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인터뷰를 끝내고 지난 10월 중순 체코로 떠났다. ‘봉준호의 신작’이라는 거대한 기대와 맞물려 막연히 ‘2011년 크랭크인 목표’ 정도로만 알려져 있던 <설국열차>가 드디어 본격적인 프로덕션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프랑스 만화 원작의 <설국열차>는 기상이변으로 지구에 혹독한 추위가 찾아와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물과 식량을 갖춘 설국열차에 올라 이동을 시작하는데, 자연스레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고갈되면서 열차는 무법천지로 변해간다. 여기서 기차는 마치 노아의 방주 같은 존재다. 박찬욱 감독이 제작자로도 참여하는 <설국열차>는 예산이 약 400억원 규모로 알려져 있으며 80% 이상 영어권 배우가 출연하여 영어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를 처음 접한 것은 2005년이었다. 한달에 한번씩 만화 쇼핑을 하던 그는 평소처럼 신간들을 살펴봤고 우연히 집어든 <설국열차>의 독특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가만히 선 채로 다 읽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는 데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어권 국가에서 출간된 적도 없어서인지 판권을 사게 된 것도 큰 행운이었다”는 게 그의 얘기다. 이후 ‘지구가 얼어붙고 생존자를 태운 기차가 달린다’는 기본적인 컨셉만 남겨두고 다 바꿨다. 그러면서 그는 원작자의 미망인부터 그림 작가까지 다 만났다. 시나리오도 보여주긴 했지만 그들이 특별히 작품에 관여하지는 않기에 각색이나 미술작업 등은 온전히 현 제작진의 몫으로 남겨졌다.
<설국열차>는 제작사는 한국에 적을 두지만 미국, 일본, 프랑스 등이 참여하는 다국적 영화로,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소스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말 그대로 글로벌 프로젝트로 기획됐다. 현재 모든 촬영 스케줄은 주 단위로 치밀하게 짜여지고 있다. 특히 기차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기차 세트 촬영이 90%가량 되다보니 대형세트가 반드시 필요했다. 게다가 그 대형세트란 게 80∼90m이니 국내 촬영이 불가능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최종적으로 체코와 헝가리를 두고 고민하다가 체코의 경우 영화적 인프라도 좋을뿐더러 영화적 전통이 오래고 숙련된 스탭들이 풍부해 결국 프라하 근교의 바란도프 스튜디오로 결정했다”고 말한다.
이미 한국인 라인 프로듀서가 9월에 체코로 가서 관련된 협의를 진행 중이었고 17일부터 현지에 제작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촬영은 홍경표 촬영감독이 맡는 가운데 컴퓨터그래픽 슈퍼바이저는 미국,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체코 등 자본의 다양함만큼이나 스탭 구성 또한 다국적이다. 영어권 배우의 출연 비중이 높기에 캐스팅 디렉터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꼼꼼하게 배우들을 물색 중이다. 그렇게 다국적 스탭으로 꾸려지다 보니 회의는 늘 화상으로 진행됐다. “한국에 있는 나와 체코에 가 있는 프로듀서, 그리고 LA의 CG 감독과 독일의 특수효과 감독, 그렇게 한국식과 독일식 악센트 등이 마구 뒤섞여 서로 다른 시간대를 넘나들며 화상회의를 하고 나면 기진맥진해졌다”는 게 봉준호 감독의 얘기다.
<설국열차>는 ‘기차’ 그 자체를 치밀하게 담는 액션스릴러영화가 될 것 같다. 에드윈 S. 포터의 <대열차강도>(1903)나 버스터 키튼의 <제너럴>(1926)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폭주기관차>(1985) 등 이른바 ‘기차영화’의 계보는 두텁다. 자신이 좋아하는 기차영화란 ‘남자들의 로망’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렇게 뒤에서 앞으로 길게 이어진 일직선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설국열차>의 핵심이다. 그래서 영화광인 그가 좋아할 만한 로버트 알드리치의 <북극의 제왕>(1973)에 대해 물었다. 무임승차의 달인인 리 마빈과 악명 높은 차장 어네스트 보그나인의 대결을 그린 <북극의 제왕> 역시 대부분 기차에서 펼쳐지는 박진감 만점의 이야기다. 특히 무임 승차자를 기차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차장이 만든 각종 도구들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이에 대해 봉준호 감독은 “물론 대단한 영화다. 기차영화만의 독특한 컨벤션과 순도 높은 마초들의 대결을 보여주는 파워풀한 영화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그렇게 아저씨 두명만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며 웃는다. 더불어 그 못지않은 기차에서의 각종 역동적인 테크닉이 등장할 것이란 자신만만한 암시도 건넸다.
결국 핵심은 기차 그 자체에 있다. “<괴물>을 만들면서 앞으로 다시는 다른 감독들이 한강에서 영화를 못 찍게 해주겠다는 마음이 있었는데(웃음), <설국열차>는 ‘더이상의 기차영화는 없을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 기차를 소재로 영화 찍을 생각 하지 마세요’라는 자신감이랄까. 말하자면 기존의 기차를 무대로 한 영화들은 물론이며 이후의 영화들까지 포함해 이른바 ‘기차 장르’ 영화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마음인 것. 더불어 한국 배우로 출연 예정인 송강호에 대해서는 “<스타워즈>의 ‘한 솔로’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떠올리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설국열차>는 내년 3월경 크랭크인해 2013년 개봉하는 것이 목표다.
체코 바란도프 스튜디오
체코 영화계를 대표하는 바란도프 스튜디오(Barrandov Studio)는 밀로스 포먼의 <아마데우스>(1984)를 촬영한 곳으로 알려지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소방수의 무도회>(1967) 등을 만든 체코 출신 밀로스 포먼이 할리우드로 진출한 이후에도 <아마데우스>를 바란도프에서 만들며 그 붐을 일으켰던 것. 물론 1931년 만들어진 이곳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식 스튜디오에 수중전 촬영도 가능한 대형 수조가 세워지며 전세계 영화 제작사가 즐겨 찾는 스튜디오가 됐다. 이후 민영화가 되고 자유시장 체제 아래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아마데우스> 등 외국영화의 제작이 증가하면서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거대한 세트 규모만큼이나 숙련된 인프라가 탄탄해 할리우드 대작들도 앞다퉈 바란도프를 찾았다. <미션 임파서블>(1996)을 시작으로 <본 아이덴티티>(2002), <블레이드2>(2002), <반 헬싱>(2004), <007 카지노 로얄>(2006),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2009) 등이 바란도프 스튜디오의 힘을 빌린 영화들이다. <설국열차> 역시 80, 90m 이상 긴 길이의 대형 기차 세트가 필요하기에 바란도프 스튜디오에 둥지를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