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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한 스파이>여 다시 한번

영화화하면 좋을 스파이 소설과 실화들

<작전명 발키리>

영화로 각색할 만한 스파이 소설의 걸작들을 고르는 건 영화로 각색할 만한 정통 추리소설을 고르는 것보다 백배 어렵다. 왜? 이들은 퍼즐 미스터리와 달리 훨씬 영화화하기 쉬우며 이미 대부분 각색되었기 때문이다.

의심나면 한번 보라. 조셉 콘래드의 <비밀 첩보원>, 존 버캔의 <39계단>, 서머싯 몸의 <어센든>, 에릭 앰블러의 <디미트리우스의 관>,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와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렌 데이튼의 해리 파머 시리즈(스파이의 이름은 영화화된 뒤에야 붙은 것이긴 하지만), 프레드릭 포사이드의 <자칼의 날>, 잭 히긴스의 <독수리 착륙하다>, 로버트 러들럼의 본 시리즈, 켄 폴리트의 <바늘 구멍>…. 이들은 스파이 소설의 대표작 리스트지만 첩보영화/드라마의 대표작 리스트에서도 많이 떨어져 있지 않다.

<독수리 착륙하다>

실화로 소재를 돌린다면?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발키레의 히틀러 암살 미수, 에이스 스파이 라일리, 하이드리히 암살, 케임브리지의 5인, 로버트 핸슨 사건…. 이들은 모두 직접 있각색되었거나 다른 소설들의 소재가 되어 영화화되거나 드라마화되었다. 영화판 사람들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치가 않다. 그들을 얕보지 말라. 당신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라면 그들은 몇 십년 전부터 알고 있다.

이언 플레밍, 조셉 콘래드… 이들을 다시 보라

<나를 사랑한 스파이> <서구인의 눈으로>

그래도 몇편 골라보라면? 우선 난 이언 플레밍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영화화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언 플레밍이 쓴 소설들이 모두 충실하게 영화화된 건 아니며, 일부는 그냥 제목만 빌렸다. 다시 말해 아직 여유가 있다. 이들 중 각색자들의 입장에서 가장 그럴싸해 보이는 건 <나를 사랑한 스파이>. 소설과 영화가 전혀 다르고, 원작은 일반적인 본드 시리즈의 형식에서 과감하게 떨어 져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인 여자주인공의 1인칭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도입부만 읽으면 이게 본드랑 무슨 상관이냐고 따지고 싶을 지경이다. 실제로 본드는 소설이 한참 진행된 뒤에야 겨우 등장한다. 물론 이 영화를 일반적인 본드 영화의 규격에 맞추어 영화화하기는 어렵다. 아마 홍보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다. 게다가 원작이 제목과 더 잘 어울린다.

조셉 콘래드의 <서구인의 눈으로>는 어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했던 폴란드 작가가 쓴 가장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소설이다. 글쎄, 난 이 러시아 혁명주의자들 사이에 엉겁결에 낀 프락치 청년의 이야기를 관객이 그렇게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주제가 드러나고 드라마가 완성되는 거의 자폭에 가까운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대부분의 독자는 손발이 저리는 증상을 느낀다. 하지만 그거야 <로드 짐>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스파이들이란 대부분 제임스 본드 같은 영웅이 아니라 <서구인의 눈으로>의 라주모프 같은 인간들이다. <서구인의 눈으로>는 스파이 장르물에서 훌륭한 교정효과를 낼 수 있다. 내가 매력적으로 느끼는 건 영어와 러시아어가 겹치고 혼용되는 모양새인데, 아, 할리우드라면 여기에 전혀 관심이 없을 거다.

에릭 앰블러의 첫 소설 <어두운 국경>은 어떨까. 그렇게 인기있는 책은 아니며, 앰블러의 대표작도 아니다. 소설 자체가 당시 유행했던 싸구려 서스펜스물의 패러디니, 아마 요새 독자들은 시치미 뚝 뗀 유머와 진지한 액션을 구별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이 30년대 소설은 더 그럴싸한 영화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인 면은 핵폭탄을 다룬 최초의 소설 중 하나라는 것. 핵폭탄이 나오는 <풍운의 젠다성>인 것이다! 원작의 과학 묘사는 엉망이지만 이에 대해 보다 상세한 지식을 가진 우리는 이를 개선해서 더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결말은 소설보다 더 애잔하다. 주인공이 핵폭탄의 비밀을 파괴하고 간신히 돌아왔을 때, 라디오에서 오토 한과 프리츠 스트라우스만이 최초의 핵분열 실험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나오는 엔딩을 생각해보라. 원작에는 없지만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엘리자베스 보언의 <한낮의 열기>가 각색된 적 있는지 검색해봤다. 해럴드 핀터가 각색한 TV드라마가 하나 있긴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무대로 두 스파이 사이에 놓인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 로맨스에 관심있는 사람이 이렇게 적은 건 이상한 일이다. 보언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로널드 커크브라이드의 소설 <짧은 밤>을 각색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라 믿는다. 우선 이중첩자 조지 블레이크의 탈출을 모티브 삼은 이 냉전 첩보소설의 이야기가 시대에 조금 뒤떨어졌기 때문이고(읽어본 적은 없지만 시놉시스만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둘째, 이 작품은 앨프리드 히치콕이 죽기 전까지 계속 영화로 만들기 위해 다듬고 있었던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짧은 밤>을 거치지 않더라도 조지 블레이크의 이야기는 여전히 영화화될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가 비록 ‘적’이라고 해도, 이미 냉전은 끝났고, 영리한 적군의 탈출담을 그린 영화의 전통이 존재하며, 그와 그의 탈출 공범인 숀 버크와의 관계는 진지하게 파볼 만하다. 참, 역시 읽은 적은 없지만 조지 블레이크가 나오는 한국 소설도 있다. 박영숙의 <더블 크로스>. 한국전 때 당시 주한 외교관이었던 조지 블레이크가 한국 첩보원과 한국 여성을 두고 삼각관계를 벌인단다. 불쌍한 블레이크. 책은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영화보다 극적인 실화들

<텔레마크 요새의 영웅들>

실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제대로 영화화될 가치가 있는 이야기로, 노르웨이의 중수공장을 폭파하고 나치의 핵폭탄 개발을 저지한 노르웨이 특공대와 레지스탕스 이야기가 있다. 안다. 이미 커크 더글러스 주연으로 <텔레마크의 영웅들>이 나왔다. 하지만 영화는 실화의 박진감의 반의반의 반도 갖추지 못했다.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데, 그걸 굳이 각색해서 심심한 멜로드라마로 만들 필요가 있나? 그리고 이번엔 제발 노르웨이인 주인공들 역할은 노르웨이 배우들에게 맡기자.

영화화될 법한데 안 나오는 ‘실화들’은 또 있다. 왜 아무도 알린 그리피스의 ‘회고록들’에 관심이 없는 걸까? 미국인 패션모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에 발탁되어 스페인 사교계에서 돈을 펑펑 쓰는 호사스러운 삶을 살며 스파이질을 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백작부인까지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이 정도면 80년대 미국에서 많이 나왔던 통속적인 미니시리즈의 소재로 충분하지 않나?

실제로 일어난 적은 없지만 일어날 뻔했던 작전들도 있다. 이중 황당한 거 하나. 제2차 세계대전 때 OSS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납치할 계획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걸 아시는지? 하이젠베르크가 노벨상을 탄 위대한 물리학자이고 독일 핵분열 연구팀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니 얼핏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이 계획을 짤 때, 그가 (위대한 이론물리학자답게) 건전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이해 못하는 기계치였고 엄청난 마마보이였다는 사실은 몰랐다.

한번 시치미 뚝 떼고 이 계획이 진짜로 일어났다고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물론 간신히 독일에 침투해 들어간 주인공들에게 하이젠베르크는 이곳에 남아 연구를 사보타주하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주장하며 (까짓 거 믿어주자) 주인공들을 설득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보다 충성스러운 나치 과학자가 핵폭탄 제조에 필수적인 연구를 했음을 알게 된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을 제대로 아는 첩보원이 필요하다. 주인공들은 당장 OSS에 연락해서 혹시 물리학에 대해 잘 알면서 금고털이 기술이 뛰어난 첩보원을 파견할 수 있는지 묻는다. OSS에서는 닐스 보어에게 이 내용을 전달하고 보어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딱 한명 있는데요’라고 대답한다. 그날 밤 OSS는 병든 아내에게 편지를 쓰고 있던 리처드 파인먼을 끌고 와 스위스행 비행기에 태운다…. 그냥 그럴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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