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크루거, 킴 카다시안의 알몸을 드러낸 두 버전의 표지.
<타임>은 앤디 워홀에게 《스릴러》 음반으로 급부상한 1984년 마이클 잭슨의 초상을 요청했고, 그가 사망한 2009년 추모용 흑백사진으로 다시 표지를 장식했다.
<슈피겔>은 이라크전을 시작한 2002년과 ‘사실상’ 패전한 2008년, 부시 정권의 변모를 할리우드영화 캐릭터에 빗대 표지로 연속 활용했다.
데이비드 라샤펠, 나오미 캠벨을 비너스로 분장시킨 두 버전(유두를 드러낸 것과 가린 것)의 표지. <플론트> 2009년.
시각예술의 목적과 기능은 단 한점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다종의 목적들을 위해 예술은 제작, 감상되었고, 상이한 목적들이 한 작품 속에 중첩해 발현되기도 한다. 상상력의 표현과 유미주의 추종은 널리 통용되는 예술론일 것이다. 의사소통 수단, 프로파간다 활용, 시각적 오락 제공처럼 다분히 기능성에 비중을 둔 예술론이 차지하는 몫도 크다. 잡지의 표지는 네모진 틀에 시각 정보를 채워넣는 형식에서 네모진 액자에 그림을 끼워 보여주는 미술의 제시 방식과 닮았다. 잡지 표지의 일관된 미학은 그 주/달의 사건(인물)을 주제로 삼는 원칙이다. 당대 인구에 회자된 사건/인물을 예외없이 그 주/달의 커버로 선정하는 점에서 잡지 표지의 기획안은 전적으로 대중 취향을 고집한다. 이는 여론을 균형있게 수렴하기에 장점으로 꼽히지만 속물 취향으로 흘러 잡지의 품위를 훼손할 위험도 안고 있다. 편집인이 대중 취향과 위험한 줄다리기를 시도하는 빈번한 사례는, 진부한 예술-외설 논쟁으로 이어지는 선정적 이미지를 표지로 거는 때다. 한낱 표지 하나로 잡지의 품질까지 지탄을 뒤집어쓰지만 모든 노이즈 마케팅이 그렇듯, 홍보 효과만큼은 만족할 만하다. 옷을 훌러덩 벗은 젊은 여체가 잊힐 만하면 잡지 커버를 장식하는 이유다. 비록 한뼘 너비에 불과한 재현 공간이지만, 잡지 표지를 캔버스로 활용하는 유명 전업 예술가는 적지 않다. 이들이 잡지 표지에 가세하는 까닭은 캔버스와 갤러리의 역할을 사람 손이 자주 닿는 잡지가 대행하리라는 자각 때문일 것이다. 미디어 시대에 기민한 미학적 대처. 잡지 표지에 작품을 거는 행위는 관객이 작품을 보러 갤러리를 찾던 종래의 성가신 방식으로부터 작품 스스로 관객 눈앞에 몸소 대령하는, 관람 형식의 대전환을 뜻한다. 더욱이 원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작품을 ‘소장’할 수도 있다. 표지의 시각적 호객 효과를 경험으로 신뢰한 잡지 편집자라면 서툰 표지로 허튼 승부를 걸지 않는다. 전업 예술가가 잇따라 잡지 표지를 의뢰받는 사연이다. 예술가의 손을 탄 시의적 명사들은 유쾌한 정치 풍자물의 주인공이 되거나(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부시 정권을 다룬 연속 커버), 팝아트로 상품 가치에 조응하거나(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요청으로 앤디 워홀이 제작한 1984년 마이클 잭슨 커버), 남성적 관음 욕망으로 비난받을 농염한 육체마저 당찬 여성 가치로 변환시키거나(미국 패션 월간지 <W>가 킴 카다시안의 누드를 여성주의 미술가 바버라 크루거의 방식으로 제시한 커버),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의 그림을 패러디한 구도 속에 소비사회의 여성 아이콘을 등장시켜 현대적 여성미의 알레고리를 타진(미국 패션 월간지 <플론트>가 사진가 데이비드 라샤펠에게 의뢰해 비너스로 분한 나오미 캠벨을 찍은 커버)하기에 이르렀다. 잡지 표지도 미술의 한 장르로 당당히 분류해야 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