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 렛 미 고> Never Let Me Go (2010)
감독 마크 로마넥 상영시간 104분 화면포맷 2.35:1 아나모픽 / 음성포맷 DTS-HD 5.1 영어 자막 영어 / 출시사 이십세기 폭스 홈엔터테인먼트 화질 ★★★★☆ / 음질 ★★★★☆ / 부록 ★★★
일본계 영국인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현재 영미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소설가다. 간혹 각본가로도 활동하는 그의 소설 가운데 지금껏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단 두편이다. 부커상 수상작인 <남아 있는 나날>을 제임스 아이보리가 영화화한 지 17년이 지난 2010년, 가즈오의 또 다른 대표작 <나를 보내지 마>가 스크린에 올랐다. <나를 보내지 마>는 잔잔한 표면 아래로 거대한 숨결을 간직한 작품이다. 내내 주인공 캐시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그녀가 기억의 바다에서 불러낸 수많은 조각들이 세 인물이 거쳐간 공간과 20여년의 시간 사이로 헤엄친다. 큰 사건 하나 없는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만드는 건 <나를 보내지 마>에 내재한 미스터리의 힘이다. 화자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무엇이 곳곳에 끼어 있고, 그녀라고 해서 언제나 솔직하게 드러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지 마>는 1990년대의 영국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수십년을 오가는 SF소설이다. 가즈오는 인간이 클론을 통해 질병을 극복하고 수명을 연장한 사회를 이미 이루었노라고 가정한다. 외딴 기숙학교 ‘헤일셤’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사실 미래의 장기이식을 위해 복제된 존재들이다. 학생들은 16살 무렵까지 학교에서 지낸 뒤 공동체 조직을 꾸리며 2년여를 보낸다. 그 다음엔 각자 시간의 차이를 두고 기증에 임해야 한다. 학생 때부터 기증, 즉 장기이식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각별한 사이인 캐시, 토미, 루스의 삶도 정해놓은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누구를 사랑했고, 누군가는 누구에게 상처를 주었고,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용서를 빌었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용서했다.
<나를 보내지 마>를 각색하고 영화로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 세 인물은 작은 사건들에 대해 자기 성격에 맞춰 반응하며, 캐시는 다시 그것을 미묘하고 은밀한 시선으로 관찰한다. 그 시선을 통과한 ‘천국과 같은 헤일셤의 나날, 유년기의 순수, 성장하면서 겪는 고통’에 시각적으로 대응하는 게 만만하지 않다. 더욱이 원작이 궁극적으로 다루는 ‘인간의 존엄성, 문명에 대한 비판’을 놓치지 않고 전하려면 대단한 공력이 필요할 판이다. 그러므로 먼저 눈여겨볼 사람은 감독보다 각본을 맡은 알렉스 갤런드다. 그는 대니 보일의 영화 몇편에서 각본을 담당했고 <비치>의 원작을 쓴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가즈오와 오랜 친구 사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소설가들과 달리 가즈오 또한 영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완성된 영화 <네버 렛 미 고>를 본 가즈오는 ‘캐리 멀리건, 앤드루 가필드, 키라 나이틀리의 섬세한 연기가 영화적 풍요로움을 더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는 영화란 원작과 별개의 것임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뮤직비디오계의 거장 마크 로마넥이 뽑아낸 몇몇 이미지는 눈을 떼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다. 그러나 독자의 눈으로 볼 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내 경우, 어쩌면 소설을 다 읽은 다음날 블루레이를 본 게 실수일지 모르겠다. 일부 이야기의 변형은 불가피하다고 쳐도, 심하게 요약된 결과 상대적으로 빠른 전개 속도에 적응하기가 괴로웠다. 관계의 묘사가 너무 직접적인 것도 거슬리는 부분이다. 로맨스에 집중하느라 ‘존재의 성찰’을 극중 품지 못한 게 무엇보다 큰 손실이라 하겠다. 권하기로는, 영화를 본 뒤에 원작을 읽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