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할리우드에서 10번째로 돈을 많이 번 영화 <행오버>는, 총각파티를 위해 라스베이거스에 간 세 남자가 예비신랑을 잃어버리면서 벌어지는 소동의 A to Z를 보여준다. 영화의 중반쯤에 트렁크에서 쿵쿵 소리가 나자 세 남자는 반가운 마음에 트렁크를 여는데, 왜소한 단신의 동양인 남자가 전라로 튀어나와서는 쇠지레로 제 몸집의 두배는 될 법한 장정 셋을 두들겨팬다. 수치심은커녕 자비도 없는 이 의문의 남자는 30초가 채 되기 전에 셋을 다 때려눕히고는 사막을 전력으로 질주해 사라진다.
“대체 누구였어? 완전 장난 아니던데?” 극장을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동양인 남자를 궁금해했다. <행오버>에서 중국계 마피아 미스터 차우를 연기한 ‘그 남자’는 한국계 코미디언 켄 정이다. 그는 주드 애파토우의 <사고친 후에>의 산부인과 의사로 영화에 데뷔한 뒤 <파인애플 익스프레스> <행오버>와 TV시트콤 <커뮤니티>를 통해 세상에 존재를 각인시켰다.
켄 정은 3년 전까지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코미디언으로 일한 투잡족이었고, <행오버> 뒤에야 비로소 전업 코미디언이 되었다. “나는 의사가 되도록 길러졌다.” 16살에 대학에 입학한, 이른바 천재과인 그는 학창 시절 우등생이었을 뿐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 나설 기회도 욕심도 없던 그에게 무대의 희열을 알려준 자리는 고등학생 시절 참여한 남학생 미인대회였다. 레슬러 ‘헐크 호건’으로 분장해 포즈를 취한 그는 체격 좋고 잘생긴 남학생들 틈에서 단연 도드라졌고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 뒤 대학에 진학하고 의사가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틈날 때마다 무대에 서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연마했다. 의사에서 코미디언으로 직업을 바꾼 사실이 스스로도 “초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인생의 전환점으로 <사고친 후에>를 꼽는다.
감독 주드 애파토우의 극찬에 힘입어 켄 정은 거만하게 화내는 캐릭터를 그의 얼터에고로 만들었다. 시상식에서든 토크쇼에서든 그는 거만한 팔자걸음으로 등장해 오두방정을 떨며 춤을 추고 괴성을 지르며 좌중을 휘어잡는다. 이 화내는 캐릭터의 절정은 <NBC>의 <커뮤니티>에서 볼 수 있다. 시즌1에서 모든 학생에게 이유없이 심술을 부리는 (중국인이면서) 스페인어 강사를 연기하는 조연으로 시작해 시즌2에서는 강사 자격을 박탈당한 뒤 학생들의 뒤를 기웃거리는 아웃사이더로 분하며 고정 캐스팅으로 자리매김했다.
영화에서든 TV에서든 ‘켄 정표’ 캐릭터의 공통점은 과장된 제스처와 스테레오타입이다. 그는 동양인이라는 단점이자 특장을 최대로 활용해 관객과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런 특수성보다 더 먼저 발견되는 것은 동물적인 감각이다. 그는 사소한 제스처, 의미없는 괴성, 심드렁한 표정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코미디언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이름을 만천하에 알린 <행오버>의 나체신도 스스로 낸 아이디어였다. 그 장면 덕분에 2009년 MTV 시상식의 Best WTF Moment상(최고의 황당한 순간상)을 수상하면서도 그는 온갖 오두방정을 떨며 수상대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남긴 소감 덕분에 그 장면은 더욱 유명해졌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내게 <행오버>에 출연할 용기를 준, 당시 암투병 중이던 아내 트란에게 이 기쁨을 바칩니다. 그녀는 우리의 삶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짧아도 이제 막 시작된 켄 정의 코미디 인생은 길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