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감독 출연 하명중 <EBS> 1월20일(일) 밤 10시10분
하길종 감독은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빛났던, 그러나 불행한 연출자였다. <바보들의 행진>(1975)은 당대 청년문화의 기운을 흡수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기실 연출자가 흡족해할 만한 대표작 목록엔 포함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영화이론과 비평, 두 분야에서 모두 학위를 받은 하길종 감독은 귀국한 뒤 비평의 칼날을 휘두르길 꺼리지 않았는데 자신의 작품 역시 평하는 일이 잦았다. <한네의 승천>은 감독 자신이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 등과 함께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으뜸가는 수준작”으로 자평한 작업이다. 상징주의적 작풍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초기작, 타협의 산물인 몇몇 대중영화를 거친 뒤 <한네의 승천>에 이르러 하길종 감독의 연출력은 가히 놀라운 경지에 근접해 있다. 비록 당시 비평면에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한네의 승천>은 한국영화사에서 재평가되어야 할 목록 중 으뜸가는 수작이다.
영화는 신화적 모티브를 기둥으로 삼는다. 만명과 한네, 그리고 마을 제주의 얽히고 꼬인 인연들이 전개된다. 순수한 청년인 만명은 부락제를 앞둔 어느날 한네라는 여인을 만난다. 자살하려는 여인을 살려낸 만명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모신다. 마을의 부락제가 가까워지면서 만명을 둘러싼 비밀이 하나씩 밝혀진다. 마을 제주(祭主)는 만명의 어미를 범해 만명을 낳게 한 장본인이며 한네는 죽은 어미가 다시 현세로 돌아온 것. 제주는 한네의 정체를 알게 되어 다시 그녀를 범하려 덤벼들고 절망한 한네는 폭포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려 한다.
하길종 감독의 초기작 <화분>(1972)과 <수절>(1974)이 당대의 정치상황을 상징적 영상에 빗대 풀어나갔다면, <한네의 승천>은 얼핏 다른 맥락으로 읽힌다. 내러티브는 복잡하고 때로 기괴한 기운까지 품고 있는데 각 인물의 과거를 흑백화면으로 구성한 대목에선 줄거리의 맥락조차 놓치기 십상이다. 하길종 감독은 스릴러와 미스터리물의 구성을 빌려와 미로 같은 구조로 영화를 만들어냈다. 한네라는 여인의 분신, 제주라는 수수께끼의 인물 등 곳곳이 의문투성이다. 모든 의문과 갈등은 극의 종결부에 이르러서야 매듭이 온전하게 풀려나간다.
<한네의 승천>은 분열과 마성의 텍스트다. 하길종 감독은 마을 부락제가 벌어지는 광경을 다큐멘터리풍으로 촬영해 형식면에서 자유분방함을 과시한다. 민속적인 색채와 샤머니즘이 충돌하고, 여기에 관능의 몸짓까지 섞이면서 영화는 비약을 거듭한다. 인물간의 갈등은 제주가 만명이라는 청년에게 입을 열어 “내가 실은 니 아비다”라고 고백한 뒤에야 구체성을 품는다. 하길종 감독은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롱숏을 병치하는 기법을 사용해 극의 충격효과를 배가하고 있다. 영화를 배회하던 이상스런 힘과 광기는 한네라는 여인이 폭포에서 몸을 던지는 순간, 엄청난 파장으로 번지면서 파열한다. 반면 파편화됐던 내러티브는 그제야 하나로 뭉치면서 명료한 형태로 떠오른다. 이건 매우 현대화된 외피를 두른 고전 비극인 것이다. <한네의 승천>은 놀라운 순수성과 창의성, 그리고 고도의 지성이 빚어낸 작업이다. 거장의 영화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