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없이도 명함 없이도 사무실 없이도 잡지를 낼 수 있다. 최근 들어 개인 혹은 공동체가 직접 글 쓰고 편집하고 디자인하고 책으로 인쇄해 유통하는 모든 과정을 아우르는 잡지가 붐을 이루고 있다. 종류만 해도 어림잡아 200여종에 달한다. 부정기적이지만 이 방식으로 제작된 신규 잡지들이 매달 발행되고 있다. 이른바 ‘독립잡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신개념 잡지들이다. 독립잡지 <싱클레어>가 발행된 2000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된 움직임이 형성되었으며, 최근 3년간 수요와 공급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들이 잡지시장의 한획을 그었냐고? 그럴 리가. 지극히 개인적인 주제, 마이너한 분야에 대한 관심이 주를 이루고 있으니, 어림없는 소리다. 그럼 이들 잡지가 기존 잡지시장을 위협하고 있냐고? 기존 잡지가 몇 만부 단위로 팔려나간다고 볼 때, 많게는 몇 백권에서부터 30~40권이 대부분인 발행부수의 독립잡지가 그 정도 영향력을 가질 리 없다. 그렇다고 우려의 시선을 보낼 필요는 없어 보인다. 독립잡지를 만드는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기존 잡지시장 진입에 별 뜻이 없다고 말한다. 단적으로 90년대 후반 창간해 화제를 모았던 대안적 잡지 <페이퍼>(PAPER)와 비교해보면 이해가 쉽다. <페이퍼>는 기존 매체가 다루지 않았던 취향과 소소한 일상을 다룬 에세이 스타일의 잡지란 점에서 화제를 모았지만 지향점은 어디까지나 메이저 잡지 시장이었다. 지금의 독립잡지를 만드는 이들에게 이런 개념을 적용하는 건 다소 무리다. ‘유통’을 포기하는 건 아니지만 이들에게 우선시되는 건 어디까지나 만드는 행위 그 자체다. ‘태초에 잡지가 거기 있었나노니… 나도 한번 만들어본다’는 태도가 어쩌면 독립잡지를 만드는 이들에 대한 가장 적합한 설명일지 모른다.
대규모 자본보다 각자의 가치를 중시한다
‘독립잡지’의 의미에 대한 규정을 살펴보면 이 태도가 보다 확실해진다. 독립잡지를 발간하고 유통하는 서점 ‘유어 마인드’의 대표 이로씨에게 물었다. “독립잡지는 무엇인가?” 그는 대답에 앞서 독립잡지라는 용어를 짚고 넘어갔다. “난 독립이란 말 대신 ‘소규모’라는 말을 선호한다. 독립이라고 명명하면 대개들 우리를 마치 메이저는 혐오하고 가치를 전복하는 문화반란자쯤으로 오해하더라.” 이로씨의 관점으로 본 독립잡지는 ‘적은 인원이 적은 양의 잡지를 적은 유통망’으로 만드는 걸 뜻한다. 40~50명이 만드는 메이저 잡지들은 전문화되어 있지만 전적으로 내 의사만 반영된 결과물은 아니다. 각자의 이상향이 나올 수 없을 바엔 차라리 혼자 원하는 대로 글 쓰고 디자인하고 편집하고 유통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속편하다.” <싱클레어>의 강지웅 수석에디터가 말하는 독립잡지는 이렇다. “독립잡지라고 말할 때 단순히 기존의 상업 잡지에 대한 속성으로부터 독립한다는 의미만으로 용어를 제한해선 안된다. 과거 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이 ‘매체’에 대한 고민을 지속시켰다면 독립잡지를 만드는 이들에겐 과연 얼만큼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가 더 중요한 관점이 된다.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자는 거다.” 그렇다면 ISBN 코드(국제표준도서번호)를 가진데다 대형서점에 유통되고 기업체 스폰과 광고가 있는 월간지 <F.OUND>는 독립잡지로 규정할 수 있을까? <F.OUND>의 조현준 대표는 “규정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필요할까? 우린 그냥 메이저시장에서라면 다루지 않을 인디문화들을 다룰 뿐이다”라고 말한다. 독립출판사 미디어버스의 큐레이터인 구정연 대표는 “독립잡지에 대한 각자의 해석이 다른 건 당연한 결과다. 일반 상업출판물을 만드는 이들과 달리 이들 모두 자기 활동을 자신의 방식대로 하고 있다. 독립이니 소규모 출판이니 하는 말들은 이들을 명명할 이름이 필요해서였을 뿐이다”라며 독립잡지를 포함한 독립출판의 의미를 설명한다.
최근 발간된 독립잡지를 분석해본다면 독립잡지에 대한 개념에 보다 확실하게 접근할 수 있다. 20대 작가가 자신의 고민을 테마로 한다든지 여행지역에 대한 사진과 에세이를 찍고 그리는 것 모두가 독립잡지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파고드는가 하면 SF에 관한 이미지만 모아서 잡지로 구성하기도 한다. 콩트, 에세이, 짧은 단편 혹은 인터뷰를 모은다거나, 전문적인 스트리트 패션을 다루기도 한다. 또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그걸 다시 책으로 엮어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진’(Zine)의 형태로도 발행된다. 디자이너나 사진작가들의 경우, 포트폴리오로 활용할 용도로 독립잡지를 만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만드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독립잡지의 소재와 테마, 형식 모두가 얼마든지 무궁무진해질 수 있는 것이다. 얼핏 단행본인지 잡지인지 구분이 어려운 것도 기존 잡지의 틀에 괘념치 않고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적게는 1장의 포스터 형태로 만들어진 잡지부터 8~16페이지 같은 적은 볼륨으로 제작되기도 하며, 매호 잡지의 판형과 디자인이 달라지기도 한다. 격주나 월간, 계간 등을 계획하지만 발행일 역시 정확히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이들 모두 얼마든지 하나의 완성된 잡지로 기능한다.
5권 인쇄도 가능해진 제작 환경의 변화
독립잡지의 공급을 가속화한 장본인은 역시 잡지를 만드는 환경이 손쉬워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기술의 보편화로 책을 만드는 일 자체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기때문이다. 잡지편집을 하는 데 ‘쿼크’ 같은 전문가용 고가의 프로그램이 필요했던 예전과 달리 최근에는 학교 정규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인디자인’ 프로그램이 활성화됐다.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겼던 매킨토시의 보편화와 함께 굳이 매킨토시가 아닌 PC를 통해 직관적으로 잡지를 만드는 이들도 늘어났다. 인쇄의 변화가 가져온 변화도 크다. 디지털 출판이 보편화하면서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소량의 인쇄(예를 들면 5권도 인쇄할 수 있다!)가 가능해졌다는 건 그만큼 출판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아졌단 의미다. 대개 제작비가 넉넉지 않고, 기존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받아들이는 독자들도 독립잡지에 대해 까다로운 잣대를 요구하진 않는다. 물론 전문성이 없다는 이유로 독립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을 흔히 ‘검증되지 않은 저자’ 혹은 ‘준비성 없는 저자’로 비난하기도 한다. 잡지를 만드는 공정만 따진다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이 다루고 있는 각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라는 측면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독립잡지를 전문으로 유통하는 서점들이 늘어나면서 독립잡지는 무가지여야 한다는 기존 개념도 서서히 깨지고 있다. 유어 마인드 이로씨의 말은 이를 대변한다. “독립잡지와 기존 잡지를 나누는 건 오히려 비평가들이나 기존 매체의 선입견이다. 독자들은 독립잡지냐 아니냐가 아니라 내가 보려는 콘텐츠인가 아니냐라는 순수한 잣대에 의해 3천원 혹은 7천원의 돈을 내고 잡지를 구매한다.” <F.OUND>의 조현준 대표 역시 비슷한 대답을 내놓는다. “시장은 다양하다. 새로운 것, 재밌는 걸 찾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독립잡지가 기존 잡지와 똑같이 어필할 수 있는 이유다.”
독립잡지가 활성화되면서 최근 들어 퀄리티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잡지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책이라는 완성물로 봤을 때 기존 잡지의 형태에 가깝게 제작된 결과물들이 고무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독립잡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것이 오히려 모순이라고 입 모아 말한다. 유연한 생각과 아이디어, 시장 법칙에서 벗어난 잡지를 만든다고 할 때 완성도에 대한 강박이 오히려 독립잡지의 창의성을 막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잡지라는 형식에 얽매여 지속적인 출간이 아니라면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도 어쩌면 틀에 박힌 선입견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단 한번이라도 시도를 하고 만들어냈다는 것이, 이것이 비록 하나의 트렌디한 흐름에 그쳤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구정연 큐레이터는 “시대를 반영하는 잡지를 냈다고 치자. 그런데 현실적으로 더이상은 못 낸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여전히 책을 내고 유통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런 거대한 구조까지 생각할 수는 없는 거다.” 더 북 소사이어티의 임경용 대표 역시 “지금의 관심이 사그라진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 이 트렌드가 지났을 때도 과연 독립잡지를 계속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인식으로 가지는 것이 이 경우엔 오히려 미덕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독립잡지의 경우, 잘 팔리는 경우를 따져도 100권이 채 안된다. 당연히 그 수익으로 다음 호를 제작할 비용이 충당되지 않는 구조다. 제작자, 유통자, 구매자 모두 가난하다는 것이 바로 독립잡지가 가진 해결할 수 없는 악순환이다. 이윤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도 없다. <싱클레어>의 강지웅 수석에디터는 “만드는 이들은 한번의 시도도 의미있지만 이것 자체가 하나의 유행이 되는 건 경계해야 한다. 전략적으로 이 문화를 지속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있어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최근 ‘텀블벅’이라는 예술지원펀딩사업은 그런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예술가와 창작자를 잇는 이 사업은 지자체나 단체의 성격과 상관없이 창작자의 의도를 100% 반영한 맞춤형 후원을 주선하니 충분히 활용해볼 만한 제도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사라지다
독립잡지는 결국 만드는 쪽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방의 문화가 아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무너지는 새로운 지점. 만드는 사람이 곧 소비자가 될 수 있고, 소비자가 곧 만드는 사람의 문화에 함께 동참할 수 있는 쌍방향의 흐름이다. 지난 8월8일 신사동 가로수길의 한 카페에선 일주일간 <F.OUND> 1주년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F.OUND WEEK’라는 이름의 이 행사는 1년 동안 잡지를 만들며 함께한 이들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획된 자축파티다. 그간 잡지에 소개된 인터뷰이들의 사진을 모은 전시관, 인터뷰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 전시, 또 그들과 함께 나누는 토크 시간, DJ잉 쇼 등 다양한 볼거리들이 마련됐다. 웃고 즐기는 파티의 한가운데 <F.OUND>는 그들이 그간 무엇을 만들어왔고 지향하고 있는지를 몸소 잡지 밖으로 나와 표현하고 있었다. 잡지가 단순히 지면에 머무르지 않고 그 잡지를 향유하는 사람과 함께 하나의 문화적 활동으로 이어져나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즐겨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독립잡지는 그 새로운 방식을 개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