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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김기영 세계의 첫걸음

첫 공개되는 김기영 감독 데뷔작 <죽엄의 상자> 통해 보는 습작 시절 그의 영화적 관심

김기영의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가 발굴되어 첫 공개를 앞두고 있다. ‘전영객잔’이라는 지면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지만 오는 6월4일과 9일 영상자료원에서 공개될 김기영의 초기 영화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미리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나름의 가치는 있지 않을까 한다. 김기영은 1950년대 미국공보원의 리버티 프로덕션에서 중·단편 영화를 찍으며 자신의 영화 인생을 시작했다. 프로파간다 성격이 강한 홍보성 영화이긴 했지만 그는 이들 영화에서 그 가능성을 인정받으며 <죽엄의 상자>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이 작품 역시 미국공보원이 제작했다). 지금까지 그의 영화세계에서 <하녀> 이전의 시기는 침묵의 영역이었다. 1950년대 후반 그가 연출한 8편의 영화 중 남아 있던 작품은 <양산도>(1960)가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김기영식의 기이한 상상력이 드러났다고 전해지는 엔딩 부분은 존재하지 않는다(<십대의 반항>(1959)은 시나리오만 남아 있다). <죽엄의 상자> 역시 발견된 프린트가 사운드 없는 불완전한 형태로, 유성영화를 무성영화로 관람해야 하는 기이한 경험을 요구한다. <죽엄의 상자>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이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일입니다”라는 자막을 제외하고는 단 한마디의 대사도 들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가 장편 극영화로 데뷔하기 이전 미국공보원의 지원 속에 연출한 중·단편 작품인 <나는 트럭이다>(1954), <사랑의 병실>(연대 미상), <수병의 일기>(연대 미상)는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아왔고, 이들 작품들은 습작 시절의 김기영의 영화적 관심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김기영식의 몽타주 실험

먼저 김기영의 세편의 중·단편 영화에 놓인 표면적인 공통점은 전쟁으로 무너진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당위를 다큐멘터리‘처럼’ 꾸며서 이야기하며, 그 과정에서 프로파간다적인 주제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들 작품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프로파간다적인 주제와 무관하게, 영화적인 테크닉을 습득하려는 김기영 나름의 영화적 실험이 펼쳐질 때이다. 실제로 <나는 트럭이다>와 <사랑의 병실>은 육체적 파편화와 그 재조립의 과정(과 이와 맞물리는 편집 방식)에 이끌리면서 국가 재건이라는 주제를 이야기하고, <나는 트럭이다>와 <수병의 일기>는 기계적 움직임에 이끌리면서 이를 강화할 수 있는 리듬감있는 편집을 모색하려 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사랑의 병실>은 전쟁으로 다리를 절단한 채 병원에 기거하다 미군에 선물받은 의족을 통해 새로운 삶의 희망을 갖게 된 소년과 그를 돌보는 간호사에 관한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김기영은 전체적으로는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을 자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곳곳에서 극영화적인 효과를 창출하기 위한 연출을 삽입해놓고 있다. 간호사가 소년에게 의족을 건네기 위해 다가서는 장면이나, 소년이 늦은 밤 느끼는 공포를 시각화하는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연대기적 순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사랑의 병실>에 비해 김기영의 영화적 실험이 진일보한 작품, 그리고 이번에 국내에 소개되는 그의 초기 영화 중 가장 주목해야 하는 작품은 <나는 트럭이다>다. 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한국전쟁 이후를 배경으로 트럭을 1인칭 내레이터로 설정하고 있다. 전쟁으로 폐물이 되어 공장에 맡겨진 트럭이 해체와 재조립 과정을 거치며 온전한 모습으로 재탄생한 뒤 도로를 질주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표면적으로 프로파간다적인 희망의 찬가를 부르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이 작품에서 김기영의 목적은 이러한 주제의 구현이 아닌 육체적 분리와 재조립 과정을 바탕으로 편집의 잠재력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나는 트럭이다>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다큐멘터리적인 필름 질료를 활용하여 마치 1920년대 소비에트 몽타주 감독들이 행했던 것과 유사한 편집 실험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서 폐물이 된 트럭이 분리, 재조립되며 새로운 트럭으로 거듭나는 과정과 잘게 잘린 필름 조각을 몽타주적인 조립으로 (각각의 숏 자체로는 갖지 못했을) 특정한 효과를 창출해내는 영화적 편집 과정은 동일한 성격으로 위치하고 있다.

김기영식 <카메라를 든 사나이>라 불러도 좋을 이 작품에서, 김기영은 폐물이 된 트럭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며 포효하는 듯한 영화 초반의 장면에서 시작해 이후 트럭이 분리, 재조립되는 과정의 기계적 동작을 리듬감있는 편집으로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영화적 재능을 마음껏 펼쳐놓는다. 실제로 이 작품에서 확인되는 김기영의 편집 감각은 우리에게 남겨진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편집을 통해 기계의 다양한 움직임을 영화적 리듬감으로 변주하려는 그의 태도는 <수병의 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세 청년이 수병이 되기 위해 일련의 훈련을 받는 과정을 담은 <수병의 일기>에서, 그는 영화 중반의 연주회 장면이나 후반부 일련의 선박 수리 장면 등에서 편집을 통해 역동적인 영화적 리듬을 창출하려 하고,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강조하기 위한 시각적 구성에 이끌리기도 한다. 어쩌면 이들 영화에서 가장 김기영답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의 카메라가 무정의 사물을 바라볼 때, 그러니까 어떤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기계적 움직임을 포착하려 하는 시선이 드러날 때일 것이다.

김기영이라는 유일한 계보의 시작

<나는 트럭이다>의 내레이터인 트럭은 파편화된 자신이 재조립되며 새롭게 탄생한 데 감탄하며 내레이션을 잇는다. 이러한 트럭의 태도는, 마치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분리된 필름 조각들을 재조립해 새로운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편집의 잠재력을 확인한 김기영의 예찬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영화가 이영일이 ‘어두운 마성의 미학’라 칭했던 김기영의 영화적 특징을 확인해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그의 첫 장편 데뷔작인 <죽엄의 상자>에서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비록 프린트가 발견되긴 했지만 사운드가 부재하는 탓에 김기영의 데뷔작으로, 그리고 국내 최초로 미첼 카메라를 이용해 동시 녹음한 작품으로 막연하게 알려졌던 이 작품에 달려 있는 추측의 꼬리표를 여전히 떼어낼 수 없는 상황이다.

김기영은 국내에서 가장 독창적인 감독으로 이야기되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인 영화적 장르나 관습에서 완전히 단절한 감독은 아니었다. 이는 그가 멜로드라마의 인물 구도를 활용하면서 그 관계의 관습이 스스로 폭발하는 한계 지점까지 밀고 나가곤 했다는 점이나 자신의 영화를 당대의 영화적 흐름에 맞춰 지속적으로 리메이크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죽엄의 상자> 역시 1950년대 한국영화의 흐름이었던 사실주의적 경향에서 크게 이탈하는 작품은 아니다. 또한 종종 심도 깊은 화면이 눈길을 끈다 해도, 그것이 1950년대 제작된 다른 영화에 비해 진일보한 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는 없을 듯하다. 하지만 한국영화에서 가장 기이한 상상력을 보여주었던 김기영의 데뷔작이라는 점은, 이 작품에서 그러한 상상력의 맹아적 형태를 찾으려는 유혹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한다. 관객에게 시각적 충격을 주기 위한 장면(닭 목을 칼로 베는 것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장면)을 활용하고, 관객의 관음증적이고 말초적인 욕망에 호소하려는 장면을 적절히 배치하고 있으며, ‘눈빛이나 표정’을 통해 드러나는 이중적 욕망에 빠져 있는 인물(특히 강효실이 연기하는 누이)의 태도는 <하녀> 이후 그의 영화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화 후반부 극적 긴장감이 고조될 때, 사각 앵글과 극단적 앙각, 그리고 빠른 커팅의 활용은 그가 중·단편 영화에서 이미 보여준 바 있는, 극적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사실주의적 묘사에서 갑작스레 이탈하는 영화적 전략을 다시 확인시켜준다. <죽엄의 상자>에서 나타나는 김기영의 인장이 비록 너무 희미하거나 맹아적 형태에 불과하고, 그마저 불완전한 형태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이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자신만의 계보를 완성한 김기영 작품 세계의 첫걸음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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