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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아름답고 아름다운 불가능한 사랑 이야기

<더 브레이브> 속 늙은 카우보이와 어린 소녀와 충실한 말이 불러일으키는 심상

결국 모든 서부영화는 ‘상실이라고 믿는 결핍’의 장르다. 개척정신의 신화, 남성 영웅과 공동체의 가치, 대립구도로 이뤄진 세계를 전면화하는 정통 웨스턴은 ‘신화’라는 말 그대로 그것이 환상임을 스스로 지칭하고 있다. 변형된 웨스턴이 고전기 세계의 영웅적 대결, 정의, 풍경의 몰락을 보여줄 때, 그건 앞선 환상에 대한 스스로의 인정이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장르적 변주가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그리고 그 변형이 ‘돌아갈 수 없고, 되찾을 수 없음’의 정조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실은 돌아갈 곳, 되찾을 것의 실체가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한때 소유했던 것에 대한 상실의 애조가 아니라, 상실했다고 믿는, 그러나 애초 텅 빈 것과의 대결. 모든 서부극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불가능성으로 지탱되는 장르다. 고전기 웨스턴에서 수정주의 웨스턴으로의 변화가 영화사적으로 어떤 반성적인 쟁점을 불러일으켰는지의 문제는 물론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구분보다 거의 모든 서부영화들이 공유하는 전제, 자신의 텅 빈 구멍을 쳐다보며 세계를 쌓아올려야 하는 장르의 운명을 그 장르가 어떻게 감내하고 있는지의 문제가 더 흥미롭다.

<더 브레이브>가 고전기 웨스턴과 수정주의 107웨스턴의 범주 어디쯤에서 영화적 활력을 찾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안시환이 썼다(<씨네21> 795호). 그는 “신화적 장식이 제거된 수정주의 웨스턴의 서부를 배경으로 고전 웨스턴에나 어울릴 만한 영웅적 인물을 재발견하려 한다”고 이 영화의 의의를 설명했다. 수긍할 만한 논지지만, 내게 이 영화의 감흥은 그런 범주화의 맥락에서 발생하는 것 같지는 않다. <더 브레이브>는 앞서 언급한 서부극의 근원적인 불가능성을 장르를 부숨으로써 증명하는 대신, 그 불가능성을 서사 안에서 물질적으로 형상화해서 장르를 버텨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불가능성의 자리를 소멸의 그림자와 잔상을 더듬으며 상기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성의 순간으로 그 자리를 직접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추상적으로 들릴 위험이 있으니 이제 영화 안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보려고 한다. 이 모든 인상의 중심에는 영화의 주인공인 열네살 소녀 매티가 있다.

그 소녀, 관능적으로 서부극에 작용하다

이 영화와 기존의 서부극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가 남자 어른이 아닌, 소녀의 관점으로 서사가 전개된다는 사실은 영화를 본 누구나 지적하는 사항이다. 이 소녀는 서부극의 정형화된 여성 캐릭터의 범주를 벗어난다. 기존의 여성 인물들은 남자 카우보이들의 행위의 근원으로 작용할 때는 많으나, 스스로 행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소 도식적인 설명이지만, 이 여인들은 대개의 경우 남자들의 착취를 견디는 과잉되게 성적인 존재이거나 남자의 귀환을 기다리는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존재 둘 중 하나일 때가 많았다. 그러니 직접 복수에 나서는 행위의 주체인 매티는 서부극에서도 특수한 여자 인물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행위가 미미했던 지난 서부극들과 비교해서, 이 영화의 감흥을 친여성적이라는 데서 찾을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더 브레이브> 속 여자주인공을 화제에 올릴 때, 그녀의 명석함과 용감함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말해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에 대한 평들은 그 무언가를 놓치고 있거나, 피하고 있거나, 실은 너무 확연하게 드러나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 같다. 성인 여자라고도, 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열네살 소녀의 성적 정체성. 공동체에 속한다고 보기도 어렵고 가족의 보호 안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은 이 모호한 위치의 소녀. 그 모호함은 오히려 그녀를 보호받아야 할 존재와 착취당하는 존재 그 어느 쪽도 아닌 곳에 세워둔다. 나는영화를 보는 종종 이 소녀의 모호함이, 정확히 말해 그 모호함이 서부 세계 속에서, 서부의 성인 남자들 틈에서 작용하는 방식이 외설적이라고 느껴졌다. 노골적으로 큰 가슴을 과시하며 카우보이들과 어울리던 서부극의 창녀들보다 어딘지 더 성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바꿔 표현하고도 싶다. 소녀 그 자체의 형상은 관능적이지 않지만 그녀가 영화에서 작동하는 순간들은 관능적이다.

왜 소년이 아니고 소녀인가. 이미 찰스 포티스의 원작 소설에서 이야기의 화자가 소녀였으니, 이것이 코언 형제의 독특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따른 데는 아마도 열네살 소녀가 지극히 남성적인 세계 속에 던져질 때, 서부극이라는 상수에 일어나는 파장, 거기서 비롯되는 영화적 순간의 현현을 상상했을 것이다. 만약 매티의 자리를 소년이 대신 차지했다면, 아버지와 (유사) 아들의 서사는 서부극의 상징적 회복, 혹은 균열을 형상화했겠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 결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소년 대신, 소녀가 들어서면서 그런 남성 서사는 일단 단절되고, 아버지-딸처럼 보이는 구도에는 필연적으로 성차에서 비롯되는 또 다른 욕망의 결이 내재적으로 흐르게 된다. 그걸 일종의 근친상간적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물론 그 자체로는 진부한 문구지만, 그 욕망이 다른 어떤 장르도 아닌 서부극에 흐르고 있다면, 새롭게 생각할 여지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미 원작 소설에서 그와 유사한 욕망은 드러나 있다. 소설 속 화자 매티가 루스터 카그번과 라뷔프를 묘사하는 장면들에서는 때때로 단지 세대차가 아니라 성차에서 비롯되는 호기심과 묘한 감정이 엿보인다. 이 소설을 처음 영화화한 헨리 해서웨이의 <진정한 용기>에서 매티의 모습이 무성적으로 보이는 것은 “두 남자와 한 소녀의 여행으로부터 불순한 이미지를 애써 지우려고 한 의도”라는 김용언의 지적(<씨네21> 792호)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인 1880년대에 미성년 소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서부극이 결국 그것이 만들어진 현재의 가치관, 관점에 더 관련이 있다고 믿을 때, <더 브레이브>에 대해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왜 영화는 미성년 소녀를 성인 남자들만의 금지된 영역 속으로 들여보내 활동하게 하는가? 그때 코언 형제의 서부극은 어떤 영화적 활기를 획득하는가?

장르적인 안전망으로 덮여서 의식하지 못할 따름이지, 사실 이 영화가 소녀를 다루는 방식은 때때로 암묵적인 금기를 가로지르는데 그 순간을 영화가, 혹은 매티가 너무 자연스럽게 넘어가버려서 당혹감이 든다. 몇 가지 예가 있다. 우선, 라뷔프의 경우. 아버지의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 낯선 곳에 당도한 소녀가 이른 아침 모텔 침대에서 눈을 뜨자, 그 앞에 낯선 남자가 소녀를 지켜보고 있다. 소녀가 잠시 움찔한 다음,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여기에 비즈니스적 목적 외의 다른 의도가 없음이 드러나지만, 이 베드신(!)은 뭔가 상황이 묘하다. 침대 이불 속에 몸을 꼭 숨긴 채 당돌하게 대꾸하는 가녀린 소녀와 온갖 장신구로 무장한 건장한 마초의 시선이 비좁은 방에서 서로를 탐색할 때, 여기에는 아이와 어른,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와 직업적으로 능숙하게 단련된 남자 사이의 불균형한 차이를 일순간 팽팽하게 당기는 긴장감이 있다. 말하자면 차이가 주는 안도감이 깨지는 순간이 있다. 라뷔프가 매티에게 “아프고 매력없어 보여도 키스라도 한번 할까 했는데, 지금은 때려주고 싶다”고 말하고, 매티가 “그럼 그쪽은 뭐 괜찮은 줄 아나보지”라고 응수할 때 영화가, 혹은 인물들이 위의 그 이상한 긴장감을 의도적으로 상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뒤, 두 남자의 명령을 듣지 않고 기어이 그들의 여정에 따라나서는 매티를 라뷔프가 말에서 끌어내려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소녀의 엉덩이를 마구 때리다가, 회초리로 종아리를 휘갈기는 장면은 어쨌든 폭력적이긴 한데, 이상하게도 우스꽝스럽거나 부적절해 보이게 찍혔다. 그런 식의 처벌은 열네살 소녀보다는 훨씬 어린 아이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거나 소녀가 결심을 번복할 만큼 위협적이지 않다. 한마디로, 라뷔프의 행위는 훈육보다는 다른 뭔가를 대체하는, 어딘지 외설적인 행동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미묘한 함의를 품은 상황들만큼 중요한 건 그걸 받아치는 소녀의 대응이다. 라뷔프와의 장면들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폭력적인 순간들, 이를테면 루스터와 라뷔프가 쫓는 일당이 소녀에게 거칠게 주먹질을 하고, 희번덕거리는 칼을 소녀의 목에 들이대고, 발로 얼굴을 뭉개는 장면들에서, 그 순간만큼은 이것이 미성년 소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는 사실에 대한 어떤 영화적 배려도 없다. 그 정도로 선정적이고 다른 영화에서라면 충분히 불편한 장면일 텐데,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좀 다르게 느껴진다. 그런 장면들이 단지 장르적인 방어 안에 있어서가 아니라, 소녀가 남자 카우보이들과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소비되는 대신, 자신에게 부여된 그런 선정성을 받아치며 끊임없이 평등하게 상대 숏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일단 그녀가 더이상 카우보이 아버지에 의지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상징적인 아버지, 즉 법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법이 아버지라는 물리적 존재보다 더 효력을 발휘했는지를 묻는다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만, 영화에서 법(의 이름)은 어른 남자들의 세계에 대응하는 소녀의 총이다. 그러나 표면적인 무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 같진 않다. 오히려 소녀와 마초 세계 사이에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건, 소녀가 남자들의 무법한 세계에 법으로 응수할 때이기보다는, 그들의 은폐되고 무법한 욕망을 읽고, 거기서 어쩌면 소녀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꿈틀대는 자신의 욕망을 감지하는 듯 보일 때다. 미성년 소녀가 갖는 외설성, (이 말이 이상하다면) ‘어린’과 ‘여자’ 사이의 위태로움에서 나오는 영화적 기운의 정체가 음(陰)이 아닌 양(陽)으로, 금기나 범죄의 위반이 아닌 어떤 생성의 힘처럼 느껴진다면,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루스터와 매티의 관계는 그저 아버지-딸의 관계로 단언하기 어렵다. 한눈에 보기에도 자유로운 한량인 이 남자는 고작 어린애에게 휘둘린다는 라뷔프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왜 소녀를 내치지 못할까. 단순히 돈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한때는 용맹했던 카우보이로서 딸 같은 어린애에 대한 연민, 그러니까 아버지로서의 본능이 자극된 걸까. 한 장면이 있다. 루스터와 매티가 정보를 얻기 위해 찾아간 어느 인디언 집에서 아마도 그 집의 자식들인 두 아이들이 기둥에 묶인 말을 학대하는 모습을 본다. 루스터는 말을 풀어주고 아이들을 발로 걷어차고는, 일을 마치고 나와 다시 이유없이 아이들을 힘껏 걷어찬다. 사리 분별력이 강한 매티가 이 모습을 어떤 감정도 없이 지켜보는 것도 이상하지만, 루스터의 냉정하고 거친 행동과 두 인디언 아이들이 뿜어내는 기이한 기운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는 않다. 이 장면을 두고 영화의 인종적 발언에 대해 말하거나 루스터의 어떤 성미에 대해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뒤이어 나오는 장면과의 맥락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집을 떠나 숲길을 가로지르면서 남자는 오래전 자신을 떠난, 부자간의 정이 없던 아들의 존재에 대해 농담처럼 내뱉는다. 말하자면 이어지는 두 장면은 그가 어떤 경우라도 아이는 보호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의로운 카우보이, 부성을 간직한 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본능에 따라 사는 남자라는 걸 보여준다. 그에게 매티는 딸이 아니다.

어쩌면… 서부극의 마지막 행위

이 모든 여정을 지나 원수에게 총을 쏜 매티가 굴속에 떨어져 뱀에 물리자 루스터는 독을 빨아서 뱉어내는데, 그 모습에서 좀더 에로틱한 클라이맥스로의 이행을 기대한다면 억지인가. 남자가 정신을 잃어가는 매티를 소녀의 분신과도 같은 말, 리틀 블래키에 태우고서 달리고 또 달리는 드라마틱한 순간의 감흥을 정녕 죽어가는 딸을 살리려는 아버지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 아버지의 형상이 서부극이라는 장르의 현재적 위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좀 다르게 느낀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아름다운 시퀀스를 보면서 <더 브레이브>는 결국 어린 소녀와 쇠락한 카우보이의 (불가능한) 사랑 이야기라는 확신에 사로잡힌다. 블래키와 루스터, 그리고 매티가 삼위일체가 되어 한 리듬으로, 오로지 셋의 호흡에만 의지해서 가쁘게 클라이맥스를 달릴 때, 영화가 이뤄낸 이 순간의 더없이 위태롭고 우아하게 센슈얼한 경지를 섹스신이 아닌, 다른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영화 전체에서 이 시퀀스가 가장 과하고 인공적으로 형상화된 건 영화의 미학적 욕심이기보다는 이들의 섹스가 꿈이고 환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어린 소녀를 거친 황야에 밀어넣고 이리저리 외설성과의 게임을 벌인 뒤에, 무엇보다 그 게임의 주체 자리에 소녀 또한 앉힌 뒤에, 바로 여기서 영화 기저에 흐르던 욕망을 폭발시킨 건 아닐까. 둘의 불가능한 사랑, 아니, 불가능한 섹스는 앞서 언급한 이 장르의 태생적인 불가능성의 심연을 영화적인 생성의 힘으로 형상화하고 마주하는, 영화에 남겨진 최선의 방식이 아닐까. 그것은 이 영화가 총잡이들의 허무한 스펙터클을 체념적으로 바라보지 않고서도 서부극으로서 스스로의 운명을 의식하는 방식인지 모른다. 어쩐지 회한보다는 결기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루스터가 지쳐 쓰러진 말을 죽이고 매티를 안고서 그 밤을 빠져나갈 때, 찬란하게 만개했던 한순간은 어디론가 달아난다. 성인이 된 매티의 잘린 한쪽 팔은 그 불가능성의 징후일 것이며 그 불구의 몸에는 도저한 위엄이 깃들어 있다. 그 기이한 밤, 소녀와 남자는 무슨 꿈을 꾸었던 걸까. 결혼도 하지 않고 이젠 성적인 기운이 퇴색된 중년의 매티는 루스터의 시신을 가족묘로 이장하고 건조한 어조로 세간의 수군거림을 전한다. 하지만 그 밤을 지나온 우리는 알고 있다, 소문은 때때로 말할 수 없는 진실을 건드린다. 별이 빛나던 그 밤의 환각의 멜로, 늙은 카우보이와 어린 소녀와 충실한 말이 서로를 힘껏 껴안던 유일무이한 영화적 리듬, 어쩌면 서부극의 마지막 행위, 그것은 분명 영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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