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프로듀서를 꿈꾸다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몇 차례 했지만 왜 포기했는지 자세히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이 기회에 잠깐 얘기하자면 모든 건 주차에서 비롯됐다. 원주에서 촬영을 하던 어느 날 우리 제작팀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다. 촬영장소 인근에 주차된 차량을 ‘뽑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촬영 도중 차량이 들락날락하면 진행에도 걸림돌이 될 뿐 아니라 컷과 컷 사이의 연결도 맞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일을 왜 당일 새벽에 부랴부랴 하느냐는 질문에 나이는 어려도 관록은 든든했던 제작부장은 “어차피 전날 다 뽑아놓아도 밤새 다른 차가 주차하니까 소용없어요. 그냥 당일 새벽에 하는 게 나아요”라고 설명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 새벽 6시에 걸려온 전화에서 “영화 촬영 때문에 차 좀…” 따위의 말이 흘러나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버럭 호통을 치거나 욕설을 퍼붓지 않을까. 이미 서울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기도 했다. 하나 어쩌랴. 어쨌거나 영화는 찍어야 하니. 말이 안되는 걸 알면서도 앞유리에 붙은 전화번호로 통화를 시도해야 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었다. “아 네, 빼드려야죠”라고 하질 않나, 심지어 “아이고 죄송합니다”라고 한 뒤 1분도 되지 않아 차량을 옮겨준 주민도 있었다. 원주 시민들에게 박수라도 쳐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촬영을 마친 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일을 주먹구구로 벼락치기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갑했다. 무턱대고 길을 막고 운전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대여한 장소를 약속시간보다 훨씬 늦게 돌려주는 일 등 이 스트레스로 가득한 일을 하기에 나는 너무 소심하고 근심이 많았다.
이번주 특집기사에 등장하는 <퀵> 제작팀의 무용담을 보자니 7년 전의 선택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 양반들은 주차된 차량 몇대를 뽑아내는 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명동을 통째로 막았고 강남역 앞길을 온전히 전세내지 않았던가. 만약 이들이 이 ‘위업’을 달성하지 못했다면 <퀵>은 지금보다 훨씬 시시해 보였을지 모른다. 뻔한 말이긴 하지만 아무리 CG와 특수효과가 많이 들어가고 최첨단 기술이 자주 사용된다 해도 결국 영화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특히 블록버스터영화일수록 사람들의 단순하지만 우직한 공이 더욱 많이 필요하다. <고지전>의 아찔한 영상이나 <7광구>의 놀라운 화면, <최종병기 활>의 규모있는 액션신도 일단 스탭들의 몸뚱이를 던지는 노력이 없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퀵>이 끝난 뒤 크레딧과 함께 보이는 스턴트맨들의 활약상을 보면서 가슴 한켠에서 욱하는 감정이 솟아났다. 영화를 향한 단순하지만 명쾌한 열정, 그것이야말로 여전히 한국영화를 활기있게 만드는 핵심 요소일 것이다. 그런 열정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는 건 한국영화계 전체의 몫일 테고. (아, 그렇다고 현장에 복귀하고 싶다는 말은 아닙니다. 전 여전히 소심하고 근심이 많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