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0 정상회담이 열린 2010년 11월11일, 일민미술관에선 <감응: 풍토, 풍경과의 대화>란 제목으로 <정기용 건축전>이 개최된다. 이날의 전시회는 단일 건축전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였고, 관객 동원 면에서도 가히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는 바로 이 전시를 구성하는 과정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고양이를 부탁해>와 <태풍태양>의 연출자 정재은이 1여년간 정기용의 뒤를 따랐고, 상황에 따라 건축가를 유연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당시는 건축가가 대장암 후유증으로 죽음을 향하던 시기였다. 영화는 정기용이 목표로 한 ‘인간과 자연과 건축의 조화로움’을 본인의 삶에 어떻게 접목했는지에 주목한다.
삼청동 소재의 ‘기용건축 사무실’이 시작부의 배경이다. 건축가로서 주인공의 포트폴리오와 간략한 프로필이 소개되고, 이어서 ‘무주 공공 건축물 프로젝트’를 통해 정기용식 건축의 특성이 드러난다. 그가 지향한 것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 화려한 외벽보다는 사용자가 누리는 마음의 여유다. 스스로를 장돌뱅이라 칭한 이 고결한 정신의 설계자는 사용자의 생활모습을 건축에 반영하려 했고, 때문에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와 ‘건축가의 집’, 춘천의 ‘자두나무 집’에 이르기까지 그 코드가 건축들을 꿰뚫는다. 대개 건축을 하는 사람을 프레임에 담을 때 영화는 건물을 통해 인물을 바라보려 한다. 하지만 이 다큐는 건축가의 정신을 사용자에 연결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연출 방향 또한 건축보다는 ‘정기용식 건축 특성’에 맞춰졌고, 때문에 사건을 즐기기보다는 영화를 통해 건축가와 사귄다는 기분으로 객석에 앉는 편이 좋다. “건축은 물리적 휴식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리적 성소이기도 하다”는 알랭 드 보통의 구절이 떠오른다. 사회가 심어놓은 강박, 마음의 감각을 무시하고 환경에 인간을 맞추려는 규칙에의 강요가 스크린을 통해 걸러지고, 마지막 부분의 ‘나들이 시퀀스’가 이를 압축해 보여준다. 수십년 함께한 직원들로 둘러싸인 침상에 누워, 정기용은 하늘과 바람과 나무에 차례로 감사하다 말한다. 그만이 만들 수 있는 장면, 아이폰으로 촬영돼 화질은 흐리지만 이 장면은 유독 아름답다.
여러 예술 중 건축은 ‘외형의 정당성과 도덕적 가치, 막대한 비용에 대한 유용성’을 추궁받는다는 점에서 엄정한 분야다. 서울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둘러싼 건축가들의 의견과 ‘흙건축’ 대가로서의 정기용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한국사회가 지양해야 할 도시모델을 꼬집는다. “문제도 이 땅에 있고, 그 해법도 이 땅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다”며 선생이 칠판에 눌러쓴 문장이 객석에 각인된다. 시간을 말하는 건축가, 사람을 말하는 한 건축가의 부드러운 웅변을 발견하기 위해 영화는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죽음의 음울함을 뛰어넘는 따스한 정신, 기묘한 리듬감을 보이는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는 봄날과 썩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