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빔 벤더스 지음, 이동준 옮김 / 이봄 펴냄
스타 등장 지수 ★★★ 시각 자극 지수 ★★ 다독 요구 지수 ★★★★
빨리 구입하라고 권할 만한 사진집은 아니다. 그의 영화가 그러하듯이, 빔 벤더스의 카메라는 시신경을 자극할 요소들을 찾아내고 추출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시간과 공간과 인물을 ‘극적으로’ 포착하려고 안달하지도 않는다. 더 다가갈 수 있는데도, 더 물러설 수 있는데도, 빔 벤더스의 ‘눈’은 언제나 모호한 위치에서 서성인다.
하지만 이러한 망설임은 대상을 대하는 그의 확고한 태도다. 늙은 텍사스 카우보이(280∼284쪽)를 보라. 빔 벤더스는 카우보이에게 다가가서 그의 육체에 새겨진 굵은 주름을 굳이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나에게 사진은 보는 것보다 듣는 행위에 더 가깝다.” 언젠가 빔 벤더스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는데, <한번은,>에 담긴 수백장의 이미지들 역시 주목보다 경청을 요한다. 구부정한 허리와 느린 걸음걸이의 카우보이를 뒤에서 묵묵히 지켜볼 때, 죽음을 눈앞에 둔 카우보이의 알 수 없는 중얼거림도 들려온다. 호텔, 무덤, 사막, 극장 등 빔 벤더스가 강박적으로 프레임-인하는 사물들과 장소들도 쇠락의 흔적을 보여주기보다 파국의 전조를 들려준다. 눈 대신 귀에 의지할 때, 버려진 자동차 위에 올라탄 검은 개(259쪽)의 울음소리도 전해질 것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의 가장 큰 소망과 나의 모든 열정은 내 자신을 놓아버리는 거다.” 떠도는 유령의 눈으로 황폐한 삶을 투시하며 사물들이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이 독특한 사진집을 제대로 곱씹으려면 <도시의 앨리스> <빗나간 행동> <시간의 흐름 속에서> <파리, 텍사스> 등과 같은 빔 벤더스의 초기작을 곁들이면 된다.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도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이다. 빔 벤더스를 가리켜 ‘길의 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길의 왕이 길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로마에서 말하다: 아들 안토니오 시모네와 나눈 영화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난주 옮김 / 한길사 펴냄
시오노 나나미의 아들 사랑 지수 ★★★★★ 시오노 나나미의 아들이 영화인으로 성공할 것 같은 예감 지수 ★★ 시오노 나나미의 영화 사랑 지수 ★★★★
엄마와 아들이 나누는 영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들어 어디다 쓸까 싶지만 엄마가 시오노 나나미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명한 작가인 동시에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를 쓸 정도의 영화 마니아. 한편, 그녀의 아들 안토니오 시모네는 할리우드에서 <스파이더맨2>의 프로덕션 어시스턴트를 경험한 경력이 있는 영화인이다. 사실 제작부 막내쯤 되는 프로덕션 어시스턴트가 제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그의 말을 구태여 누가 책으로까지 읽고 싶을 것인가. 그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서문 격으로 쓴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는 너무 솔직해서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일축하자면 ‘우리 아들이 똑똑한데 상품 만드는 데는 재주가 없어 이 엄마가 대화 상대자로 나섰습니다’이다. 주로 어머니가 묻고 아들이 답하는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전반적으로는 느슨하면서도 때로는 현명한 직관이 오가는 대화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재미는 어깨에 힘을 빼고 툭툭 던지는 시오노 나나미의 어떤 단상들인데, 이를테면 “엄마는 옛날부터 앨트먼의 작품을 좋아하는 동시에 앨트먼의 얼굴도 좋아했어. 얼굴이라기보다 어떤 생김새라고 하는 편이 좋으려나? 근엄하면서 당당하고, 사람을 제압하는 생김새. 그런 영화를 계속 만들어갈 남자의 얼굴이라고 생각지 않니?”라고 말하거나 “말론 브랜도는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관객을 사로잡았지만 폴 뉴먼은 온화하고 따스한 존재감으로 괜찮으시면 잠시 앉아보시지요, 라는 식으로 관객에게 다가와. 그러니 여자 관객은, 기꺼이, 라고 대답할 수밖에”라고 말할 때 그 평범하지만 힘있는 관찰이 재미있다. 어머니와 아들이 앉아 영화에 대해 이 정도로 넓고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 책은 아마도 드물거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