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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영화계의 등장한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다. <짐승의 끝>
김용언 2011-03-16

조성희 감독의 비전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형태의 동화다.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중편 <남매의 집>(2009)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던 어린 남매는 “물 한잔만 마시고 갈게요”라는 남자의 꾀임에 속아 문을 열었다가 최악의 상황에 처한다. 괴한은 ‘햇님 달님’ 전설에서처럼 엄마 옷을 입고 문 안쪽으로 털이 부숭부숭한 손을 내미는 호랑이 같은 존재다. 자기 몸 하나 지킬 수 없는 약한 존재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혹은 알더라도 속아넘어가며 절대 오지 않을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린다. 지난 7년간 공석이었던 미쟝센영화제 대상을 수상했고 전주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 칸국제영화제, 두바이국제영화제 등을 차례로 휩쓸었던 <남매의 집> 이후, 조성희 감독은 장편 데뷔작 <짐승의 끝>으로 돌아왔다.

만삭의 순영(이민지)은 아이를 낳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허허벌판에서 야구모자를 쓴 남자(박해일)가 택시를 세우고 합승한다. 남자는 어딘지 이상하다. 순영과 택시기사의 숨기고 싶은 과거사를 줄줄 읊더니 “10초 뒤에 전기가 나간다. 꽉 잡아”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10초 뒤, 택시는 멈춰버리고 순영은 기절한다.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다. 갑자기 무전기에서 야구모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택시에서 꼼짝 말고 기다려라.” 하지만 순영은 택시 밖으로 나간다. 그녀는 길 위에서 엄마를 잃은 소년(박세종), 경박한 두 남녀, 자전거를 탄 남자(유승목), 택시 기사 등을 차례로 만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의 울부짖음마저 들려온다.

<남매의 집>에서 어린 남매가 꼼짝없이 갇혀 있던 반지하방이라는 밀폐된 공간은 <짐승의 끝>의 황량한 벌판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다. 감독은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종말론의 암시를 계속 흘리며 텅 빈 공간에서조차 폐소공포증을 유발한다. 순영은 태령휴게소에만 도착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지만 그녀가 헤맬수록 휴게소는 멀어지는 것 같다. 지도와 표지판은 오히려 순영을 잘못된 곳으로 자꾸만 이끈다. 휴게소 위치를 알려주는 사람들의 말도 전부 다르다. 이상한 나라에서 ‘나를 마셔요’라는 꼬리표가 붙은 음료수를 무심코 마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앨리스처럼 순영은 그저 미지의 존재가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 태령휴게소라는 게 실재하기나 한 건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물리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은유적인 의미로도 <짐승의 끝>은 보는 내내 일종의 과호흡증을 유발한다. “모두 나를 사랑해, 모두 나한테 빠졌어. 왕자님이 아니면, 손가락이 길고 하얗지 않으면 고백하지 말아주세요.” 울음섞인 목소리로 순영이 처연하게 노래부른다. 그녀는 헤롯 왕의 학살로부터 달아나는 동정녀 마리아, 악마의 아이를 임신한 로즈메리, 외딴 탑에 갇힌 채 마녀에게 이용당하는 라푼첼, 정신없이 사탕을 먹다가 마녀의 노예가 되는 그레텔, 할머니인 척 가장하는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빨간 두건 소녀다. 예정된 운명의 기승전결에 포박된 순영을 지켜보는 건 묵시록의 암울한 예언을 꼼짝없이 응시하거나 (소년이 야구방망이 위에 쓰듯)‘강한 자와 더 강한 자’가 엎치락뒤치락 벌이는 생존투쟁을 바로 곁에서 경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짐승의 끝>에는 음악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이 없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기란 어렵다. 순영이 맞닥뜨리는 물리적인 존재들만큼이나 풍성한 사운드가 스크린의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다.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허허벌판에서 갑자기 조그맣게 지직거리는 소음 혹은 등장인물들이 상대방을 쳐다보면서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는(사실 짐승의 울부짖음보다 이쪽이 훨씬 더 무섭다) 소리들에 신경이 점점 곤두선다. 오감을 집중시켜야만 보이고 들리는 이상한 영화, <짐승의 끝>은 동화이고 SF이고 판타지이고 호러이고 재난영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인 동시에 그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

한국영화사상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품어낸 박해일의 압도적인 매력, 순진한 건지 정신없는 건지 알 수 없게 선의와 악의를 순식간에 오가는 순영을 연기한 이민지, <남매의 집>에서보다 훌쩍 성장했고 놀랍도록 섬뜩해진 박세종, 선량한 얼굴로 순영에게 최악의 시련을 가하는 자전거 남자를 연기한 유승목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21세기 한국영화계에 느닷없이 등장한 놀라운 상상력, 조성희 감독을 계속 지켜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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