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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기록 혹은 흘려쓰기로서의 영화들

에세이 영화 특별전에 관한 10개의 짧은 이야기

0. 2월17일(목)부터 27일(일)까지 극장 필름포럼에서 ‘에세이 영화’ 13편이 상영된다. 이 영화들에 관해서라면 다양하고 꼼꼼하게 써내려가는 유려한 글쓰기가 그 모범이 되겠지만 지금은 상이하게도 매우 간략하고 산만한 방식을 택했다. 사적인 메모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가능할 순 없을까. 그게 당신에게도 자극이 되길 바라면서 쓴다. 그러므로 다소 이상한 이 기사에는 영화의 개별 내용에 관한 설명이 의도적으로 혹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주 제외될 것이고 통일된 형식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며 때로는 지나치게 1인칭일 것이고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무절제하고 걸러지지 않은 생각이 드러나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아직 미완의 메모의 형식을 겨냥한다는 걸 빌미로 양해를 구한다. 이와 같은 사정을 담아 ‘13편의 에세이 영화에 관한 10개의 짧은 사적 메모’를 어쩌다 시작함.

<니스에 관하여>

1. <니스에 관하여>(A propo de Nice, 장 비고, 1930년, 25분)를 촬영한, 사실은 그뿐 아니라 장 비고의 나머지 영화들도 촬영한 보리스 카우프만이 러시아 감독 데니스 카우프만의 두 동생 중 한명이라는 사실은 잘 말해지지 않는 영화사의 일화 중 하나다. 데니스 카우프만이라고 하면 낯설지만 그가 바로 지가 베르토프다. 보리스 카우프만의 묘연한 존재 때문인지(그는 왜 프랑스로 갔을까) 이상하게도 언제인가부터 둘 중 한 영화를 생각할 때 나머지 영화도 같이 떠오른다. 두 영화는 동세대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가 베르토프가 모스크바 등지의 도시 인근을 가속도와 멈춤과 환영을 반복하며 포착하려 하였을 때 장 비고는 관광지로 유명한 니스의 거리의 카페들, 관광객들, 춤추는 여인들, 그리고 날씨를 지극히 운율 넘치는 방식으로 포착한다. 지가 베르토프는 이 도시의 신체를 보고 싶어 하고 장 비고는 이 도시의 속마음을 보고 싶어 한다. 동시대에 살았던 두명의 예술가는 각자의 도시 사색에 최선을 다했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카메라를 든 사나이>)은 영화가 혁명을 위한 초인적 눈이기를 바랐고, 한쪽(<니스에 관하여>)은 영화가 삶을 적시는 시가 되기를 바랐다는 점이다.

<빵 없는 대지>

2. <빵 없는 대지>(Les Hurdes, 루이스 브뉘엘, 1932년, 27분)는 <니스에 관하여>가 나온 지 2년 뒤에 나왔다. 앙드레 바쟁은 수년 뒤 <잊혀진 사람들>에 관한 글에서 <빵 없는 대지>를 언급한다. “가난에 찌든 라스 후르데스 지역 주민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인 <빵 없는 대지>”는 “다큐멘터리의 객관성과 엄숙함으로 환상이 주는 두려움과 강제성을 압도했다. <빵 없는 대지>에서 꿀벌 떼에 먹힌 당나귀는 야만적인 지중해 신화의 숭고함을 획득했다. 이는 피아노 위에서 죽은 당나귀의 모습을 담은 매력적인 장면(<안달루시아의 개>에 나오는 장면을 말하고 있다)과 필적할 만하다. 그래서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음에도 브뉘엘은 무성영화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유성영화가 시작되는 시기 영화계의 위대한 이름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이름과 견줄 만한 인물은 장 비고뿐이다.” 바쟁은 더 쓴다. “진정 중요한 문제는 행복이 존재함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불행해질 수 있는지를 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생각은 라스 후르데스에 관한 기록영화에서 이미 보여진 바 있다.” 이 생각에 공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바쟁이 브뉘엘과 장 비고를 견주고 그리고 브뉘엘의 대표적인 초현실적 영화와 초현실적 착란을 일으킬 만큼 잔혹했던 다큐멘터리영화를 서로 연결하려 한 것은 일종의 변증법적 점화를 위한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3. 세계의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혹은 이 존재와 저 존재를 함께 생각하는 그런 에세이영화. 그런 영화들은 있다고 해도 자칫 잘못하면 자기의 편향적 관점에 매몰되곤 하는데, 실은 편향적인 게 나쁜 게 아니라 권력이 편향을 가장할 때가 나쁘다. 그런 위험에서 한발 빠져나와 눈앞에 놓인 이국의 풍경을 장악하거나 관리하려 들지 않고 말 그대로 바람처럼 공정한 여행자가 되어 사색하는 영화감독이 있다면 그는 누구일까. 크리스 마르케.

3-1. 크리스 마르케에 관한 책 <크리스 마르케: 미래의 기억>을 쓴 캐서린 룹턴은 무모할 정도의 단호한 자세로 “만약 단 한 작품이 크리스 마르케의 마스터피스로 간주되어야 한다면 1982년에 프랑스에서 개봉한 <태양 없이>가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라고 썼다. 그런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태양 없이>

3-2. <태양 없이>(Sans Soleil, 크리스 마르케, 1982년, 110분)는 크리스라는 사람의 편지를 한 여자가 대신 읽어내려가는 형식인데 첫 장면부터 심상치 않다. 여기는 1980년대 초의 일본. 그냥 기차에서 아무렇게나 누워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몇몇 자세를 관찰하며 크리스 마르케는 그 모양새가 어쩐지 2차대전 이후 널려 있는 전시의 시체들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평온하고 한가로운 기차 속 이미지를 단숨에 무서운 전쟁 기억의 환기 장치와 겹쳐놓는다. 평온한 형상들 위에 불러 입히는 잔혹한 기억. 그의 말처럼 크리스 마르케는 평생 기억을 연구한다.

3-3. <가와세 나오미의 서신 교환>이라는 영화가 있다. 40분짜리 이 에세이는 가와세 나오미가 스페인 감독 이사키 라쿠에스타와 주고받는 진솔하면서도 영적인 영상 편지의 묶음으로, 각자의 현재와 기원에 대해 깊이 사색하는 수작이다. 크리스 마르케는 둘이 해야 겨우 가능한 그것을 마치 <태양 없이>에서 혼자 다 감당해본 것은 아니었나 싶다.

3-4. 영화사의 기억의 왕은 누구인가. 알랭 레네와 크리스 마르케, 둘 중 하나가 왕관을 가져갈 것이다.

<인디아>

4. 인도로 떠나기 전날 밤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잔뜩 긴장했다고 한다. 그가 미처 보내지 않은 편지가 훗날 공개됐는데 그 편지의 첫 문장은 “나는 내가 인도로 떠나기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던 걸 기억한다”로 시작한다. 언젠가 태그 갤러거가 쓴 성실하고 창의적이고 그렇지만 너무 두꺼운 평전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모험>을 (솔직히 대강) 읽다가 그런 특별한 편지 한통을 발견했다. 결과적으로 <인디아>(India, 로베르토 로셀리니, 1959년, 90분)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 인생에서 분기점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네오리얼리즘의 위대한 영화감독이자 현대영화의 창시자로 평가받지만 실은 위대한 문명사가 혹은 인류학자의 경지에도 이르고자 했던 감독이다.

<인디아>를 두고 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인디아>는 로셀리니의 가장 풍요로운 시기의 정점이자 그의 최고 마스터피스로 간주될 수 있다. 장 뤽 고다르는 언젠가 ‘세계의 창조’로 이 영화를 설명한 바 있으며 서구인들이 만든 인도에 대한 다른 영화들과 다르게 이 영화는 억측이나 자만으로 비난받지 않을 만하다”라고 쓰고 있다. 로젠봄은 이어서 알랭 베르갈라가 <인디아>에 관해 “몰핑 기법을 혼합한 첫 번째 영화”라고 한 것은 실제로 디지털 몰핑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개념과 구조로서의 몰핑” 즉 “내레이터 또는 캐릭터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것들과 만나고 다큐멘터리가 허구로 혼합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 거라고 추론한다. 처음엔 그냥 평범한 인도 풍경을 담은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인디아>는 각장을 따라 흐르다가 어느새 허구의 주인공이 이미 이 안에 살게 한다. <인디아>의 또 다른 제목은 <인도, 어머니의 대지>인데, 우린 이 영화를 장 르누아르의 <강>과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거짓의 F>

5. 오슨 웰스는 1982년의 한 인터뷰에서 <거짓의 F>(F For Fake, 오슨 웰스, 1975년, 85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 진실과 거짓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다음은 문답의 발췌 요약.

질문: 요즘 웰스의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은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이 소유한 개성 그리고 이야기꾼으로서 그 적수가 없는 기술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거짓의 F>에서 당신은 당신 자신을 사기꾼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답: 맞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사기꾼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그건 완벽한 트릭이었습니다. 그 영화의 모든 것처럼 말이지요. 그건 트릭이었어요.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사기꾼으로 간주하지 않거든요.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기꾼들에 대해 말하면서 젠체하는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서 나도 사기꾼이라고 말했던 거지요. 나는 나를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그것이, 내가 그 사기꾼들보다 어떤 우월한 도덕적 판관인 양 보이는 것을 막아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 영화에 대한 모든 건 트릭입니다.

질문: 또한 이 영화는 멋진 잡동사니의 특질을 갖고 있지요. 제가 말하는 건 뭐냐 하면 이 영화가 다른 자료들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답: (<BBC>의 화면 자료들을 다수 영화에 사용했음을 인정하면서) 내가 <거짓의 F>를 만들었을 때 나는 내가 새로운 종류의 영화를 발견했고 그것이 남은 나의 일생을 하면서 보내기를 원하는 그런 새로운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뭔가 좋은 결과가 나왔구나 생각했어요. 그건 형식이었고, 다른 말로 하면 에세이에요, 개인적 에세이, 다큐멘터리에 반대되면서도 꽤 다른. 그건 다큐멘터리가 전혀 아닌 거지요.

트릭! 어떤 사기꾼 이야기? 참조된 화면들!? 남은 일생 동안 하고 싶었으나 충분히 다 못다 한 그것들…. 웰스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 나는 여기서 끝까지 사기꾼처럼 이 영화의 본색을 말하지 않고 넘어갈 생각이다.

<쇤베르크의 영화 음악 입문>

6. 때때로 장 마리 스트라우브-다니엘 위예의 영화는 일단 그 영화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보는 것이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대신 그들이 다루는 대상에 대해서는 얼마간 알아두는 것이 먼저다. 그러니까 <쇤베르크의 영화 음악 입문>(Introduction to arnold schoenbergs accompanying music for a silent film scene, 장 마리 스트라우브-다니엘 위예, 1973년, 16분)과 <아메리카-계급관계>(Klassenverhaltnisse, 장 마리 스트라우브-다니엘 위예, 1983년, 125분)에는 무지하되 쇤베르크와 카프카에 관해서는 조금 알아두자는 식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준비하고 극장을 다시 한번 찾아볼 생각이다.

이런 방식으로 스트라우브-위예의 영화를 본다면 우린 어떤 지각의 지평을 얻을 수 있을까. 스트라우브-위예는 영화의 한점, 오로지 가장 적확한 하나의 푼크툼이 놓인 영화적 자리와 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그 점을 어디서 찾아내는지 몸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여기서 핵심은 나의 준비된 지식과 예측이 빗나가는 걸 몸으로 느끼는 가운데 그들의 물러서지 않는 한 꼭짓점을 향한 신마다의 물리적 탐색을 다시 한번 몸으로 느끼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이다. 가령 카프카의 <아메리카>의 어떤 문장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할 때 혹은 쇤베르크의 음악을 당신이 잘 안다고 할 때 평생 처음 보는 스트라우브-위예의 영화는 그 순간 그 문장을, 그 음악을, 어떻게 어디에 얼마나 담을 것인가. 문학 작품이나 음악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에 이런 준비가 모두 적용될 것 같지만 그렇진 않다. 이유는 스트라우브-위예만이 유독 그 번역에 있어 철저하게 물리적인 태도를 고수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

7. 이미지의 교육학은 가능한가. 가능하다고들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하룬 파로키의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Image of the World and Inscrption of war, 하룬 파루키, 1985년, 44분)은 명백한 이미지 교육학의 한 종류다. 우연히 상공에서 포착된 아우슈비츠의 지리적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세계 도처에 널린 시각과 시선의 이미지적 매트릭스를 밝혀내는 수업. 나는 영화가 공부의 측면일 때, 영화가 무언가 지식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설 때 그것이 불가피하다 해도 내 것은 아니라는 반응을 보이는 문제아다. 그것이 무식의 소치라 할지라도 그렇다. 다만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은 그 소재의 긴급함 때문에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극장이라는 강의실에 한번 앉아볼 생각이다.

<애국자>

8. 알렉산더 클루게는 하룬 파로키가 가장 존경하는 동료 영화감독이라고 한다. 우린 이 사람을 뉴 저먼 시네마의 맨 앞에 섰던 사람으로 영화보다 책에서 먼저 읽었다. 여기서는 좀 어이없는 방식으로 알렉산더 클루게와 그의 영화를 소개하고 당신을 극장으로 이끌려고 한다. 나는 왜 알렉산더 클루게의 영화를 즐기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 나의 질문이다. <독일의 가을>과 <어제와의 작별> 등은 내게 큰 감흥을 주지 않았다. 알렉산더 클루게의 또 다른 상영작 <애국자>(Die Patriotin, 알렉산더 클루게, 1979년, 121분)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 할 말이 없다.

<감정의 힘>(Die Macht Der Gefuhle, 알렉산더 클루게, 1983년, 115분)은 오페라 장면과 몇개의 법정 또는 진술장면, 극화된 이야기, 각종 미술품 등으로 엮어낸 거대한 콜라주 영화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클루게의 방식은 올바르고 진취적이며 영화적 감정의 표현은 다양하고 장대하다. 그는 쇠를 녹일 것처럼 힘있게 발언한다. 마치 바위에 묻은 먼지라도 다시 살려내어 새로운 우주의 빅뱅을 탐색하겠다는 태도다. 나는 그것이 성실한 지식인의 가장 좋은 도취적 자세인 줄 알면서도 때때로 그의 영화에 깃들어 있는 낭만 없는 이성적 과시성이나 망설임 없는 웅변이 걸린다. <감정의 힘>인데도 감정의 힘에 의지하기보다는 지식이 정련한 감정의 힘처럼 느껴진다. 내게는 직관적이며 때로 막무가내인데다 갑자기 공격적이고 그러다 한없이 감성적인 <고다르의 영화사>(Histoire(s) du Cinema, 1997년, 267분)가 어느 면에서는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렉산더 클루게의 영화는 내게 일종의 배워야 할 숙제다.

<리버풀의 추억>

9. <리버풀의 추억>(OF Time and City, 테렌스 데이비스, 2008년, 74분)에 관해서는 조금 싱겁고 가벼운 농담으로서의 주관식 퀴즈가 가능하다. 문제1. 테렌스 데이비스는 누구인가? 문제2. <리버풀의 추억>은 어떤 영화인가. 문제3. <리버풀의 추억>은 언제 보아야 하는가. 답1. 영국의 유능한 독립영화감독이다. 답2. 테렌스 데이비스의 고향인 리버풀의 모든 것을 소재로 한 성대하고도 웅장한 교향곡 그러나 한편으로는 멜랑콜릭한 시와 같은 영화다. 어딘가 매우 경건한 데가 있다. 답3. 새벽안개가 막 걷히는 이른 아침 또는 매직 아워를 등지고 들어간 뒤 보는 게 좋다. 이건 오답일 가능성도 있으며 극장주 마음이다.

<세상의 모든 기억>

10. 그리고 아직 보지 못한 영화에 관한 단상. 상영작 중 알랭 레네의 <세상의 모든 기억>(Toute La Memoire Du Monde, 알랭 레네, 1956년, 22분)을 본 기억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하긴 며칠 전에는 장 르누아르의 <탈주한 하사>를 처음 본다는 설렘으로 극장에 앉았는데, 첫 장면에서 농부 출신의 왜소한 프랑스 군인이 소가 걱정된다며 집에 가야 한다고 떼를 쓰며 포로수용소를 나가려 하는, 이상하게 코믹하면서도 구슬픈 장면을 보자마자 이 영화를 내가 9년 전에 보았다는 기억이 돌아왔다. 어떤 영화에 대한 기억은 극장에 불이 꺼지고 그 영화의 상영이 시작된 순간에야 돌아온다.

여하튼 나의 작은 하나의 기억조차 사정이 이러한데 <세상의 모든 기억>이라는 이 영화는 과연 어떤 영화일까. 혹은 내가 이미 본 것이라면 어떤 영화였을까. 극장쪽이 배포한 자료에는 “파리에 있는 국립도서관에 대한 짧은 도큐멘터리. 레네는 유한한 개인적 기억과 도서관이 대변하는 세계의 기억을 날카롭게 대비시킨다”고 쓰여 있다. 보르헤스의 도서관을 떠올린다면 당신은 지적인 관객이다. 난 좀 다르게 즐겨볼 생각이다. 최근에 지어졌고 필름포럼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이화여대 내의 한 건물이 파리의 그 국립도서관의 설계자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했으며 파리의 국립도서관을 모델로 지은 곳이라는 걸 들어 알고 있다. <세상의 모든 기억>을 본 다음 그곳에 걸어 들어가 잠시 들러 쉴 수 있다면 그러는 동안 어떤 좋은 생각이 벼락같이 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