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센던트>를 하라!’고 신들이 마치 명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알렉산더 페인으로선 <디센던트>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중도 승선했지만, 굳이 그의 오랜 단짝인 시나리오작가 짐 테일러를 투입해 이야기를 새로 고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냇 팩슨과 짐 라시가 각색한 시나리오는 주인이 바뀐 프로젝트의 운명을 미리 점치기라도 한 것처럼 쓰여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와이 출신 소설가의 원작 자체가 알렉산더 페인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를 상당 부분 지니고 있었다. 아내가 보트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지고, 딸에게서 아내의 부정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듣고, 결국 아내의 정부(情夫)를 찾아가는 중년 남자의 해프닝은 알렉산더 페인이 그동안 즐겨 다뤄왔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면, <어바웃 슈미트>의 잭 니콜슨이 오랜 친구의 면상에 주먹을 먹인 이유를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아니면, <사이드웨이>의 폴 지아매티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붉은 와인으로 샤워한 까닭을 상기하면 된다. “어쨌든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코미디를 좋아한다. 나도 물론이고. 나는 비극도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외도나 식물인간은 누구나 좋아하는 소재 아닌가. 이러한 이야기를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이국적인 장소에서 펼쳐지는 독특하고 인간적인 이야기에 이끌렸다.”(알렉산더 페인)

하와이에 사는 변호사인 맷 킹(조지 클루니)은 한달 가까이 아내 엘리자베스(패트리샤 해스티)의 병상을 지키고 있다. 한 남자와 수상스키를 즐기다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를 입은 엘리자베스는 산소호흡기 없이는 연명할 수 없다. 맷 킹은 가정을 등한시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아내가 의식을 되찾는다면 전과 달리 ‘진정한 남편과 아빠가 되겠다’고 다짐하나, 의사들은 엘리자베스가 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아내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맷 킹. 그러나 딸들조차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다. 집에서 나가 사립학교에 다니는 첫째딸 알렉산드라(셰일린 우드리)는 알코올 중독이고, 둘째딸 스코티(아마라 밀러) 역시 엄마의 예고된 죽음을 신나는 이벤트쯤으로 여기고 있다. 맷 킹은 아내를 대신해 한동안 두딸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지만, 아내가 브라이언 스피어(매튜 릴라드)라는 남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알렉산드라의 말에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맷 킹이 하소연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비난의 화살은 모두 그에게 쏟아진다. 알렉산드라의 불륜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친구들은 일밖에 몰랐던 맷 킹을 원망하고, 맷 킹의 장인 역시 돈밖에 몰랐던 사위가 자신의 착한 딸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몰아세운다. 그럼에도 두딸을 앞세우고, 아내가 사랑했던 남자 브라이언 스피어를 만나러 가는 맷 킹의 속셈은 도대체 뭘까.

흔히 알렉산더 페인의 남성 캐릭터들은 “결점투성이 루저”라 통칭된다. 그들은 쉽게 슬퍼하고, 자주 분노하고, 언제나 두려워하며, 항상 외로워한다. 스스로를 이상적인 교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짐(매튜 브로데릭)이 질투에 사로잡혀 딸 같은 여고생을 상대로 말도 안되는 협잡을 꾸미는 것을 보라(<일렉션>). <어바웃 슈미트>의 은퇴한 노친네는 또 어떠한가.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난 유부녀에게 기습 키스를 감행하다 식은땀 흘리며 야반도주하지 않던가. <사이드웨이>의 대머리 이혼남 마일즈 역시 앞의 두 남자와 다를 것 하나 없다. 헤어진 아내가 새 연인과 함께 자신의 친구 결혼식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소식 하나만으로도 마일즈는 미쳐 날뛴다. 그렇다면, 이 모든 해프닝은 단지 찌질한 루저들에게만 일어나는가. <디센던트>의 맷 킹은 짐처럼 별볼일 없는 교사도, 슈미트처럼 은퇴한 보험회사 직원도, 마일즈처럼 번번이 물먹는 소설가 지망생도 아니다. 거대한 땅을 상속받은 부호이자 하와이에서 인정받는 명망가다. 그런 그가 이렇게 중얼거린다. “육지에 사는 친구들은 내가 하와이에 산다고 천국에 사는 줄 안다. 마이타이를 홀짝이며 파도타기로 인생을 즐기는 줄 안다. 하지만 하와이에 산다고 인생이 면역이 되나. 하와이에 살면 암도 안 걸리나. 서핑 안 한 지가 15년째다.” ‘퍼킹 파라다이스!’라는 맷 킹의 오프닝 독백은 외면했던 현실이 하나둘 까발려지면서, 단순한 푸념이 되고 만다

어제를 끌어와 내일을 이야기하다

“남자는 단연코 자신이 외부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자아를 체험한다. 그는 세상의 박수를 받으면서 자아를 체험하고, 여자의 환한 웃음과 그를 흠모하는 여자의 휘둥그렇게 뜬 두눈에서 자아를 체험한다. 때때로 그가 뭇 남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서, 다시 말해서 뭇 남자들이 그에게 바치는 존경심에서 그는 자아를 체험한다…(중략)…그의 그런 자아 체험 방식이 바로 그의 가장 큰 약점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인정할 능력이 없다. 자기 자신에게든지 타인에게든지 그는 도대체 자신의 약점을 인정할 능력이 없다.”(<남자: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 114∼115쪽,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알렉산더 페인의 ‘남자’들은 한때 그들이 ‘특별한’ 존재였고,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함없다는 환상에 빠져 있다. 누군가가 죽고, 누군가와 이혼하고, 그들은 시련을 맛보면서 이제까지의 삶을 찬찬히 되돌아볼 기회를 얻지만, 자신이 실패자라는 사실은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두딸을 데리고 병원에 들른 맷 킹이 죽음 직전의 아내에게 욕설을 퍼붓는 장면을 보자. 맷 킹은 자신에게 향한 딸의 불만을 고스란히 아내의 책임으로 전가하며 분풀이한다. 아내가 사랑했던 남자를 기어코 찾아가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꼭 한번 병원에 들러달라 간청하기 위해서? 그는 정부의 아내에게 복수의 키스(?)를 감행할 뿐이다.

알렉산더 페인의 ‘남자’들은 그러니까 낙오해서 루저가 아니라 패배를 인정하지 않아서 루저다. <일렉션>의 짐은 경멸해 마지않던 자신의 친구와 똑같이 집에서 쫓겨난다. <어바웃 슈미트>의 슈미트는 결사 반대했던 딸의 결혼을 막지 못한다. <사이드웨이>의 마일즈는 전처의 새 남편 앞에서 쓴웃음을 짓는 수밖에 없다. 삶은 그들이 원했던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흘러버린 삶은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이킬 수 없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비 상극에 관한 오랜 경구.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어떤 걱정도 만들지 않는다.” 알렉산더 페인이 비극적인 상황을 제시해놓고 그 안에 끊임없이 유머를 주유해왔던 건 무슨 심산에서였을까. 세상 바깥에만 행복이 존재한다는 비극의 기본 전제를 그는 깔깔거리며 부정한다. 대신 그는 실패를 웃으며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세상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덧붙이는 듯하다. <디센던트>는 전작들보다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디센던트>의 비애와 유머가 한데 모아지는 대목은 다름 아닌 맷 킹이 병원에서 장인, 장모와 다시 맞닥뜨리는 장면이다. “장인이 ‘딸은 충실했고 헌신적인 아내였으며 자네한테 과분했다’라고 몰아붙였을 때 맷은 대항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는다. ‘맞아요. 저에게 과분했어요’라고 말할 뿐. 이는 캐릭터의 성장과 깨달음을 보여주는 작은 순간이다.” 알렉산더 페인의 말처럼, 맷 킹은 전작의 캐릭터들보다 일찍 알아차린다. 손가락질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스튜디오가 19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개인적이고, 위험하고, 정치적인 영화들에 투자해주었으면 한다. 이건 순진한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이야기다. 지난 25년간 미국영화는 존재했지만, 미국에 관한 영화는 부재했다. 공식에 짜맞춰진 영화들이 맥도널드 햄버거처럼 소비됐을 뿐이다.” 10년 전, 알렉산더 페인은 유년 시절 자신의 우상이었던 마틴 스코시즈에게까지 쓴소리를 내뱉으면서 ‘리얼한 미국영화’를 옹호해왔다. 그는 실제로 장편 데뷔작 <시민 루스>를 비롯해 <일렉션> <어바웃 슈미트> <사이드웨이> 등의 전작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허구 혹은 미국식 사고가 낳은 왜곡된 가치에 대한 씁쓸한 조소와 신랄한 비난을 감추지 않았다. 전작들과 비교하면 다소 완곡한 방식이지만, <디센던트>에서도 그의 문제의식은 계속된다. “영원한 것은 없다”며 하와이안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려던 맷 킹은 가족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동시에 친척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을 팔지 않겠다고 맘을 바꿔먹는다. “어디든지 기본적으로 땅과 힘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하와이는 특히 그러하다. 하와이는 천국이다. 하지만 쿡 선장 이후 지난 200년 동안 미국에 합병되고, 1959년에 주로 승격되는 등의 변화에 대해서 원주민들의 분노가 크다. 하와이에는 고유의 민감한 역사가 있다.” 알렉산더 페인은 “맷 킹이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우면서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는다”고 말한다. 맷 킹이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과 제 손으로 이룬 것을 분별하려고 노력할 때 엄마를 잃은 두딸도 맷 킹에게 마음을 연다. 알렉산더 페인의 <디센던트>에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다면, 오늘을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제를 끌어와 내일을 이야기하려는 감독의 의지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