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악당] 양의 탈을 쓴 폭군
소문난 극우주의자·반유대주의자였던 월트 디즈니
밤비(?)들과 놀고 있는 월트 디즈니. 이것만 보면 사람 참 좋아 보이는데….
디즈니, 라고 할 때 당신은 무엇을 떠올리는지. 예쁘고 착한 백설공주와 그녀를 보필하는 귀여운 일곱 난쟁이들. 깜찍하고 귀여운 저 동물들 그러니까 미키 마우스, 곰돌이 푸, 밤비, 목각 인형 피노키오까지.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 환상적인 불꽃과 함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저 동화 속 궁전 디즈니랜드, 환상이 실현될 것 같은 저곳 혹은 따뜻한 가족애. 자 그런 건 여기까지. 그건 디즈니 영화가 그렇다는 것이고 제작자이자 사업가인 인간 월트 디즈니는 그런 꿈과 희망의 지향과는 별 관계가 없었던 모양이다. 디즈니가 죽기 전 누군가 그에게, 당신이 이룬 가장 큰 성취는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그의 믿거나 말거나 한 대답은 이러했다고 한다. “하나의 조직을 세우고 그것을 장악했던 것.” 이런 말은 히틀러나 무솔리니나 스탈린에게 어울릴 법한 말인데 하여간에 ‘미국의 친절한 월트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폭군과 독재자의 전형이었던 것 같다. 일단 그는 자유주의자들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극우적 성향이 없는 건 다 싫어했던 것 같다. 그는 회사의 노조원들도 끔찍하게 싫어했다. 1941년에 디즈니 직원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파업을 일으켰을 때 디즈니는 이건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고 확신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유대인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리고 디즈니는 나치를 끔찍하게 좋아했던 것 같다. 미국 내 친나치동맹회의에 참석하는 걸 보았다는 증인이 있으며 레니 리펜슈탈(히틀러의 선전영화 감독)을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던 때에 그녀의 영화 시사회를 열어준 유일한 할리우드 스튜디오 간부로도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한 가지 더, 미국의 진보적인 실험영화감독 스탠 브래키지가 어디서 들었는지 디즈니의 집에는 수많은 중세의 고문 기구들, 특히 아이들을 고문하는 데 쓰이는 고문기구도 수집되어 있다고 강연회 때마다 떠들고 다녔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디즈니 아저씨의 환한 웃음이 새삼 좀 무섭다.
[희대의 유작] 슬픈 퇴장
마릴린 먼로와 클라크 게이블의 생전 마지막 작품 <야생마>
<야생마> 현장에서 클라크 게이블(위)과 마릴린 먼로(아래)가 취재진의 요구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클라크 게이블의 속마음은….
마릴린 먼로는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유혹적인 섹스 심벌로 기억 되지만 그녀와 함께 일한 남자배우들은 종종 그녀를 미치도록 증오하거나 꺼렸던 모양이다. 먼로에 관한 가장 악명 높은 인터뷰는 <뜨거운 것이 좋아>에서 함께 출연한 토니 커티스가 했다. 그는 먼로와의 키스신을 거론하며 “히틀러와 키스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상황은 다르지만 <야생마>를 함께 촬영한 클라크 게이블의 심정도 어쩌면 유사했을지 모를 일이다. <야생마>를 촬영할 즈음 먼로의 정신상태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아서 밀러와의 결혼생활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는 날이 많아졌고 아이는 유산했다. 평생 먼로를 괴롭힌 그 유명한 여러 사람의 목소리들(환청)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야생마>의 촬영장에서 먼로는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항상 늦었고 늘 까탈스러웠다. 서로가 악몽 같은 촬영을 마치자 동료 배우였던 클라크 게이블이 돌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57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지인들에게 <야생마>가 자신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말했는데 그와 동시에 유작이 됐다. 게이블이 사망하자 그의 죽음이 먼로 때문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녀가 촬영장에서 보인 행동들 때문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게이블이 그 스트레스를 다 어쩌지 못하고 쌓아두었던 것인데, 결국 그게 원인이 되어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먼로에게 “살인자가 되는 기분이 어때?”라고 잔인하게 소리쳤고, 그녀도 “그가 죽은 게 나 때문이란 걸 나도 알아”라고 자책했다. 먼로는 피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게이블이 “내 아버지를 닮았다”고 말하던 그녀였다. 그리고 얼마 뒤 그녀는 정신병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얼마뒤… 그 유명한 죽음을 맞는다. 그렇게 <야생마>는 클라크 게이블과 마릴린 먼로, 둘 다의 유작이 됐다. 누가 누구를 죽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희대의 연애] 터부의 위반은 예술가의 특권
우디 앨런과 순이, 우리의 사랑은 범죄가 아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우리 앨런(왼쪽)과 그의 반려자 순이(오른쪽)의 최근 모습. 순이도 많이 늙었네….
우디 앨런(1935~)은 딸 같은 아내와 사는 남자다. 할리우드에 이혼을 밥 먹듯 하는 스타들은 넘친다. 프랭크 시내트라,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리고 감독 하워드 혹스 등은 이런 스캔들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들이다. 마치 훈장을 달듯 이혼을 하고 또 결혼을 한다. 그렇지만 그들의 행위에서 범죄의 불쾌감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할리우드라는 곳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그런데 우디 앨런의 경우는 좀 다르다. 현재의 아내 순이(1970~)와의 연애와 결혼에서 페도필리아(아동성애증), 혹은 근친상간 같은 범죄의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물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페도필리아 환자이며, 근친상간의 위반자라고 의심하는 쪽이다. 백인사회에서 약간 살아본 경험에서 말하자면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극동인과 사는 백인들은 대개 페도필리아 환자라고 의심된다. 그들에게 극동인은 대개 10년 이상 어려 보이고, 게다가 나이 차이가 좀 난다면 거의 세대차가 나는 부모 자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디 앨런과 순이의 관계에서 문명의 터부를 위반한, 윤리적 범죄자의 느낌을 갖는다. 그런데 그게 바로 우디 앨런의 남다른 점이고,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그 위반이 지금 다시 부활하고 있는 우디 앨런에게 힘이 됐다고 보는 것이다. 옛 이야기부터 좀 해보자.
1990년대 초반 우디 앨런과 순이와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세상의 반응은 대개 부정적이었다. 당시 우디 앨런은 미아 패로와 사실상 부부나 다름없었고, 순이는 미아 패로 집의 입양아였다. 그녀는 미아 패로가 음악가 앙드레 프레빈과 살 때 입양한 딸이다. 그래서 이름이 순이 프레빈이다. 법적으로 보자면 순이는 우디 앨런과 아무 관련이 없다. 우디 앨런과 미아 패로는 결혼을 한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20살이 넘은 여대생과 연애하는 게 법적으로는 문제될 게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대개가 우디 앨런을 ‘나쁜 남자’라고 생각했다. 머리는 똑똑해 변명도 참 잘하지만, 아내나 다름없는 여성의 입양아와 사랑을 했으니, 민망스런 행동을 한 남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민망스런 일이 온 천하에 알려졌다. 다시 말해 우디 앨런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추행범을 보는 듯한 경멸의 시선을 받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부활하기 힘든 끝장으로 내몰린 셈이다. 재밌는 점은 그 스캔들 이후에 우디 앨런은 대단히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2000년대 들어 믿어지지 않는 재기에 성공했다. 도대체 예술가라는 사람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스캔들이 났을 때 우디 앨런은 사실 감독으로서 위기에 있었다. 미아 패로와 보냈던 80년대의 전성기는 기억에서 가물가물하고, 인기의 절정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그만큼 흥행, 비평 양쪽에서 성적이 안좋았다. 나는 그가 <해리 파괴하기>(1997)를 만들 때 너무 힘들어서 은퇴를 결심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끝에 그가 창조한 모든 캐릭터들이 나와서, 작가 우디 앨런에게 박수를 치며 경의를 표하는 장면은 스스로 마련한 은퇴식으로 봤다. 이렇게 많은 주인공들을 만들었지만 이제 물러난다는 이별의 장면으로 봤고, 그래서 코끝이 시큰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도 스캔들에 따른 오명 때문에 스스로 추락하는 것으로 봤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랫도리만 쳐다보고 있다는 염려에 빠져 있는 남자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디 앨런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매치 포인트>(2005)가 계기였고, 그 이후는 잘 알려진 대로 탄탄대로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낯뜨거운 시절에 우디 앨런은 또 다른 도약을 마련했다. 이쯤 되면 예술가는 제도의 경계에서 밀려나야, 혹은 경계를 위반해야, 제 실력을 발휘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게 바로 예술가의 특권이자 운명이라고 여겨진다.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그것에 맞서 자기의 내부를 바라보며 버틴 상태, 그런 불경과 용기의 터전에서 예술은 싹트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예술과 제도는 겉돌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 같고, 그 와중에 우디 앨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