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는 내가 아는 한, 미국을 배경으로 한 테렌스 맬릭의 세 작품 <황무지>와 <천국의 나날들> <트리 오브 라이프>와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일견 목가적 풍경이지만 크리스티나는 소아마비로 하반신이 마비된 여인으로 집을 향해 고되고 느리게 몸을 나르고 있다. 키 큰 수풀이 그녀를 쓰다듬는다.
* <트리 오브 라이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월16일
유치원에서 말굽자석이라도 삼킨 건지, <엑스맨>에 나오는 매그니토의 피가 흐르는지 내 수중에 들어온 전자기기들은 죄다 골골댄다. 평생 주말의 1/3을 가전제품 수리로 소일하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다. 지난달에는 배전반이 타버렸고, 지난주에는 세탁기 문이 잠겼으며 이번주에는 냉장고가 운명을 달리했다. 일요일 아침 찾아온 A/S 기사님은 땀을 뻘뻘 뺀 다음, 미안스러워하는 나의 치하에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는 일요일에 일하는 게 제일 좋아요. 원하는 만큼만 할 수도 있고.” 어쩐지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무실이 즐비한 시내 한복판 8차선 도로변에 사는 내겐 주말이 가장 일하고 싶어지는 시간이다. 주말의 서울 중심가는 흡사 촬영이 끝난 오픈 세트다. 그 ‘유령도시’ 복판에 혼자 있다고 느낄 때 비로소 컴퓨터 자판 앞에 앉는 일이 평화롭다. 근면한 시민들이 열심히 일하는 시간에는 도저히 경쟁할 자신이 없는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인간의 습성일 것이다. 돌아보면 학창 시절 야간자습은 매번 도망쳤지만 보충수업이 없는 방학의 텅 빈 교실은 거기서 살고 싶으리만큼 좋았다. 고교 시절에는 아버지의 사무실 열쇠를 빼돌려 일요일 한나절을 난방도 되지 않는 오피스에서 보내기도 했다. 훔친 물건에는 산 물건에 비교할 수 없는 오라(aura)가 있듯, 내 멋대로 용도를 변경한 공간과 시간에는 다른 바람이 분다.
10월18일
2010년 봄 칸영화제 출품 소문이 돌던 무렵 테렌스 맬릭 감독의 신작 제목이 <트리 오브 라이프>라는 뉴스를 접하고 진작 각오했다. 생명의 나무라니, ‘호객’의 의지라고는 전혀 없는 제목이다. 말하자면 “나를 나무둥치를 껴안고 다니는 순진한 환경주의자라고 생각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간판이며, 성경이나 코란 같은 경전을 영화의 형태로 써보겠노라는 암묵적 통보다. 주지하다시피 맬릭의 영화는 데뷔작 <황무지>부터 인간이 빚어내는 드라마 안에 무람없이 자연의 이미지를 아울러 왔다. <천국의 나날들>의 메뚜기는 리처드 기어보다 더 정성스러운 클로즈업을 받지 않았던가. 그의 영화가 격언으로 치장된 <내셔널 지오그래픽> 영상과 진배없다는 비난은 <천국의 나날들> 이후 20년 침묵을 깬 <씬 레드 라인>부터 급격히 무성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작 <뉴 월드>(2005)에서도 맬릭은 풀잎의 촉감을 전하는 일을 심리 묘사의 우위에 두었고 인물의 독백을 빌려 신에게 속삭였다. “우리는 당신의 들판에 자란 곡식입니다.” 그리고 지금 도착한 <트리 오브 라이프>는 전향 의지가 없다는 확인이다. 테렌스 맬릭은 아이러니와 유머, 냉소를 포함하지 않은 영화가 멸종하다시피 한 시대에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만든다. 인정하자. 우리는 언젠가부터 뭔가를 비스듬히 바라보거나, 한 발짝 비켜서서 위트를 섞지 않고는 신념을 토로할 수 없게 되었다. 먼저 본 많은 평자들이 ‘예배’에 비유한 <트리 오브 라이프>를 드디어 본 오늘, 나는 이 영화가 잠언이나 묵시록이라기보다 시편임을 확인하고 작게 안도했다.
10월19일
<트리 오브 라이프>에는 어처구니없게 거시적인 시야와 나비 날개처럼 연약한 찰나를 채집하는 극히 미시적인 시선이 태연스레 병존한다. 공존이 아니라 병존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이래 비슷한 예가 없는 지구의 역사를 형상화한 기나긴 컴퓨터그래픽과 1950년대 텍사스의 한 가족사가 별개의 단락으로 이어진다. 즉, 고드프리 레지오의 ‘카시 3부작’을 연상시키는 생명 탄생의 역사- 무려 CG 벨로시랩터를 포함한- 를 담은 필름과 아이젠하워 시대 한 가족의 연대기는 영화 속에서 분리돼 있다. 왜일까? 이제껏 맬릭의 영화에서 자연의 이미지는 정도를 달리할 뿐 내러티브 내부에 배치됐다. 요컨대 맬릭 전작과 <트리 오브 라이프>의 차별성은 직설법이다. 맬릭은 은둔자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지극히 사적인 본인의 가족사와 우주의 섭리에 대한 궁구, 두개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어떤 완곡 화법도 없이 <트리 오브 라이프>에 나란히 넣었다. 둘을 부드럽게 섞는 편집을 몰라서? 그럴 리는 없다. 맬릭의 전작 네편이 물증이다. 나는 차기작 2편의 프로덕션을 전례없이 서둘러 진행 중인 테렌스 맬릭에게 이 시점에서 본인과 본인의 영화를 형성하는 두 원형질을 한번쯤 가장 노골적 형태로 세상에 던져야만 했던 이유가,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반복하는 이치를 우직하게 형상화해야만 했던 절박함이 반드시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감독의 의도를 맹신한다는 전제 아래- 맞다. 나는 맬릭에 관해 공정할 수 없는 팬이고 변명하자면 이건 일기다- <트리 오브 라이프>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싶다. 우선 나 역시 평론가 짐 호버먼과 정한석 기자(<씨네21> 826호)의 비판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자연사와 인간사가 탈구되고, 장면과 장면 사이 장력과 서사와 이미지의 긴장이 무너진 퇴행적 영화다. 아니, 뒷걸음질치다 못해 자궁 속으로 돌아가려는 영화다(이 영화의 가장 현실적인 결점은 50대에 접어든 주인공이 유년 이후로는 어떤 삶도 갖지 못한 허깨비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트리 오브 라이프>를 보는 2시간20분은 관객인 내게도 완벽한 퇴행의 시간이었는데, 그 퇴행의 감각은 테렌스 데이비스의 영화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도입부가 거는 ‘최면’과 유사했다. 깨고 싶지 않았다. 주인공 잭(숀 펜)의 유년기를 그린 <트리 오브 라이프>의 중심 단락은 엄밀히 말해 플래시백이 아니라 50대 남자의 현재에 남아 있는 주관적 기억이다. 그래서 과거는 언제나 여름이며 오후 5시 무렵의 햇살에 영원히 물들어 있다. 그런데 잭의 양지바른 추억 속을 소요하는 동안, 기이하게도 내 안에서 분명 내 것이나 내가 기억하지 못한 기억들이 웅성거리며 되살아났다. 처음 신어본 신발의 촉감, 깨진 무릎에 바른 옥도정기의 따끔함, 끌려가는 죄수를 보았을 때의 충격(“엄마, 우리한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차가운 흙구덩이에 몸을 누이고 나의 죽음 이후를 상상하다 흐르던 눈물, 최초로 뭔가를 상실했음을 깨닫고 동생처럼 어려지기를 바랐던 회한이라는 생경한 감정. 만약 <트리 오브 라이프>의 회상이 빛나는 순수를 향한 노스탤지어로만 채워져 있었다면 그것은 결코 기쁨이나 슬픔으로 규정할 수 없는, 그래서 유실돼버린 나의 원체험을 되돌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 잭은 아버지를 죽여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가 하면 길을 걷다 불현듯 치미는 애틋함에 그를 와락 껴안는다. 순간 아버지 앞에서 처음으로 소리내어 내 의견을 말하던 날 엄습했던 미묘하고 무시무시한 울렁거림이 위장에서 다시 치밀었다. 거꾸로 <트리 오브 라이프>를 권위적 아버지와 자비로운 어머니의 대립 사이에서 분열하는 성장 드라마로 보는 해석 또한 왜곡이다. 잭의 아버지(브래드 피트)는 특별히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남자가 아니라 아비이기에 갖는 부당한 권력과 어리석음을 짊어진, 아버지라는 보편적 종의 대표다. 아들을 손찌검한 남편에게 사랑하는 아내가 반발할 때 그녀를 팔로 가둬버리는 브래드 피트의 절묘한 동작은 포옹인 동시에 제압이다.
나는 그저 <트리 오브 라이프>가 나를 어떻게 도왔는지 주절거렸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경위를 규명하는 건 오늘의 일과가 아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견디기 힘든 일 중 하나는 지금의 나라는 이상한 덩어리를 형성한 결정적 시간과 누군가의 얼굴이 괄호 속에 가두어져 있는 것이다. <트리 오브 라이프>는 그 완강한 괄호를 잠시 풀어준 다음 내게 말했다. 너의 안타까움은 태곳적부터 계속되고 있으며 온 우주에 편재한다고. 그러니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