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버지의 외투와 모자로 자기를 감싼 <더 브레이브>의 매티. 아직 2월이지만 강력한 ‘올해의 소녀’ 후보다.
2월16일
2010/11 F/W 시즌 소녀들의 트렌드는 명예와 정의구현이다. 안티고네의 환생인 양 아버지의 유골을 기어코 수습한 <윈터스 본>의 리(제니퍼 로렌스)에 이어, <더 브레이브>(True Grit)의 14살 매티(헤일리 스타인펠드)는 부친의 살인범을 제 손으로 잡겠다고 분연히 떨쳐나선다. 출정의 새벽에 소녀가 차려입은 옷가지는 그녀가 막 시작하려는 행위의 목표에 더할 나위 없이 부합하며, 따라서 아름답다. 제 코트 위에 허리를 동여매어 겹쳐입은 아빠의 크고 무거운 외투. 그리고 (원작의 묘사에 따르면) 신문지를 구겨 넣어 머리에 맞춘 아빠의 모자. <아담스 패밀리>의 크리스티나 리치처럼 한올의 난센스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실어 쫑쫑 땋은 머리칼. 그 안에는 가족을 대표한 복수심과 더불어 천국의 법을 실행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사명감이 들어차 있다. 다름 아닌 후자의 동기 때문에 매티는 원수 톰 채니(조시 브롤린)가 아무 데서나 엉뚱한 죄목으로 죽는 그릇된 사태를 참을 수 없다. 반드시 여타 죄목이 아닌 아버지를 살해한 죗값으로 처형당하고 있음을 범인과 세상이 확실히 인지해야만 매티의 사필귀정이 완성된다. 서부극이라는 남성 켄타우로스들이 지배하는 장르에서, 매티는 귀엽게 보일 수 있는 기회들을 뻥뻥 차버리며 조랑말을 달린다. 헤일리 스타인펠드의 연기에는 많은 미덕이 있지만 그들이 귀결되는 궁극적인 원천은 근거를 알 수 없는 배우의 자신감인 듯하다.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온 격식 차린 어려운 단어와 법률용어가 즐비한 조숙한 대사를 공격적으로 쏟아내면서도, 이 소녀는 이완돼 있다. 상체조차 많이 흔들지 않는다(반한 나머지, 내 이름의 영문표기를 그녀를 흉내내어 Hailee로 바꿀까 아주 잠시 고민해보았다).
2월17일
번역 출간된 <더 브레이브>의 원작 <트루 그릿>의 뒷부분을 마저 읽는 중이다. 함축적이고 빠른 대사가 난무하는 코언 형제의 영화는 비영어권 관객이 단번에 감식하기 어려운 두께를 가졌다. 대사가 많고 복잡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자막을 바삐 따르다보면, 일상적인 신의 촬영과 편집이 얼마나 유려하게 구사되었는지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금 먹고 있는 요리가 대단히 훌륭한 음식이라는 사실은 알겠는데 완전히 다 씹어 삼킬 겨를은 없는 형국이다. 이 장벽에도 불구하고 코언 형제가 시전하는 놀라운 재능은 경이로운 각색능력이다. 원작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탁월하게 영화적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더 브레이브>의 경우는, 심지어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도 영화를 보고 나면 소설의 문체를 느끼게 되는 불가사의한 현상이 나타난다. 뒤미처 읽어보는 원작 소설은 그 느낌을 사후적으로 확인해줄 따름이다.
장르를 종횡무진하는 코언 형제의 필모그래피를 허덕허덕 좇아오며 받은 일관된 인상이 있다면, 이 형제가 무척 셈이 정확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코언의 주인공들은 모험의 도정에서 그것이 발가락이 됐든 평생의 신념이 됐든 뭔가를 잃고서야 빠져나온다. 서사 자체가 노골적인 제로섬 게임이었던 <번 애프터 리딩>은 코언의 다른 영화에 잠재된 이 여일한 수식의 축약본이다. 이것은 코언 영화를 휘감고 있는 복잡한 보수성과 연결되는데, <더 브레이브>에서 ‘진정한 용기’로 모호하게 지칭되는 덕목과도 관련있어 보인다. ‘진정한 용기’란 자신이 악해지고 훼손될 것을 알면서도, 때로는 구해주려는 대상이 그로 인해 자신을 증오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하는 마초적인 심리다. 요컨대 <더 브레이브>에서 ‘장부계원’(bookkeeper)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계산 바른 소녀 매티는 코언 영화의 요정이기도 하다. “누구든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하느님의 은혜 말고는 세상에 대가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든 자기만의 힘으로 얻었다거나 자기가 잘나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이 말을 할 때 매티는 범죄자 톰 채니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이 명제는 그녀 자신을 포함한 영화 속 모든 인물에게 예외없이 적용되고 있다. 그러고보면 체구가 작은 매티가 총을 격발할 때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해 뒤쪽으로 튕겨 나동그라지는 장면은 이 영화를 뭉뚱그리는 이미지일 수 있다.
2월19일
베를린영화제에서 호평 받은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 예고편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트레일러 내용보다 동영상 창 아래편의 작은 글씨 ‘경고’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스포일러? 그럴 리는 없고(벨라 타르 영화의 스포일러를 날릴 수 있는 분이 있다면 나는 진심으로 존경할 셈이다) 무려 ‘미니멀리즘 경고’(Warning: minimalism)다. 뜻을 풀어쓰면 “클릭 뒤 아무 사건도 발생하지 않아 일어나는 분노는 전적으로 귀하의 책임입니다” 정도가 되겠다.
2월22일
<만추>를 다시 보았다. 이름을 생각하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배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배우가 있다. (연기의 우열과는 무관하다.) 내게 있어 조지 클루니는 전자, 맷 데이먼은 후자에 속한다. 캐서린 헵번은 전자고 오드리 헵번은 후자다. 탕웨이는 전자를 넘어, 얼굴보다 목소리가 먼저 떠오르는 배우다. 배우의 음성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해보면, <만추>는 ‘복화술’에 관한 영화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훈(현빈)과 애나(탕웨이)는 본인의 감정과 생각을 직접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무관한 이야기나 중립적인 팩트를 진술하되 다만 그 어조와 억양으로 가슴에 웅크린 감정과 생각의 무게만 전한다. 멀리 보이는 다른 커플의 대화를 더빙하는 유희를 벌이기도 한다. 비슷한 구도로 두 낯선 남녀의 조우를 그리는 <비포 선셋>이나 <증명서>가 내밀한 이야기를 유창한 화술로 주고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극중 인물이 속한 문화권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만추>에서 이 복화술의 전략은 얼마나 성공적이었을까? 복화술의 장치가 효과적이라면 진실의 ‘말하기 어려움’을 관객이 절감하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극중 두 남녀는 모르지만 관객에게는 들리는 숨은 사연은 인물을 다루는 연출의 섬세함에 비해 이상할 만큼 상투적이어서 우리를 찌르지 못한다. 슬프고 애절한 이야기인 건 분명하지만, 전형적으로 슬프고 애절한 나머지 ‘아, 그렇군’ 이상의 반응은 무리다. 상당히 긴 시간이 할애된 ‘더빙’ 놀이 장면 역시, 충분히 있을 법한 충동과 일탈의 발언이 없이 상투적인 대화로 채워져 영화가 두 인물의 감정을 앞질러가는 인상을 남기고 만다.
남아 있는 왜소한 질문. <만추>라는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는 느리게 태동하는 감정이 물리적 한계와 마찰해 빚는 긴장이다. 새로운 <만추>는 외박 나온 죄수 애나의 하루를, 이동하는 여행이 아니라 시애틀 곳곳을 거닐며 보내는 머무르는 여정으로 바꿈으로써 풍경이 갖는 중요성을 높였지만 대전제는 그대로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녀가 얼마 동안 그를 기다리는지, 그가 그녀를 만나러 어디서부터 달려왔는지의 문제는 <만추>에서 중요하다. 한데 이상하게도 영화의 편집은 시공의 좌표를 군데군데 헐겁게 놓아준다. 조금씩 새어나가는 시간과 싸우는 초조함은 희미해지고 주요 공간들의 위치와 관계는 아사무사하다. 이 모호함은 결말부 시애틀과 프레스노 사이의 휴게소에서 훈에게 닥친 위기- 그건 모략이었을까? 방어적 기억상실이었을까? 아니면 애나의 꿈이었나?- 를 묘사할 때 훌쩍 커져 영화 후반을 안개로 휘감는다. 김태용 감독은 이 안개를 통해 명료한 하나를 잃는 대신 얻을 수 있는 여러 개의 잠재적 가능성에 이끌렸을 터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