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밥의 제왕 혹은 낚시의 제왕. 가만 생각해보면 세상에 J. J. 에이브럼스보다 얄미운 감독은 없다. 뭐든지 꽁꽁 숨겼다가 터뜨리고, 심지어 숨길 필요가 없는 것도 숨길 뿐 아니라 숨길 게 굳이 없을 땐 토끼발이라도 내밀고야 만다. <슈퍼 에이트>의 티저 트레일러가 공개되자 전세계 영화광들은 한숨을 깊이 내쉬며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어댔다. 하지만 그런 낚시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다. J. J. 에이브럼스는 언제나 떡밥만큼이나 근사한 것을 내놓으며 우리를 달랬고, <슈퍼 에이트>도 마찬가지다. 싱가포르 힐튼 호텔에서 J. J. 에이브럼스를 만나자마자 반 농담으로 (그러나 솔직한 심정으로) “올해의 영화를 만든 것을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J. J. 에이브럼스는 예의 장난꾸러기 13살 같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런 달콤한 인사치레를…. (웃음)”
-그나저나 야심찬 이야기다. 괴물영화, 성장영화, 에일리언영화 등 모든 장르가 빼곡히 들어 있다. 하나의 대본으로 완성하는 것이 쉽진 않았을 것 같다. =모든 요소의 균형을 잡아내는 건 대단히 도전적인 작업이었다. 시작은 내가 슈퍼 8mm 카메라로 영화를 찍던 어린 시절을 다시 방문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었고, 70년대 말이라는 시대에 아이로 살아간다는 것이 진정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주인공 캐릭터들이 <스쿠비 두>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또 아내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이 아역 캐릭터들만큼이나 중요했다. 그 모든 요소들로 저글링을 해야 했는데, 운좋게도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자로 참여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딱 내 세대의 유년기를 지배하는 엠블린 엔터테인먼트의 향수를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당신에게도 엠블린에 대한 엄청난 향수가 있는 것 같다. =물론이다. 1979년에 나는 딱 13살이었다. 당시에 본 엠블린 영화들, 심지어 엠블린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스필버그 영화들은 나에게 가히 본질적인 영향력을 남겼다. <슈퍼 에이트>는 드라마, 코미디, 성장영화, 모험영화, 괴물영화 등 내가 좋아하는 모든 장르의 희한한 칵테일이고, 그건 엠블린 엔터테인먼트 영화들의 인증서 같은 특징이기도 했다. 바로 그런 특징을 껴안아보고 싶었다.
-그중 가장 본질적인 영향력을 끼친 단 하나의 영화를 꼽는 게 가능한가. =나는… (웃음) 너무 좋아하는 영화가 많아서 하나를 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E.T.> <클로즈 인카운터>는 물론이고, <죠스>도 정말로 좋아한다. 초기 스필버그 영화인 <슈가랜드 특급>도. 스필버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경력을 한번 되돌아보라. <쉰들러 리스트>처럼 심각한 영화들과 초창기 영화들을 오가는 행보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그는 지금 <땡땡의 모험>을 마치고 링컨 전기영화를 찍고 있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처럼 좀더 심각한 소재를 다룬 영화를 만들고 싶은 욕심도 있나. =물론이다. 영화 속 악당이 괴물이나 다른 행성에서 온 존재가 아닌 영화 말이다. (웃음)
-그러고보면 당신은 언제나 영화에 괴물을 집어넣는다. 심지어 <스타트렉>이나 <로스트>처럼 괴물이 전면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 영화에서도 말이다. 괴물을 향한 당신의 열정과 강박은 어디서 온 건가. =실재하는 장소에 초현실적인 괴물들을 삽입하는 아이디어를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슈퍼 에이트>의 괴물은 그냥 괴물은 아니다. 이건 주인공 소년소녀들, 그들의 부모가 지닌 마음의 상처를 육체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소년의 이야기는 괴물없이 존재할 수가 없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를테면 괴물이 소녀를 납치해서 지하 동굴에 가둬놓는 것 같은 설정 말이다. =봉준호 감독은 개인적으로 안다. 서울에서도 만난 적이 있고, LA에서도 몇번 만났다. 좋아하는 감독 중 한명이다. 왜 <괴물>과의 유사성을 짚는지 이해할 수 있다. 모든 감독들은 다른 영화와 다른 감독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나는 봉준호의 팬이고, <괴물>은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괴물을 끌어들인 정말 아름다운 영화다. <슈퍼 에이트>는 내가 좋아하는 스필버그, 존 카펜터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영화이고, 봉준호의 <괴물> 역시 그중 하나다. 언젠가는 봉준호와 함께 작업하려고 마음먹고 있다.
-그 프로젝트가 완성되길 정말 손꼽아 기다리겠다. 그런데 혹시 레이 해리하우젠의 팬이었나? 종종 당신 영화의 괴물들은 마치 스톱모션 시절의 괴물들처럼 움직인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해리하우젠을 아주 좋아한다. 내 아이들이 해리하우젠의 책 사인회에 가서 함께 찍은 사진도 갖고 있다. (웃음) 생각해보면 그가 괴물을 창조하면서 사용한 도구와 기술은 지금 우리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우리 역시 컴퓨터를 이용해 모델을 만들고 한 프레임씩 그걸 촬영해서 만들어내지 않나. 해리하우젠은 이 모든 것의 개척자였다.
-1979년의 복고적인 향취를 위해 영화를 필름으로 촬영한 건 알겠다. 그런데 디지털로 촬영한 뒤 후반작업에서 변환할 수도 있지 않았나. =<슈퍼 에이트>는 정말로 70년대 후반에 찍은 영화처럼 보였으면 했다. 물론 스테디캠이나 CGI처럼 그 시절에 없었던 기술들을 활용하긴 했지만 말이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었다면 모든 액션장면이 훨씬 선명하고 강렬하게 보였을 테지만 1979년에 벌어지는 일처럼 보이진 않았을 거다. 사실 나는 디지털영화 만들기의 엄청난 팬이다. 그리고… 솔직히 37개의 숏은 레드원 카메라로 촬영했다. 왜냐하면 몇몇 장면은 더 빠르고 용이하게 순간을 잡아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누구도 어떤 숏을 레드원으로 찍었는지 알아챌 순 없을 거다.
-테크놀로지를 잘 다루는 편인데 3D에는 관심없나. <슈퍼 에이트>도 3D로 제작하자는 제안이 있었을 법한데 말이다. =3D 유행에 아주 반대하는 건 아니다만 만드는 입장에서 3D는 또 다른 레벨의 두통거리다. (웃음) 촬영하면서 제약이 너무 많다. 렌즈 플레어나 동선 등을 보통 영화와 다른 방식으로 처음부터 조절을 해야 한다. 차라리 2D로만 재미있는 영화들을 만들고 싶다. 2D영화도 잘 만든다면 3D보다 훨씬 더 입체적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결국 캐릭터와 스토리다.
-올여름 할리우드는 속편이 정말로 많다. 그게 전반적인 경향이기도 하고. 할리우드에서 속편이 아닌 여름 블록버스터를 만들려면 얼마나 제작사와 투쟁을 해야 하나. =만드는 게 어렵다기보다는 팔기가 어렵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두개의 속편(<스타트렉: 더 비기닝> <미션 임파서블3>)를 만들었지만 요즘 할리우드에서는 종종 판매수완이 창의성보다 앞설 때가 많다. 제작사로서는 제목 뒤에 번호가 붙어 있는 영화를 파는 게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스타트렉: 더 비기닝>도 11번째 후속편이지만 나로서는 이전의 시리즈가 단 한번도 한 적 없는 방식으로 만들기 원했다. 생각해보니 <슈퍼 에이트>도 뒤에 8이라는 숫자가 있지만 <슈퍼 1>과 <슈퍼 7>은 없으니까. (웃음)
-한국에서 당신은 ‘낚시의 제왕’이라고 불린다. 물론 아직은 그런 비밀 홍보방식이 끝내주게 잘 통하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영원히 먹히지 않을 거라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영원할 순 없다. 개봉일이 다가올수록 <슈퍼 에이트>에 대한 정보도 더 풀고 있다. 다만 나는 관객의 경험을 망치고 싶지 않다. 그들의 영화적인 경험을 존중하고 싶다. 특히 <슈퍼 에이트>는 마치 관객이 1979년에 영화를 보러간 것처럼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 시절에는 극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온라인이나 트레일러로 미리 영화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었고, 덕분에 모든 영화들이 일종의 놀라움이었다. 요즘은 트레일러만 봐도 영화에 대해 다 알 수 있지 않나. 제작사는 더 보여주고 싶어 하지만 나는 <슈퍼 에이트>가 놀라운 영화적 경험이 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