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는 아름답고 자유롭고 뜨거운 도시다. 적어도 도시를 거쳐갈 뿐인 관광객의 눈에는 그렇다. 하지만 자신에게 적대적인 땅에서 새로운 삶을 일궈야 하는 이주민들의 사정은 다르다. 그들에게 고도제한선보다 훨씬 높이 솟아오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경탄의 대상이 아니라 소외의 지표에 불과하다. 주인공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이 사는 엘 라발 지구도 다양한 국적의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변두리 지역이다. 그곳에서 그는 인력 브로커로 살아간다. 아프리카계 밀입국자들에게 짝퉁가방 파는 일을 알선해주거나 짝퉁가방 공장을 운영하는 중국인 사장의 뇌물 상납을 돕는 일이다. 하지만 경찰이 돈만 챙긴 뒤 대대적인 소탕전을 벌이는 탓에 욱스발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사장에게 중국인 밀입국자들을 한데 묶어 건설현장 노동자로 파는 일까지 제안한다. 그런데 사태는 예상치 않게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죽은 자들의 혼령은 마지막 순간까지 욱스발을 놓아주지 않고, 3세계에서 온 ‘현대판 노예들’을 이용해 하루하루 연명해온 그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세계화의 두 얼굴이 특히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해안으로 떠밀려온 밀입국자들의 시체 더미 위로 지나치게 눈부신 지중해 태양이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대목이다. 이냐리투 감독의 전작 <바벨>과 마찬가지로 <비우티풀>에서도 불행의 근원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전 지구적 네트워크에 있다. 지리적 배경만 3대륙 4개국에서 엘 라발 지구로 옮겨졌을 뿐, 이야기는 여전히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그러니 “한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한 가지 시점에서, 딱 한 도시에서” 찍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은 일부만 맞다. 한편 한 캐릭터에만 집중하는 전략은 의외로 교묘하고 음흉하다. 욱스발은 말기암 환자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이에 그는 치료도 고사하고 아직 어린 두 자녀를 위해 남은 삶을 희생하며 숭고한 아버지상을 실천한다. 그런데 죄지은 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민권과 부권을 둘 다 지닌 욱스발에게만 면죄부가 주어질 때, 영화는 거짓 휴머니즘에 빠진다. 그의 가족이 가부장주의적 환영의 비호를 받는 동안 중국인이나 세네갈인의 고통은 끝끝내 외면당한다.
영화는 비극의 허점을 아름다운 풍경으로 애써 무마한다. 특히 해질 무렵 차갑게 식어가는 창공을 가르는 새들의 날갯짓은 욱스발의 비정함마저 거두어간다. 하지만 그런 장면들은 좋은 풍경사진에 머무를 뿐 구체적 현실에 가닿지 못한다. 이에 대한 감독의 변(辯)이다. “나에게 영화는 항상 매우 희미한, 모호한 어떤 것에서 시작한다. 그건 때론 작은 대화이거나 차창 밖의 풍경을 흘려 보거나 한 줄기의 빛, 어떤 음악 노트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비우티풀>은 영화란 구체를 통과하지 않고는 추상에 다다를 수 없는 예술임을 깨닫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