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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매혹적인 인물과 영화적 스타일에 박수를

데이비드 핀처에 의해 태어난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소설 <밀레니엄> 시리즈의 열성 독자 중 한 사람인 노벨문학상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소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뒤마의 총사들과 디킨스의 소설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기쁨과 흥분을 느꼈다”고 <밀레니엄> 시리즈에 관한 그의 독후감에 쓰고 있다. 덧붙여 “물론 <밀레니엄> 시리즈가 완벽하게 잘 쓴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줄거리의 설득력이 강력하고, 명확하고, 예측 불가능하고, 매혹적인 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독자들은 개의치 않고 소설의 기술적인 부족함을 뛰어넘는다. 달콤하게, 기쁘고, 놀라서”라고 칭송을 보내고 있다. 이 저명한 소설가의 찬탄은 일반적으로 소설 <밀레니엄> 시리즈의 장점으로 꼽히는 사회소설로서의 면모들, 즉 세계화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대두된 괴물 기업과 그 기업가의 부패, 광란적 민족주의와 우월주의로 가득한 나치즘의 연대기 그리고 여성과 하층민과 외국인에관한 여전히 현재진행 중인 폭력성이라는 테마가 추리소설의 구조 안에서 흥미롭게 서로 관계를 맺고 돋보인다는 뜻일 것이다. 그 점이 <밀레니엄> 시리즈를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되게 했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지게 했으며, 이미 3편까지 완성된 스웨덴판 영화 이후에도 다시 데이비드 핀처의 손을 거쳐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하<밀레니엄>)로 탄생하게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미스터리 위에 세워진 인물들

영화의 이야기는 소설의 이야기와 거의 일치한다. 밀레니엄이라는 시사잡지의 대표 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대니얼 크레이그)가 한 거물급 부패 기업인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가 도리어 역공을 당하고 잠시 일선에서 물러앉게 되었을 때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된다. 한때 스웨덴의 가족 기업으로 이름 높았던 방예르가의 회장 헨리크 방예르에게서 자신들의 가족사에 새겨진 미스터리를 추적해 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 것. 가족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한 40년 전의 그날, 헨리크의 조카딸 하리에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날 방예르가의 사람들이 사는 섬과 육지를 잇는 유일한 교통로인 다리 위에서는 차량전복 사고가 일어났고 아무도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었다. 만약 하리에트가 단순 실종된 것이 아니라면 그때 이 섬에 있던 가족 중 누군가가 그녀를 해친 것이 분명하다고 헨리크는 말한다. 미카엘은 정체를 알 수 없는 24살의 펑크족 정보원이자 천부적인 컴퓨터 해커인 리스베트 살란데르(루니 마라)와 함께 방예르가의 사라진 여인 하리에트 사건을 공동 수사하게 된다.

핀처가 이런 내용을 영화화하고자 결정했을 때 물론 추리 구조에 대한 매혹이 그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가장 매혹시킨 건 의외로 다른 것이었다. “사실 미스터리는 내게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나치, 연쇄 살인범들이 그들의 지하실에서 저지르는 악, 그런 게 이 영화에서 최우선이자 가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는 거다. 나는 리스베트와 미카엘, 둘 사이의 파트너십을 그 이전에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원작의 스릴러와 방식을 좋아했지만 진정으로 관심있었던 것은 바로 인물들이었다.” 각본가 스티븐 자일리언 역시 소설 <밀레니엄>시리즈의 성공 요인으로 “오래된 미스터리를 설정한 뒤 매우 모던한 오늘날의 두 형사(미카엘과 리스베트)를 투입한 것”을 꼽았는데, 그중에서도 그는 “역시 열쇠는 리스베트”라고 말하며 핀처와 자신의 이번 영화 <밀레니엄>을 “미카엘로 시작하여 리스베트로 끝나는 영화”라고 강조했다.

스웨덴판 <밀레니엄>의 여주인공 노미 라파스가 거절하고 내털리 포트먼도 거절한 다음 스칼렛 요한슨은 너무 예뻐서 제외된 리스베트 역에는 <소셜 네트워크>의 여배우 루니 마라가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녀의 말처럼 리스베트라는 인물은 “단지 말에서 모터사이클로 바꿔 탔을 뿐, 마치 삐삐 롱스타킹의 25년 뒤 같다”. 미카엘과 리스베트가 공조체제를 형성한 뒤 혹은 야릇한 로맨스의 기운에 휩싸이면서 혹은 일반적인 추리물과 다르게 주·조역의 위치가 바뀌어가는 상태에서 영화는 방예르가의 폭력의 연대기에 더 깊숙하게 근접해 들어간다.

근사하나 몰개성적이라고?

새로 태어난 핀처의 <밀레니엄>은 대다수의 평자들에게는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특기할 만한 소수 반론이 없었던 건 아니다. <타임>의 리처드 콜리스는 “핀처의 버전을 본다는 건 당신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이미 받은 책을 또 받는 것과 같다”고 혹평했다. 원작을 벗어나지 못했거니와 이미 개봉한 스웨덴 버전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한편 “뭔가 빠져 있다”는 문장으로 글을 시작한 다음 “핀처의 영화는 근사하게 표현됐으나 표식을 남기기에는 지나치게 몰개성적이다”라고 글을 맺은 <롤링 스톤>의 피터 트래비스의 지적은 이 문제를 좀더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준다. 전반적으로 핀처의 <밀레니엄>은 뭔가 미흡한데 그게 부족한 개성의 표식과 관계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공감이 가는 지적이다.

이 점은 <밀레니엄>을 핀처 자신의 스릴러 장르 중 최고봉으로 꼽을 만한 <조디악>과 비교해보면 된다. <조디악>은 유력한 용의자를 둘러싸고 주인공들의 판단 착오와 실수가 되풀이되면서 끈질긴 숨바꼭질이 벌어지는 한편, 그에 따라 수없이 방점이 재조정되며 주인공조차 바뀌어 간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유려하고 중후한 유기적 리듬을 갖추게 된다. 그에 비하여 <밀레니엄>은 (이것이 원작에도 고스란히 있는 문제라고는 해도) 다소 갑작스러워 보이는 용의자의 등장과 미스터리가 해결되는 단 한번의 고저를 향해 진전하는 와중에, 부분적인 세공술은 크게 돋보이지만 전반적으로는 다소 딱딱하게 굳어버린 기계적 리듬을 지니게 된다.

<밀레니엄>에서 리스베트와 미카엘이라는 두 인물은 단순히 두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 영화의 영화적 리듬을 지탱하는 두개의 힘 또는 두개의 분위기라고 인식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핀처가 리스베트와 미카엘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말했을 때, 거기에는 서로 다른 곳에서 온 두 힘과 분위기가 어떻게 영화 전반의 유기적 리듬을 조화롭게 할 것인가 하는 영화적 관건이 은연중 포함되어 있었던 셈이다. 가령, 과거의 핀처가 <쎄븐> <파이트 클럽> 등에서 힘과 분위기를 인물들의 정신분석학적 상태로 파열하고 대치시켜서 그 인물들 자체를 미스터리로 만들어버렸다면, <조디악>은 정신분석의 기제들을 걷어내고 실화에 전체 흐름을 맡기되 인물들을 작용과 반작용하는 물리적 힘과 분위기로 전환하여 그 인물들의 생의 시간 자체를 유장한 미스터리로 남긴다. 핀처의 <밀레니엄>이 의도적으로 여주인공 리스베트의 그 어떤 과거도 심리적 상태도 드러내지 않고 그녀의 행동만을 따라 진전할 때 이 영화 역시 은연중에 <조디악>의 방식을 의식하고 있는 것인데, <조디악>이 끝내 성취해냈던 유려함과 우아함이란 면모가 <밀레니엄>에서는 확실히 ‘빠지고’ 말았다.

프랜차이즈물로서의 장점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성인용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프랜차이즈물이 될 것”이라고 핀처는 말해왔다. 그는 애초부터 대중적 재미 이외에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의 말에 기준하여 다음과 같은 장점들을 거론한다면 이 영화는 또한 충분히 흥미롭게 즐길 만한 여지가 생긴다. 인물의 단순한 외양적 표현을 넘어 영화의 대표적인 스타일이 된 분장, 공격적이면서도 음란하게 느껴지는 음악, 삭막하고 두렵고 갑갑한 인상을 주는 풍경들, 게다가 그 풍경들을 잡아내는 거칠면서도 양식적인 색감들, 동일한 2.35 대 1의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로 찍었으나 스웨덴 버전의 영화는 구현해내지 못한 핀처 영화만의 훨씬 더 비상하고 뛰어난 촬영술.

특히 부분적으로 매우 인상적인 몇몇 장면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장면들은 이 영화의 유기적 미완성과는 별개로 그 탁월함을 말해도 좋을 정도다. 예컨대 동시대의 어떤 감독을 통틀어도 핀처만큼 매혹적인 타이틀 시퀀스를 만들어낼 감독은 없는데, 그의 영화의 타이틀 시퀀스는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기운을 요령있게 압축해낸다. 하리에트가 실종되던 날 발생한 다리 위에서의 자동차 사고, 영화 후반부 중요하게 등장하는 또 다른 자동차 사고, 그리고 영화에서는 밝혀지지않는 리스베트의 과거사와 모두 연관을 맺고 있는 검은 기름과 어두운 범죄의 이미지가 타이틀 시퀀스에 매력적으로 담긴다. “잠재의식속의 타르와 분비물들. 그녀의 악몽”이 이 타이틀 시퀀스를 만들 때 핀처가 생각한 것이었다. 혹은 리스베트를 끔찍한 폭력으로 옭아매려는 변호사와 그녀가 벌이는 한판 승부는 거의 <쎄븐> 시절의 긴장감을 옮겨다놓는다.

그보다 더 뛰어난 장면들도 있다. 얼핏 지나치기 쉬운 전철 에스컬레이터에서의 액션신, 리스베트의 가방을 훔쳐 달아나려는 소매치기와 그녀가 한판 액션을 벌이는 전철 에스컬레이터에서의 몇초간의 액션의 합은 동작의 분할도 숏의 분할도 춤추듯 한다. 그리고 리스베트와 미카엘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과정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는데, 그들이 서류와 사진으로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은 어느 액션장면 못지않게 스릴 넘치게 연출됐다. 그렇게 영화는 정점에 닿고 리스베트와 미카엘은 방예르가의 악의 실체와 맞닥뜨리게 된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팬들이 해리 포터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려왔듯이 <밀레니엄> 시리즈의 팬들은 그 후속작을 애타게 기다릴 것이고 가능하다면 그게 핀처의 손을 한번 더 거치기를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밀레니엄> 시리즈에 다시 손을 댈지는 아직 그 자신도 잘 모르고 있다. 전례를 보아도 핀처는 기존작의 속편을 연출한 적은 있지만(<에이리언3>), 자기가 시작한 작품을 속편으로 계획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가 만든 이 영화 <밀레니엄>의 라스트신이 어딘가 묘하게 복귀의 상상적 여운을 남기며 끝맺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그냥 우리의 바람이 낳은 착각일까.

바르가스 요사는 원작 <밀레니엄>의 두 인물 리스베트와 미카엘을 향해 현대의 돈키호테라고 불렀는데 동세대 할리우드영화에서 활약하는 감독 돈키호테들 중 한명이 데이비드 핀처다. 그리고 조금 허풍을 떨자면 그는 지금 영화의 뒤마이거나 디킨스이거나 위고가 되고싶어 하는 중이다. <밀레니엄>은 그 과정에 있는 징검다리 같은 영화다. 그러니 바르가스 요사가 소설 <밀레니엄>시리즈에 관해 말했던 어투를 빌려 말할 수 있다. 핀처의 <밀레니엄>이 완벽하게 잘 만든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매혹적인 인물과 장면들 덕분에 관객은 개의치않고 이 영화의 부족함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달콤하게, 기쁘고, 놀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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