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무엇보다 시각예술이며, 따라서 제작의 측면에서나 감상 및 비평의 측면에서 최우선으로 강조해야 할 것은 이미지라고 하는 믿음은, 유성영화가 도래한지 80년이 넘은데다 미디어간 간섭에 의해 영화의 ‘순수성’이 점점 의문에 부쳐지고 있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듯하다. 역사적으로 미장센 비평(및 그와 결부된 시네필리아)에 토대를 부여한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동시대 영화의 상당수가 미장센에 입각해서만 바라보면 어쩐지 무언가 미끄러져 달아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 덜 ‘영화적’으로 비치거나(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징후와 세기>), 심지어 공허해 보이기까지(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쉬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장센 개념을 폐기하고 창작의 애티튜드만을 강조하거나 영화와 인접한 예술의 영향을 추적하며 비교에 매달리는 것은 게으른 이들의 방편일 뿐일 터, 오히려 이제는 그간 미장센이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지나치게 협소하게 정의되었던 것은 아닌지 따져봐야 할 때다. 이때 호주 영화비평가 에이드리언 마틴이 지난해에 발표해 적잖은 주목을 끌었던 논문 ‘페이지를 넘겨라: 미장센(mise-en-scene)에서 장치(dispositif)로’- 어느 정도는 그가 1992년에 발표한 도발적인 제목의 글 ‘미장센은 죽었다’의 속편 격인 글이지만 최근 20여년간의 미디어스케이프 변화에 따른 영화 변용과 그에 수반된 여러 이론적/비평적 고찰의 성과들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는 우리의 주목에 값한다.
그의 비평적 제안 전체를 협소한 지면에서 충실히 요약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므로 개략적으로 스케치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는 키아로스타미의 <텐> 같은 영화에서 미장센의 전통적 과정(무대화, 세트의 구성, 조명 설계, 카메라 운용, 연기지도 등)은 장치로, 즉 요소들의 고정적이고 체계적인 배치 내지는 배열로 대체되고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게임의 규칙’을 설정하고 그 규칙에 따르는 상황을 셋업하는 일- 물론 이 규칙은 예기치 못한 시점에서 유희적으로 위반되기도 할 것이다-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적 장치는 종종 특정 요소의 배제를 통해 만들어지는 개념적(conceptual) 영화로 이끌리긴 하지만, 기계적이고 엄격한 형식체계라기보다는 변화와 경이 및 예술적 모순 등에도 열려 있는 미학적 가이드트랙에 가깝다고 마틴은 주장한다. 그의 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장치 개념을 다듬기 위해 (한동안 영화이론의 영웅적 시기가 남긴 철지난 유물로 간주되었던) 장-루이 보드리의 논문에서 장치의 사회적 의미를 복원해내고, 이를 푸코/들뢰즈/아감벤의 장치 개념을 비롯한 여러 이론가들의 장치에 대한 논의와 결부해 고찰할 것을 제안한 다음, 확장된 개념의 미장센에 대한 사유로 나아간다. 즉, 마틴의 이 논문은 미장센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되는 시기에 과거의 영화 및 영화비평/이론들에 분명히 잠재되어 있었으되 주목받지 못한 측면들을 재조명함으로써 미장센에서 장치로, ‘사회적’ 미장센으로, 그리고 (영화학자 레이몽 벨루를 따라) 배치(mise)는 비단 신(scene)에 국한되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인식으로 향한다. 위협의 한복판에서, 영화의 ‘인터미디어’(intermedia)로의 변용을 긍정하며, 시네필리아의 가능성을 되찾는, 참으로 모험적인 글이다.
※ 에이드리언 마틴의 논문은 웹진 ‘스크리닝 더 패스트’(www.screeningthepast.com) 제31호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올해 인문예술잡지 <F:에프> 제5호에 한글로도 번역, 게재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