. “<베를린> 액션의 전체적 느낌은 반작용이에요. 무릎을 망치로 때리면 다리가 저절로 튀어 올라오듯 몸에 배어나오는 동작이죠. 비유하자면, <본 아이덴티티>에서 기억을 상실해 자기가 첩보원인지도 모르는 맷 데이먼이 벤치에서 괴한들에게 습격당했을 때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종류의 액션이죠. 그런 걸 표현하려면 물리적인 반복 연습밖에 다른 길이 없어요. 액션의 블로킹(프레임 안에 인물과 사물을 배열해보는 일)이 어떻게 보일지도 머릿속에 많이 그려보는 단계죠.”
메모의 달인
그의 시나리오는 주석과 일기, 낙서와 단상으로 비로소 완결된다.
화구와 트레드밀, 역기와 책장이 구획 없이 어우러져 있는 하정우의 공간은 얼핏 용도가 모호해 보이나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보면 넓은 의미의 배우 대기실이고 과장하면 캐릭터 분만실이라 해도 좋다. 하정우는 새 인물을 받아들면 외양과 몸놀림의 디자인부터 떠올리곤 한다. 친연성있는 동서고금 기성 영화 속 인물, 다큐멘터리와 지인들의 행태에서 발견되는 캐릭터와 공명하는 특성을 채집하고, 본인의 사진첩을 뒤적여 이제 연기해야 할 인물을 닮은 표정을 고른다. 물론 현재 나이와 상태가 새겨진 채로 카메라 앞에 서게 될 지금의 모습도 사진으로 다양하게 찍어본다. 캐릭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 중 하정우에게 특유한 항목은 그림이다. 하정우가 촬영 전과 도중을 가리지 않고 내킬 때마다 크로키북을 잡거나 이젤 앞에 앉아 그리는 인물화는 정확히 캐릭터의 포트레이트는 아니다. 영화 전체의 이미지, 배우로서 그날의 상태가 뭉뚱그려진 내면의 풍경화다. <황해> 촬영 중 그렸다는, 손잡은 세 피에로의 그림을 보며 누가 감독이고 누가 당신이냐고 물었더니 하정우는 그런 건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놀란다. “얘는 <러브픽션>의 주월이에요.” 꺼내 보여준 캔버스 속 남자의 뺨은 백색 불안으로 물들어 있고 머리칼은 하정우가 “솔직한 게 아니라 솔직한 척해서 좋은 컬러”라고 의미심장하게 표현하는 파랑으로 칠해져 있다. 자연히 의상과 메이크업은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하정우에게 중요한 사안이다. <추격자>의 잔상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살인용의자로 카메오 출연하는 부담을 감수한 <평행이론>(2010)에서 그는 내심 장발의 효과를 시험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서클렌즈에 교정기, 가발을 착용하면 어떨까 시도해봤어요. 결론은 조금이라도 의혹이 가면 해선 안된다는 거였어요. (웃음)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정도론 부족해요. 어디로 봐도 어떻게 흔들어도 완벽하게 이건 진짜라고 여겨질 때만 가야 해요.” <황해>의 분장은 얄궂은 후유증도 남겼다. “눈썹도 안 그리는 노 메이크업에다 다크서클에다, 튼 살갗을 표현하려고 풀도 발랐어요. 촬영 들어가기 전 나홍진 감독이 피부과를 당분간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레이저 시술이 막 효과를 보고 있었는데 5차에서 중단하는 바람에 도루묵이 됐습니다. (좌중 웃음) 이후로는 한번도 피부과에 안 갔어요. 버릇이 된 거죠.”
그림도 그림이지만 하정우는 학창 시절부터 색색 형광펜과 필기구를 필통에 상비하고 다니는 메모의 달인이다. 시나리오 여백에 적힌 하정우의 주석과 낙서를 훔쳐보는데, 사용된 펜도 다양하지만 글씨체가 작품과 기분에 따라 생판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완전히 상이하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국과수 필적 감정도 통과할 이 배우, 좀 위험한 거 아닌가. 하정우는 촬영을 시작할 때 반드시 시나리오를 두권씩 챙긴다. 단상과 분석이 잔뜩 적혀 있는 대본을 스탭과 배우들이 보면 민망하니까 현장에서는 깨끗한 시나리오를 휴대한다. 그의 책장이 비좁은 건 시나리오도 많지만 영화 한편 끝날 때마다 생성되는 두툼한 바인더들 때문이다. 뉴욕에서 촬영한 <두번째 사랑>(2007)의 파일을 여니 날짜순으로 철한 쪽대본, 할리우드식의 세밀한 일일촬영계획표, 붐마이크 오퍼레이터가 찍어준 추억의 폴라로이드 사진 틈으로 뜻모를 글자가 휘갈겨진 호텔 메모지 묶음이 보인다. “그즈음 사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나봐요.” 하정우가 학생처럼 웃는다. <황해>의 긴 촬영을 마친 뒤 오랜만의 재부팅이었던 <의뢰인>의 시나리오에는 개학을 맞은 중학생처럼 손수 줄을 그어 그린 촬영시간표가 보이고 “드디어 시작이군”이라는 낙서에서 심호흡이 배어난다. “<황해>가 2010년 11월2일 크랭크업하고 12월23일 개봉했는데 <의뢰인>은 12월10일에 크랭크인했어요. 저는 이듬해 1월10일에 투입됐고요. 서울말도 잘 안 나오고 촬영현장도 낯선데, 저를 기다린 보람을 돌려줘야겠다는 책임감은 높은 상태였어요. 대강의 표현은 구상해 놓았는데, 수정된 시나리오를 받아보니 변화가 많아서 철렁했어요. 한달만 시간을 달라고 청해서 벼락치기를 했죠. 영화를 여섯 단락으로 나눠서 생각했어요. 44신까지가 관객을 법정까지 잘 이끌고 가야 하는 1단계였죠.” 이쯤에서 독자들도 절감하겠지만, 소싯적 수학이 질색이었다는 사람치고 이 배우, 날짜와 숫자에 관한 기억이 징그럽게 세세하다. “그게 다예요. 크랭크인, 크랭크업, 개봉날짜. 캐릭터의 탄생과 최후에 관련된 부분이니 영화의 시작과 끝은 저한테는 역사적인 날이고 그래서 입력이 되는 것 같아요.”
연습의 힘을 신뢰한다
스크린 연기, 메소드 연기, 영국식 연기의 방법론의 편차를 재미있게 드러내는 영화 <마릴린과 함께한 일주일>에는 마릴린 먼로를 가리켜 “훈련과 연습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대로를 카메라 앞에 드러내는 연기였기에 위대했고 같은 이유로 심히 불행했다”는 요지의 대사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연기에서, 특히 영화 연기에서 가장 좋은 것은 연습으로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을 지지한다. 하정우는 이 견해에 담긴 일말의 진실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은 궁극적 단계에 다다랐을 때의 문제라고 여기고 어떤 경지까지는 연습의 힘을 신뢰한다. 맞다. 연기는 분명 신비를 포함하지만 현실적 레벨에서 연습이 만드는 연기가 알아차릴 정도로 겉도는 데에는 그것이 노력의 결과라서가 아니라 노력이 충분치 않아서인 경우가 많을 터다. 하정우가 말하는 연습의 개념은 마음가짐과 해석을 포함한다. 그러나 영화배우에게 현장에 가기 직전 구체적인 연기 연습이란 과연 무엇부터 어떻게 이뤄지는 것일까? 책상 앞에서? 거울 앞에서? 집안을 소요하면서? 하정우의 대답은 명료하다. “한줄을 넘어가는 대사는 모두 연습해야죠. 지금 막 뱉은 말처럼 미묘하게 템포를 조절하고 어느 지점에서 약간 씹는듯 하는 것까지 핸들링하려면 암기를 넘어 체화시켜놓는 쪽이 맞는 것 같아요. 긴 독백은 변기 옆에 붙여놓기도 하고 외출할 때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숨돌릴 때 슥 눈으로 훑기도 하면서 결이 계속 쌓여야 <의뢰인>의 최후변론이나 <러브픽션>의 고백신을 망설임 하나없이 뱉을 수 있어요. 또 뭘 준비해야 하나. 감독이 요구하는 희극적 포인트가 있으면 몇 가지 아이디어를 갖고 가죠. 하지만 상대배우와 주고받는 대화는 연습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만취상태에서도 연기할 수 있는 거예요. <범죄와의 전쟁> 횟집 장면은 소주 한병을 마시고 찍었는데 최민식 형 방향 숏부터 먼저 찍으니까 맞은편에서 형 연기를 바라보며 홀짝홀짝 마신 다음 연기했어요.” 영화는 콘티를 수반하기에 촬영 직전 연습은 블로킹의 설계를 포함한다. 연극적일 수밖에 없는 법정 장면을 포함한 <의뢰인>이 대표적이다. “그 신은 거의 연극이었어요. 360도가 다 객석이니 골고루 시선을 줘야죠. 미술팀에서 법정 도면을 받아서 증인석, 판사석, 배심원석, 객석을 그리고 증인마다 어디에서 출발하고 돌아설지 동선을 정리하고 최상호 촬영감독님께 보여드렸어요. 상대 배우와 동선이 겹치면 조정하고 이동 트랙이나 조명과 관련된 기술적 문제를 검토해 감독님과 논의합니다.”
이제 하정우가 경애해 마지않는 연기, 그리고 스스로 아끼는 출연작의 장면들을 보러 조그만 극장으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한손에는 DVD 더미, 한손에는 (3500원을 주고 굿다운로드했다는) 자신의 출연작 파일이 든 노트북을 들고 앞장선 하정우로부터 <대부>의 주제가 <The Godfather Waltz>를 흥얼거리는 휘파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