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 이해하기 힘든 일이 있다. 당시에는 모든 게 너무나 당연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있다. “글쎄, 옛날 옛적에는 모든 글을 원고지나 종이에다 썼다지 뭐야”라고 할 때가 언젠가는 올 테고, “예전에는 휴대전화기에다 손가락으로 문자를 찍어야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대. 믿거나 말거나지만 말야”라며 시큰둥하게 말하고는 ‘휘리릭’ 음성인식문자를 발송하는 때가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나는 도무지 미래를 상상하기 힘들다.
‘모뎀’이라는 걸 사용하여 ‘PC통신’이라는 걸 했던 때가 수백년 지난 것 같고(그럼 지금 내 나이는 몇살?), 가끔은 전생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제 겨우 20년쯤- 20년이면 많은 세월이 흐른 건가?- 지났을 뿐이다. 무슨 레지스탕스라도 된 것처럼 부모님이 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야간 시간을 이용해 컴퓨터에 접속한 다음 (한밤중에 통화하려고 전화기를 들었던 부모님은 뚜 뚜우 하는 신호를 들으면서 정말 아들이 스파이가 아닌가 의심했을지도 모르지) 국가의 존폐가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라도 한 것처럼 심각한 얼굴로 ‘음퀴방’으로 달려가 음악퀴즈를 풀었다. 소닉 유스의 세 번째 앨범이 ≪Evol≫이면 어떻고 ≪Made In USA≫면 어떻다고- 이러면서 또 퀴즈 낸다- 틴에이지팬클럽의 세 번째 앨범 ≪Bandwagonesque≫의 세 번째 트랙 제목이 ‘10월’이면 어떻고, ‘11월’이면 어떻다고, (여기서 또 퀴즈, 뭐게요?) 죽기 살기로 퀴즈를 맞히려고 했을까, 싶다. 그때 그 세계 속에서 퀴즈 한 문제 한 문제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겠지.
모두 각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음퀴방’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모여 음악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퀴즈 사이사이에 음악에 대한 잡담이 이어졌고, 나는 어떤 그룹이 좋은데 너는 누가 좋으니, 라고 물으며 시간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어, 너도 그 그룹 좋아해? 어떤 앨범 좋아하는데? 라고 심층질문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과거를 미화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만 그 시절에는 음악을 참 열심히 들었고, 감동도 참 잘 받았고, 추천도 많이 했고, 추천도 많이 받았다. 음악이 공기처럼 주변에서 늘 맴돌던 시기였다.
옛날 옛적(?)이 된 음퀴방 시절이 떠올라
그 시절 서로 음퀴를 내고 합을 겨루면서 친해진 친구들이 몇 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지만 그룹 이름과 노래 이름을 많이 안다는 이유만으로 “어머, 너도 고수구나”를 외치며 친해진 친구들이다. 20년 전 얘기다. 나에게 존 스펜서라는 불세출의 사이코를 알려준 친구는 지금 봄비노레코드(bombinorecords.cafe24.com)라는 정체불명의 음반몰을 운영하고 있으며, 소닉 유스의 앨범 ≪Goo≫를 아이디로 쓰던 친구는 요즘 뭐하는지 모르겠고, 일본 그룹들에 대해 함께 떠들던 친구는 최근에 영화감독(<죽이고 싶은>을 만든 조원희씨)이 됐더라. 그 시절의 친구들을 생각하면 얼굴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커서가 깜박이는 텅 빈 화면과 그들이 좋아하던 음악이 떠오른다. 마치 음악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1인칭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세계의 중심에 내가 있었고, 무엇보다 ‘나’가 중요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향하는 길이 중요했다. 지금은 조금 바뀌었다. 요즘의 내 세계는 ‘3인칭의 세계’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조금은 무덤덤해졌고, ‘나’라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1인칭의 장점이 있고, 3인칭의 장점이 있다. 1인칭의 세계는 열정적이지만 배려가 부족하고, 3인칭의 세계는 공정하지만 솔직함이 부족하다.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드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W(Where the Story Ends)와 W&Whale(더블유 앤드 웨일)의 음악을 모두 좋아할 수 있는 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내게 W의 음악은 1인칭의 세계였다. 섬세하고 감성적이고 상처받기 쉬운 음악이었다. 내 두팔을 벌려 둥근 원을 그렸을 때의 세계, 작지만 견고하고 열정적인 세계를 그린 노래들이었다. 나는 그 노래들이 내 이야기 같아서 사랑스러웠다.
W가 W&Whale로 변하면서 3인칭의 음악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웨일이라는 매력적인 목소리의 보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W&Whale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순간 연주를 하는 세명의 남자는 모두 사라져 음악으로 변신한다. 변신합체 로봇처럼 각자 자신만의 소리로 변신하여 웨일의 뒤에서 혹은 앞에서, 옆에서 화음을 넣다가 어느 순간 모두 합쳐 음악이 된다(지난 앨범 활동 때 모두 더미 마스크를 쓰고 나온 것도 혹시 이런 이유?). <월광>이라는 노래를 듣는 내내, 나는 웨일과 어떤 ‘생명체로서의 음악’이 소리를 주고받으며 듀엣을 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무심하고 건조해 보이지만 음악은 계속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그 음악은 분명 3인칭이었다.
W에서 W&Whale로, 1인칭에서 1+3인칭 음악으로
쇼케이스를 준비하기 위해 W&Whale의 리더 배영준씨를 만났다. 나와 비슷한 나이였기 때문인지(저보다는 몇살 위십니다만, 하하), 나는 PC통신을 하던 시절의 내가 된 것 같았다. 조금은 어색하게 물었다. “요즘은 어떤 노래 들으세요?” “요새 뮤트 매스 너무 좋던데요. 김 작가님은 어떤 노래 들으세요?” “저는 힙합 열심히 듣다가 요샌 다미엔 주라도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나는 속으로 뮤트 매스라는 이름을 외웠고, 배영준씨는 휴대전화기 메모창에다 다미엔 주라도의 이름을 적었다. 이름 두개 교환했을 뿐인데, 거대한 두개의 세계를 교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뮤지션의 이름을 서로 교환하는 것도 그런 일인지 모른다.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건, 그의 이름을 교환하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인지 모른다. 그의 모든 앨범과 그의 멜로디와 리듬과 그가 영향을 받은 뮤지션과 영향을 준 뮤지션의 이름을 함께 호명하는 것이고, 나의 취향과 내가 추구하는 세계관을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친구들과 나는 PC통신 속에서 어마어마한 일을 해왔던 것이다(우리가 알고보니 레지스탕스보다 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었네!). 음퀴방에서 우리가 호명했던 뮤지션의 이름들, 노래들이 우리를 더 큰 세계로 이끌었던 것이다.
공연장에서 W&Whale의 새 노래를 몇곡 듣게 됐다. 이전의 W&Whale의 음악과는 전혀 달랐다. 1인칭도 아니고 3인칭도 아니었다. 굳이 내 식대로 말하자면 1+3인칭이라고 해야 하나(이게 무슨 원 플러스 스리 행사도 아니고!). 시점이 없고 소리만 남았고, 정돈되기보다는 혼란스러웠다. 새로운 세계였다. 한편의 소설이 현실에 없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듯 한곡의 노래가 현실에 없는 새로운 우주를 탄생시켰다. 나는 W&Whale의 음악을 들으면서, 오래전 PC통신 시절의 두근거림을 다시 느꼈다. 한 사람이 진심으로 음악을 만들고, 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그 음악을 들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1인칭의 세계에서 출발해 3인칭을 통과한 다음 새로운 우주를 탄생시킨 W&Whale의 다음 목적지가 어딘지 궁금하다.
발매되면 아마 좀 시끄럽지 않을까. 모든 곡들이 너무 좋고, 무엇보다 정말 내 취향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난 이 사람들에게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