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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의 감옥으로 둘러싸인 영화 <내가 사는 피부>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욕망의 복잡한 미로를 헤매는 즐거움을 선사해왔다. 그의 열여덟 번째 장편 <내가 사는 피부> 역시 입구와 출구를 한눈에 파악하기 쉽지 않은, 겹겹의 감옥으로 둘러싸인 영화다. 처음 마주하게 되는 감옥은 성형외과 의사 로버트 박사(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대저택이다. 그 안에는 박사가 인공피부이식을 통해 창조해낸 백옥의 프랑켄슈타인 베라(엘레나 아나야)가 감금돼 있다. 아무리 자살을 시도해도 박사의 손에 재생되는 그녀는 시시포스의 현신처럼 그려진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의 탈을 쓴 강도가 나타나 베라를 겁탈하는 일이 벌어진다. 박사는 강도를 쏴죽인 뒤 이전과 달리 베라를 따뜻하게 대한다. 그제야 교통사고로 인한 화상으로 죽은 박사의 아내 갈이 자신의 원본임을 알게 된 베라는 박사 역시 기억의 감옥에 갇힌 남자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가장 비극적인 죄수는 베라의 육체에 구속된 비센테의 영혼이다. 박사의 딸을 겁탈했다가 박사에게 붙잡혀 성전환수술을 당한 베라의 전신이 바로 비센테이기 때문이다. 체념하고 살아갈 듯 보였던 그는 신문에 실린 실종자 명단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자 탈출을 감행한다.

잘 알려진 대로 원작은 티에리 종케의 <독거미>다. 동거녀에게 매춘을 강요하며 그 장면을 지켜보는 중년의 성형외과 의사, 도망 중인 은행 강도, 영문도 모른 채 납치당해 사육당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우연의 힘으로 얽어낸 소설이다. 알모도바르는 그 우연의 틈을 베라의 육체로 봉합하려 했던 것 같다. 로버트 박사의 애증이 아로새겨진 여인, 강도의 정욕을 받아내는 구멍, 비센테를 가두어버린 분신으로서 그녀는 세 남자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며 이야기를 수렴시킨다. 그러니 그녀의 아물 지 않은 피부에 드러난 접합선이 깨어진 거울의 금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녀의 존재뿐 아니라 거울, 유리창 등의 반사체는 퀴어적 감수성으로 충만한 알모도바르의 영화적 세계에서 여전히 중요한 장치로 사용된다.

그 점을 제외하면 <내가 사는 피부>는 알모도바르의 최근작들에 비해 작가의 인장이 희미한 영화다. 가장 눈에 띄게는 액자구조가 사라졌다. 영화 속의 영화를 통해 인물이 자신의 욕망을 대리 진술하고,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통해 다단한 과거사를 풀어헤치는 방식이 이 영화에는 없다. 원색 위주의 묘사도 자제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공백에 많은 피가 엎질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수사학과 유혈에서 벗어나 엄격한 내러티브를 부과”하려 노력했다는 말대로 알모도바르는 창백한 화폭 속에서 서사를 전개해나간다. 흑·백·적·청이 화려하게 펼쳐졌던 전작 <브로큰 임브레이스>만 떠올려봐도 자못 진지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촉각적 눈’이라는 모티브는 존속하고 있으며 좀더 흥미로워졌다. 이전에도 알모도바르의 남자들은 모니터에, 스크린에, 광고판에 비친 여인의 얼굴을 더듬곤 했다. 그러나 <내가 사는 피부>의 남자들은 한발 더 나아간다. CCTV로 촬영되고 있는 베라의 얼굴을 로버트 박사는 줌으로 당기고, 강도는 혀로 핥는데, 시각적 환영에 압도돼 촉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그들의 모습이 영화의 핵심을 관통한다 .

알모도바르 특유의 자유분방한 재담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때로는 능수능란하게, 때로는 거칠게 금기를 넘나들던 서사적 활력은 눈에 두드러지게 쇠약해졌다. 때문에 인물들의 욕망은 침묵에 잠겨 있다. 그것이 의도된 침묵이 아닌 빈약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침묵이라 안타깝다. 다행인 건 거기에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무표정이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복수의 대상이 갈인지 비센테인지 헷갈리게 하는 그의 과묵함은 불안으로 일렁이는 엘레나 아나야의 눈빛과 아름다운 대조를 빚어낸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루이스 브뉘엘, 앨프리드 히치콕, 프리츠 랑, 조르주 프랑주를 모두 검토한 끝에 “나만의 길을 택하기로 결정했다”는 그의 선택은 길을 잘못 접어든 것 같다. 인용의 흔적을 지우는 데 불필요하게 소모한 에너지를 주어진 재능대로 정교한 내러티브를 설계하는 데 쏟았더라면 좋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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