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사 ‘연필로 명상하기’의 혜화동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살짝 웃음이 났다. 안재훈 감독의 방에는 빈티지 가게에서 사모은 소품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고, 벽에는 깨알처럼 뭔가를 기록한 포스트잇이 틈없이 붙어 있다. 오랜 기억의 흔적을 긁어모아 만들어진 <소중한 날의 꿈>이 대체 어떻게 태어났는지, 말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사무실이다. 사실 ‘연필로 명상하기’는 <모험왕 장보고> 시리즈를 비롯해 여러 TV용 시리즈를 제작하거나 미국 애니메이션 하청 작업을 진행한 경험이 있는 회사다. 안재훈 감독은 소중한 첫번째 극장용 장편이 비용 문제로 중단될 때 마다 다른 작업들을 하면서 시간과 제작비를 벌었다. <소중한 날의 꿈>이 나오기 전까지 ‘연필로 명상하기’의 대표작으로 통하는 <미안하다 사랑한다>와 <가을연가> 애니메이션이 바로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사무실에 빈티지한 소품들이 많다. 하나씩 다 수집한 건가. =주말마다 풍물시장을 간다. 파는 분들 세상 사는 이야기도 듣고. <소중한 날의 꿈>을 시작할 때 젊은 스탭들은 옛 물건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런 물건들을 사와서 직접 그려보게도 했다.
-물건 파는 분들의 이야기도 영화에 녹여넣은 건가. =영화에 그려넣은 각각의 소품들이 어떤 또 다른 이야기를 줬으면 좋겠다만, 파는 분들에게 들은 인생 이야기가 직접 작품 속에 들어가진 않았다. 그분들 이야기는 하나같이 너무 영화 같다. 그런 이야기를 넣게 되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감독님의 기억으로부터 끌어온 이야기면서 왜 주인공은 여자아이인가. =아. 솔직히 그걸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웃음) 어느 날 그렸더니 여자아이더라. 아마도 숨겨진 동기가 있었을 텐데 왜였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자면, 여자가 갖는 행동의 매력, 표현의 다양성, 그런 것들에 끌린 게 아닌가 싶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인공들도 대개 여자다. 왜 그럴까. 그분 역시 직접 그림을 그리는 애니메이터 출신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행동의 다양성을 가장 잘 부여할 수 있는 게 여자아이다. 웃고 울고 감정의 기복이 심해도 여전히 매력적인 캐릭터이고 말이다.
-시대 고증을 세밀하게 지켜냈는데, 고증에 대한 자료들은 어떤 방식으로 찾은 건가.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찾았다. 송혜진 작가가 중간에 깨닫게 해준 게 있다.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시나리오 중간중간에 장소를 설명하는 지문도 많이 넣고 구체적인 그림까지 그려넣었다. 그런데 송 작가는 지문과 그림을 모두 빼고 글을 쓰자더라. 그림이 너무 좋아서 글을 용서하게 된다고 했다. 맞는 이야기였다. 정말 잘 만들어진 풍경은 관객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풍경이 아니라 내용에 빠져들어야 한다.
-메인 캐릭터 세명의 모델은 누구였나. =정확하게 내 어린 시절에서 찾아냈다. 주인공 이랑이가 달리기에서 2등을 하고는 낙담을 하듯이, 나는 부정한 방법으로 달리기에서 3등을 한 경험이 있다. 물론 누구도 내가 부정한 방법을 썼다는 걸 모르고 넘어갔다. 하지만 나에게는 여전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런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자기만의 트라우마를 통해서 성장한다. 나만 알고 있는 안쓰러운 내가 있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거 아니겠나. 관객도 그런 마음속의 자신을 조금 끄집어내면서 감상하면 좋겠다.
-메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목소리에는 어느 정도 만족하나. =연극배우, 배우 지망생, 전문 성우 등등 딱 맞는 목소리를 오랫동안 찾았다. 그래도 결정이 나지 않았고, 캐스팅 디렉터에게 성우로 참여하고 싶어 하는 분들의 목소리를 미리 좀 달라고 요청했다. 얼굴은 절대로 보여주지 말라는 조건을 걸고 말이다. 그렇게 신중하게 선택한 것이 박신혜, 송창의씨다. 사실 송창의씨는 첫 녹음날까지도 조금 헷갈리는 선택이었다. 목소리가 캐릭터보다 훨씬 중저음이어서. 근데 녹음하면서 한톤을 높여주어서 캐릭터와 잘 맞아떨어졌다. 정말 중요한 건 두 배우가 모두 직접 스튜디오를 찾아왔다는 점이다. 한두번도 아니고 여러 번 방문해서 애니메이터들과 직접 수다도 떨고 담배도 피우고…. 그걸 보면서 큰 희망을 느꼈다. 그저 몇 시간 녹음실에서 각자 녹음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정말로 캐릭터를 창조한 사람들과 호흡을 하려는 게 느껴졌다. 이런 경우가 앞으로도 애니메이션 목소리 출연의 표상이 되어야 할 것 같다.
-두 가지 중요한 판타지적 요소가 삽입된다. 하나는 해남의 공룡 발자국, 다른 하나는 철수와 삼촌의 작업실이다. =공룡 같은 경우는 송 작가가 해남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거다. 사실 이랑이가 뭔가를 남긴다는 내레이션을 하는데, 그걸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낼 해답을 못 찾았었다. 그런데 공룡들은 정말 확실하게 발자국을 남기고 사라지지 않았나. 한 시대에는 무리를 지어서 군림했을 공룡들이 발자국 하나 남기고 가버렸다. 마치 사람들이 뭔가를 남기려 발버둥치는 것과 딱 맞닿는 느낌이었다. 발자국을 남기는 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저 걸어가고 있으므로 남겨지는 거다. 그래서 이랑이가 성장하며 스스로 얻는 해답을 공룡의 판타지로 풀어내고 싶었다. 우주비행을 향한 판타지는 철수의 꿈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나름대로 연결하는 부분으로 설정했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과장법을 일부러 누른 듯한 느낌이 있다. 특히 주인공들이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는 장면 같은 것. 우직하게 움직임을 끌고 간다. =그 장면에서 그 이유를 물을 거란 생각은 못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생략법을 써도 되는 부분이지만, 만약 그렇게 만든다면 누군가는 은연중에 ‘저건 힘들어서 못했을 거야’라고 느낄 거라 생각했다. 우직하게 정면돌파를 해보고 싶었다.
-CG로 작업한 부분들이 있는데, 거의 드러나지 않게 셀애니메이션과 엮었다. =이랑이가 우산을 건네주고 뛰어가는 장면에서 배경이 살짝 올라가는 부분, 그게 가장 좋은 CG의 사용법이라고 생각한다. 뛰어가는 소녀의 모습을 까치발을 들고 조금 더 봤으면 좋겠다는 느낌을 CG로 살려보고 싶었다. 이랑이가 벽을 훑고 지나가는 장면도 CG다. 실재로 우리가 벽을 손으로 훑고 지나갈 땐 왠지 CG 같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잖나. 사람의 눈이 조금 더 보고 싶어 하는 정도를 CG로 살려보고 싶었다.
-지브리의 <귀를 기울이면> <추억은 방울방울> 같은 작품들을 대충 모델로 예상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지브리를 닮았을 거란 선입견은 점점 사라져갔다. =지브리가 아무래도 유명하니까 지브리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도 그림 그리는 것으로 출발했고, 나도 그렇다. 그래서 그림의 창작 영역을 잘 알고 있다. 한 장면에서 철수가 앉아서 뭘 하면서 다리를 떨게 만들었다. 스탭들에게 물어봤더니 <귀를 기울이면>의 여자주인공이 비슷하게 다리를 떠는 장면이 나오더란다. 그래서 다리를 떨지 않게 만들었다. 그림으로 발견한 건 그 사람만의 창작의 영역이다. 내 것이 아니니 도용하면 안된다. 다른 걸 발견해야만 한다.
-이를테면 미야자키 하야오 영화에서 빵을 뜯는 장면은 그 사람의 독창적인 특징인 것처럼? 이런 부분을 잘 아는 건 감독님이 미야자키처럼 애니메이터 출신이기 때문일 거다. =아는 분들이 <소중한 날의 꿈>이 한국 애니메이터들에게 새로운 꿈을 줄 것 같다고 한다. 캐릭터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노력한 것들이 이후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정한 창작은 내 주변을 보며 시작하는 거지 누가 만들어놓은 걸 참고하며 시작하는 게 아니다. 그림을 보고 배워서는 안된다. 주변을 보고 배워야 한다.
-제작기간이 10년이나 걸렸다. 그 과정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뭐였나. =물론 제작이 중단된 사이사이에 <가을연가>나 <미안하다 사랑한다> 애니메이션 같은 작품들을 하기도 했지만 일단은 애니메이션에 대해 꿈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꿈이 큰 사람은 좌절도 빨리 한다. 나는 이거 한편 최선을 다해서 만들고 농사를 짓든 뭘 하든 괜찮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더 최선을 다해서 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애니메이터 중에 부모님께 자기 직업을 제대로 된 직업으로 평가받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소중한 날의 꿈>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우리 사무실에는 모차르트들이 있다. 이들이 이후에도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걸 너무너무 보고 싶다. 그래서 뭔가 후배들을 위한 완벽한 하나의 기준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