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생 실종사건, 사건의 목격자는 시각장애인 여성이다. ‘보이지 않는’ 눈은 <블라인드>의 사건을 해결하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다. 장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 스릴러적인 장르의 쾌감을 전달할 도구로 재치있게 사용된다. 그러나 안상훈 감독은 이 장르적 재미 안에서 편견에 치우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직시할 것을 권유한다. <블라인드>가 스릴러보다는 한편의 따뜻한 휴먼드라마에 가까운 울림을 주는 것도 이 주제의식 때문이다. 공포영화 <아랑>(2006) 이후 오랜만에 두 번째 작품을 연출한 안상훈 감독을 만났다.
-데뷔작 <아랑> 이후 휴지기가 길었다. 첫 영화의 부진이 가져온 결과가 아닐까 지레짐작을 하게 된다. =영화 끝나고 다시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 대학원 과정)에 갔다. 학교 다니다가 운 좋게 연출 데뷔하고 나니 주변에서 뭐하러 학교를 다시 가냐, 빨리 다음 작품 들어가는 게 좋다, 하더라. 내 생각엔 아무래도 학교는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장편영화 한편 하는 게 만만치 않은 작업인데 내 고민이 좀 부족했다 싶었다. 스스로를 다잡는 시간이 필요했고, 더더욱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졸업 즈음 지금의 윤창업 프로듀서를 만났고 2008년부터 <블라인드>를 준비했다. 조금 늦어졌지만 내 페이스대로라면 쉰 적이 없었던 거다.
-설화를 기반으로 한 한국적인 공포를 시도했던 <아랑>에 이어 이번엔 시각장애인이 사건의 목격자가 된 스릴러다. 독특한 소재를 장르와 결합하고 있다. =장르를 추종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니 <블라인드>를 보면 장르 마니아인 관객은 이질감을 느낄 것 같다. 처음엔 시각장애인 소녀가 나오는 공포물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소재만 듣고, 시각장애인이 어두운 공간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비주얼을 표현하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6개월간 그 시나리오를 2고 정도 썼는데, 돌아보니 내가 장애를 소재로만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 그러다가 2007년 말에 <어둠 속의 대화>라는 전시를 접하게 됐다. 관람객들이 암흑 속에서 시각장애인 체험을 하는 전시인데, 평소 감각의 80%를 지배하는 눈 대신 몸의 다른 감각을 깨우자는 취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 전시로 기존의 내 생각이 완전히 깨졌다. 그때부터 윤창업 프로듀서와 최민석 작가 셋이 뭉쳐서 머리 터지게 새로 시놉시스 쓰고 아이디어 내고 새로 시나리오를 썼다.
-전시가 준 깨우침이 도대체 어떤 것이었기에 작품의 전체 방향을 수정한 건가. =암흑 속의 전시장에 들어가 시각장애인과 똑같이 여러 가지 경험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충격을 받았던 건 그중 바에서 바텐더를 하는 여자분들 목소리가 너무 밝고 건강하고 유쾌해서였다. 그분들이 시각장애인인 줄 몰랐는데, 알고 나서 그들에 대한 내 편견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보통 장애인 하면 어두운 면, 연민을 자아내는 모습만 보이는데 실제의 그분들은 완전히 다르더라.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을 만나러 다녔다. 이분들이 삶을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방식이 매우 건강하더라. 기존 매체에서 이들을 다루는 방식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런 편견과 선입견을 깰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사건의 목격자인 시각장애인 수아(김하늘)의 캐릭터 형성에 이런 사고가 크게 반영됐다. 수아는 단순히 목격자나 피해자가 아니라, 개인적인 아픔을 겪고도 꿋꿋하게 생활하며 사건을 해결하는 주체적인 캐릭터다. =김하늘씨에게 수아를 설명하면서 영화의 끝에 가면 완성된 매력적인 인간이 되는 그런 캐릭터를 보여주자고 했다. 수아라는 이름은 최 작가님이 쓴 거지만 내가 지킬 수(守), 나 아(我)자로 주석을 붙였다. 신체의 핸디캡이 있음에도, 스스로를 지키는 한 여성, 그래서 그 핸디캡으로 인해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여성을 만들고 싶었다. 보통 할리우드영화에서처럼 장애를 가진 인간이 초인적인 능력을 갖는다는 설정은 배제하고 갔다. 수아가 사고 이전에 경찰대생이라는 설정을 해서, 위기의 순간에 사건을 해결하는 데 대한 뒷받침을 한 것도 그런 초인적인 능력과는 동떨어진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실제 시각장애인에 대한 연구나 참고자료도 많았을 것 같다. =시각장애인복지관을 무작정 찾아가서 영화 연출한다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분들 교육프로그램에도 한동안 참여했는데 꽃꽂이, 영화관람 등을 할 때 도우미도 하고 외출시에 도우미 역할도 했다. 김하늘씨도 중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재활, 직업교육을 하는 학교에 가서 생활하고 인터뷰도 하고, 멘토를 만나서 대화도 나누면서 수아 캐릭터를 준비했다. 기존의 시각장애인이 나오는 작품은 거의 다 찾아봤다. 특히 도움을 받은 건 배우들 연기였다. 미드 <블라인드 저스티스>는 시각장애인 경찰 이야기였는데 시각장애인 연기로 볼 때는 가장 사실감있는 최고의 연기였다. <브링크>에서 여주인공이 안구이식수술을 받기 전의 연기나 <어두워질 때까지>에서 범죄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시각장애인인 오드리 헵번의 연기도 훌륭했고 도움이 많이 됐다.
-시각장애인 수아가 인지하는 세상을 비주얼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객이 수아의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구상은 어떻게 한 건가. =상상을 하는 거다. 사물을 떠올리는데 보이는 것처럼 명쾌하지 않고 가물가물한 상태를 표현하려 했다. 이게 <데어데블>처럼 화려한 기술을 활용해 만화처럼 보이면 안되겠다 싶었다. 기본 원칙은 아날로그적인 소스들로 작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료수집을 굉장히 많이 했다. 애니메이션에서부터 사진, 동영상 등 볼 수 있는 자료들을 다 수집했고, 시각장애인분들과도 대화를 많이 했다. 그러다보니 주관적인 시점이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그려지더라. 비주얼적인 컨셉은 물웅덩이에 반사된 이미지를 포착한 사진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 CG의 도움을 빌려 여러 이미지를 합성하면서 지금의 결과물이 나왔다.
-수아가 가진 시각적인 제약은 장르적 스릴과 긴장을 유발하는 데에도 다분히 일조한다. 범인을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공포감이나 특히 지하철역에서 따라오는 범인을 화상통화의 도움을 받아 물리치는 추격 시퀀스는 긴박감과 스릴을 충분히 살려주는 장면이었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이 장면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 그때만 해도 스마트폰이 출시되기 전이었다. 처음엔 휴대폰에 영상통화 기능이 있다는 설정만 가지고 시작했다. 근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미국에서 시각장애인분들에게 무상으로 스마트폰 기기를 제공해주기도 하고 실제로 많이 쓰고 있더라. 처음엔 지하철에서 수아가 범인 명진(양영조)과 만나고 그때 조 형사(조희봉)가 등장한다는 설정, 또 후반에 수아가 기섭(유승호)이 위기에 빠진 곳으로 갈 때 복잡한 동네를 친구의 도움으로 영상폰을 이용해 찾아간다는 설정 두 가지였다. 그런데 윤창업 프로듀서가 이렇게밖에 못 쓰냐고 핀잔을 주더라. (웃음) 둘을 붙이자는 제안을 받았고 지금의 장면이 나오게 됐다.
-마지막에 범인과의 대치 상황에서 암전을 활용한 것 역시 비슷한 의도에서 디자인된 액션 시퀀스였나. =수아와 범인의 대결 컨셉을 광원의 차단과 광원의 획득으로 봤다. 범인은 자신의 움직이는 소리를 죽이기 위해 오디오, 온풍기 같은 가전제품을 다 틀어 소음을 내고, 수아는 범인의 소리를 듣기 위해 전기를 차단해 주변을 정적으로 만드는 거다. 동시에 주변은 암흑이 되고. 범인은 광원을 획득하기 위해 커튼을 다 뜯고, 수아는 도망가고…. 서로 각자의 유리한 상황을 찾기 위해 싸우는 거다. 이런 모양새지만 자칫 너무 설명조가 되거나 식상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싸움을 최대한 간략하게, 미니멀하게 만들었다.
-후반부 수아와 기섭 사이의 인간적인 교류, 소통을 앞세운 결과, 막상 스릴러 장르의 또 하나의 주인공인 범인의 역할은 불분명해졌다. 사이코패스 범인의 캐릭터 설명이 지극히 배제된 게 아닌가 싶다.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이 많았다. 후반부에 수아가 가지는 정서를 덜어내고, 범인의 범행동기를 더 파고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악인에 대한 어떤 이해의 지점을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싶더라. <슈퍼 태권브이>의 악당만 봐도 그가 왕따를 당해서 악인이 됐다는 식의 설정이다. 절대악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식으로 합리화되면서 악인에 대한 동정심이 유발되는 거다. 난 악인은 철저하게 악으로 버려두고 싶었다. 악인에 대한 설정도 그런 기반에서 만들어졌다. 사이코패스의 여성혐오나 이런 것들의 원인을 파고들다보면 아예 작품 방향이 그쪽으로 가게 될수밖에 없다(스포일러라 범인의 직업이나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은 임의로 뺍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시각장애인, 여성, 사회적인 약자이고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쳐 상황을 극복하는 그런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 선과 악이 충돌하고 대결하는 것이 주가 되는 건 아니었다.
-여성납치, 감금이 사건임에도 정작 시각적 표현은 둘러서 한다. 청소년 관람불가인데도 최근 스릴러 장르영화들에서 보았던 충격적 영상과는 부러 거리를 둔 것같다. =차별화하고 싶었다. 그런 장면을 안 보여줌으로써 상상을 극대화해서 정서적으로는 더 충격을 줄 수 있다고 봤다. 게다가 <블라인드>를 애초에 ‘오감추적스릴러’라고 했으므로 비주얼보다는 사운드의 효과를 살려주고 싶었다. 돌비시스템을 활용해서 시각 외에도 공포나 스릴을 유발하는 장면들을 연출했다. 편집실에서 좀 많이 들어내서 아쉽긴 하지만 사운드 디자인과 믹싱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수아와 기섭, 결국 누나와 동생의 인연, 대안가족으로서의 해결점을 찾고 있다. 보통이라면 멜로구도로 나아갈 뻔도 했을 텐데. (웃음) =처음 이 영화를 구상할 때 조 형사가 지금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형사였다. 수아는 보육원 출신이고, 나이 든 형사는 아빠의 느낌, 그리고 여기 기섭이라는 문제아 소년이 들어오면서 정말 동생 같은 대안가족을 만드는 구도를 생각했었다. 한번도 멜로를 연출할 생각은 안 해봤다. 난 멜로 빼고 다 자신 있다. 멜로는 정말 자신없다. 보통 같으면 조 형사와 수아가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도움을 받고 서로의 이성애를 확인했을 텐데 말이다. (웃음)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이 서로 휴머니즘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유대를 만들어가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올해 부천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미리 관객에게 공개됐다. 전작의 부진을 딛고 호평이 자자하다. =난 영화를 만드는 재미가 너무 좋아 영화를 하는 타입이다. 항상 뭔가 주제넘는 숙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편이다. 그런 경험들이 감독으로서 꾸준히 공부하고 내공을 쌓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십대가 되면 지금보다 뭔가 더 잘할 수 있는 감독이 되지 않을까. <아랑> 때도 그렇고 지금도 항상 무언가 벽에 부딪히게 되고, 이 작품을 연출할 그릇일까에 대한 고민을 한다. 그 과정들이 좋다.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서 60대에도 여전히 활동하는 감독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