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엔딩스>의 엘리샤 쿠스버트(왼쪽에서 두 번째).
8년을 연애하고 결혼을 하게 됐다. 청첩장을 받은 친구가 답장하길, “해피 엔딩이라서 다행이다”라고 했다. 청첩장에 돌아온 따뜻한 답장이 반가우면서도, 묘하게 “해피 엔딩”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연애의 해피 엔딩이 결혼이라면 결혼에는 또 다른 엔딩이 있기라도 한 겁니까? 삐딱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근사한 식당에서 긴장한 채로 오물거리는 데이트는 예전에 그만두었고, 편한 옷차림으로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각없이 웃는 것이 전형적인 주말 데이트가 되었는데, 결혼한다고 뭐 달라지겠어? 내 경우는 반쯤은 조소가 섞인 안도이긴 하지만 이 지옥 같은 편안함이 끔찍해 결혼식에서 달아나는 신부도 있다. <ABC>의 시트콤 <해피 엔딩스> 속 알렉스(엘리샤 쿠스버트)가 그 주인공이다.
<해피 엔딩스>의 첫 에피소드는 8년 사귄 커플 알렉스와 데이비드의 결혼식이 파경을 맞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결혼식장을 습격한 청년과 손잡고 달아난 알렉스는, 일주일 뒤 데이비드 앞에 나타나 편해져버린 사이가 굳어질까 두려웠다고 털어놓는다. 생각 같아서는 인연을 끊고 싶은 데이비드지만 아직 감정이 정리가 안됐고, 다른 여자는 아주 오래 만난 적도 없고, 알렉스와 8년이나 사귄 덕분에 주변 친구들을 공유하는 처지라, 쿨하게 친구로 남기로 한다. 이렇게 한차례의 소동 뒤 어색해진 두 사람과 주변 친구들이 펼치는 이야기가 <해피 엔딩스>의 주된 플롯이다. 정해진 줄거리는 없다. 결혼식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시트콤의 중심에 두고, 알렉스와 데이비드, 알렉스의 언니인 제인과 남편 브래드, 데이비드의 대학 친구이자 게이인 맥스, 그리고 맥스의 친구인 페니까지 6명이 모여, 주로 인간관계에 대한 소극을 그려낸다. 알렉스와 데이비드의 8년은 둘의 역사라기보다는 모두의 역사이고, 두 사람 역시 파혼한 약혼자와 친구로 지내는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소중한 친구들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선다.
<해피 엔딩스>는 <NBC>의 효자 시트콤 <프렌즈>와 캐릭터 설정을 공유한다. 최근 <프렌즈>와 유사한 설정과 분위기의 시트콤이 양산되고 있는데, <트래픽 라이트> <프렌즈 위드 베네핏> <매드 러브> 등이 대표적이다. <프렌즈>의 충실한 팬이었다면 <해피 엔딩스>와 <프렌즈>의 캐릭터들 사이를 어렵지 않게 줄긋기가 가능할 것이다. <해피 엔딩스>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은 <24>에서 잭 바우어(키퍼 서덜런드)의 반항심 가득한 딸로 출연해 얼굴을 알린 엘리샤 쿠스버트로, <마이 쎄시걸> <4.4.4.> 등 스크린으로도 관객과 적잖이 만나왔다. 쿠스버트가 연기하는 알렉스는 <프렌즈> 캐릭터 중 제니퍼 애니스톤의 레이첼에 대입이 가능하다. 금발이고 유순하며 예쁘장한 반면에 엉뚱한 면도 있다. 늘 이상한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여자들에게 별 인기가 없는 것도 비슷하다. 물론 알렉스의 전 약혼자인 데이비드는 <프렌즈>의 로스다. 그래서 둘 사이에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친구들의 안줏거리가 되고, 때때로 남은 불씨가 불타오르기도 한다.
<프렌즈>에서도 부러웠던 천진난만한 우정은 <해피 엔딩스>에서 여전하다. 어른이 된 뒤 친구에게, 혹은 연인에게 솔직해진 적이 몇번이나 있었나. 금전적 이익과 손해를 떠나서, 감정적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통에 진실하게 마음을 나눈 기억이 까마득하다. 시시콜콜한 과거사까지 모두 알고, 척하면 척에, 필요할 땐 알아서 말려주는 여섯 친구들을 보고 있으니, 지금은 사는 게 바빠 멀어진 단짝 친구들에게 할 말이 생각났다. 너희들이 그렇게 결혼만 일찍 안 했어도 말이다, 우리 지금도 재미있게 지낼 수 있었었었거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