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고 심란하게 만들었던 사건은 일본 동북부의 대지진이다. 그 엄청난 사건을 담은 동영상을 보면서 충격받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대재앙을 겪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영화란 참 별것 아니라는 점이다. 한때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쪽에 마음속 한표를 던지기도 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 앞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듯 느껴진다. 일본에 기반을 둔 소니영화사가 360만달러와 3만대의 라디오를, 디즈니가 250만달러, 워너브러더스가 인도네시아 쓰나미가 등장하는 <히어애프터>의 미국 내 DVD 수익금 100만달러를 기부하기로 하는 등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일본에 대한 구호활동에 나섰지만 이건 세계 2위의 일본시장을 관리하는 차원으로 보인다.
오히려 영화는 이런 재앙을 소비하는 쪽에 속한다. 재난영화나 전쟁영화는 인류가 맞이한 끔찍한 사건을 재현해 전시한다. 대체로 휴머니즘이라는 명분이 붙어 있긴 하지만 이들 영화의 중심 전략은 이 거대한 불행을 스펙터클로 전화시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다. 워너가 3월로 잡혔던 <히어애프터>의 일본 개봉을 취소한 것도 쓰나미 장면이 일본인들의 상처를 덧나게 할지 모른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재난영화와 전쟁영화가 다른 장르에 비해 특별히 윤리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많은 영화가 누군가의 비탄과 고통을 소재로 삼아 소비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문제는 어떻게 소비하느냐인 셈이다. 이를테면 펑샤오강의 <대지진>은 당산 대지진과 쓰촨성 대지진을 소재로 삼지만 지진이라는 재앙 그 자체보다는 한 가족의 비극에 포커스를 맞춘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테렌스 맬릭의 <씬 레드 라인>은 전쟁영화라는 외피를 입었지만 인간성에 대한 깊은 탐구 보고서라 할 만한 영화다.
물론 당연하게도 재앙을 아무 생각없이 소비하는 영화가 더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이클 베이의 <아마겟돈>이다. 이 영화는 행성대충돌이라는 대재앙을 설정해놓고 그 불안감을 이용해 철저하게 단물을 빨아먹는다. 어깨에 힘을 준 채 슬로 모션으로 우주선에 탑승했던 영웅들이 자신을 희생했을 때에도 그닥 큰 울림이 없던 건 그 빤히 보이는 바닥 때문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이 비현실적이고 영웅 중심적인 영화적 상황이 현실에서도 이뤄지기를 바라게 된다. 특히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50여명의 기술자, 그러니까 ‘후쿠시마 50’이 <아마겟돈>의 그들처럼 온갖 고난 속에서도 원전을 다시 안정화시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벤 애플렉과 리브 타일러가 그랬듯, 그들이 마침내 돌아와 가족과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보고 싶다. 우리는 현실이 항상 영화보다 상상력과 생동감이 넘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또한 터무니없는 바람이 아닐 수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도 아주 가끔씩은 위안을 주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