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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하리니, 불안도 고뇌도 카오스의 완성을 향한 어떤 집념

대런 애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이 매혹적인 이유는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오래전부터 <블랙 스완>의 연출을 꿈꿔왔다. 마침내 이 영화를 구상한 지 십수년이 흐른 다음 영화는 완성됐고 묘한 매력의 애로노프스키식 발레영화 한편이 우리 앞에 왔다. 당신의 예상대로 애로노프스키의 발레영화는 아름답거나 지고지순하기보다 현란하고 충동적이다. <블랙 스완>은 과연 어떤 영화일까, 그 전모를 알아본다. 한편,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씨와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황혜민씨를 초대하여, <블랙 스완>을 본 발레리나들의 흥미 만점 발레 수다도 마련했다.

<블랙 스완>을 연출한 대런 애로노프스키가 오랫동안 주인을 찾지 못하고 떠돌았던 프로젝트 <울버린>의 연출을 맡기로 했다는 사실이 얼마 전 알려졌다. 동시에 <울버린> 이후의 그의 연출작으로 공표된 프로젝트는 한 기계기술자가 자신의 신체 일부를 티타늄으로 대체하여 기계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머신 맨>이다. 할리우드에서 비교적 자신이 선호하는 소재를 고를 만한 위치에 있는 애로노프스키의 경우, 이 두 영화는 필시 그의 관심의 표명일 것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애로노프스키가 슈퍼히어로를 다룰 때 기존의 수많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주인공과 그의 주인공은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인가.

<블랙 스완>까지의 애로노프스키 영화를 전제로, <울버린>과 <머신 맨>이 둘 다 돌연변이이거나 반인 반기계라는 점을 전제로, 한 가지 막연한 추론이 가능하다. 애로노프스키는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의 신체적 운명에 대해서 혹은 그 정체성의 압박이 주는 심리적 갈등을 상당수 영화의 내용과 표현으로 고려할 것이다. 모든 슈퍼히어로물에 그 질문이 다소간 존재론처럼 붙어 있다 해도, 애로노프스키는 반드시 그 방점을 주인공의 외향적 능력보다는 내향적 갈등쪽으로 옮겨놓을 가능성이 크다. 혹은 그 내면 상태의 강력한 시각화가 그의 목표치다. 그때 그 주인공들의 세계는 대체로 어둡고 그들이 인식하는 세상은 늘 카오스에 가깝다. 얼마 전까지 애로노프스키가 그토록 만들기를 염원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한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던가. 그건 다름 아니라 가장 묵시록적인 슈퍼히어로 중 하나인 <로보캅>이었다. 애로노프스키는 지금 넓은 의미에서 반인반수(반기계) 혹은 신체 돌연변이의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 중이다.

<블랙 스완>, <레슬러>의 자매편

그러니 애로노프스키가 발레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그가 레슬링영화를 만들었을 때의 일만큼이나 이상해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감독에게는 확실히 속내가 있었던 것 같다. “<블랙 스완>은 <레슬러>의 자매편이다. 어떤 사람은 레슬링이 가장 낮은 수준의 예술 형태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발레가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 형태라고 말한다. 그러나 프로 레슬링과 발레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점이 있다. 레슬링 선수를 연기한 미키 루크는 발레리나를 연기한 내털리 포트먼과 아주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두 인물 모두 육체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가이며 부상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두 사람이 가진 유일한 표현수단은 육체인 셈이다. 전혀 다른 두 계통에서 공통적인 이야기를 발견했다는 점이 정말 흥미로웠다.”

이 자매의 외양이 닮아 보이진 않는다. 그들은 단지 태생이 같다. 그들의 태생이란 육체를 전시하는 자들의 혹독한 자기 갈등이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관객을 향해 육체를 상연해 보이고 그를 위해 극한의 훈련을 해야만 하고 환희와 절망을 얻고 그 때문에 정신적 압박에까지 시달려야 한다. 애로노프스키는 별개의 것인 양 보이는 두 극과 극을 이으며 양쪽이 서로 통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다만 전자의 인물은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만큼 리얼하게 찍혔고 후자의 인물은 환시와 환청이 가득한 장면들 속에 있다. 단순히 레슬러와 발레리나가 아니라 ‘퇴물’ 레슬러 랜디와 ‘프리마 발레리나’니나라는 쪽으로 더 들어가본다면, 애로노프스키가 육체라고 말했다 해도 이 두 영화는 육체로 살아가는 자들의 혹독한 불안과 고뇌에 대한 것이 된다. <레슬러>가 반인반수가 된 한 인간의 후일담을 그리고 있다면 <블랙 스완>은 이제 막 반인반수가 되어가는 이야기의 전초전을 펼치려고 한다. 그 때문에 우린 <레슬러>에서 이미 절반은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의 불안을 보았다면 <블랙 스완>에서는 괴물이 되어가는 그녀의 불안을 보게 된다.

니나(내털리 포트먼)는 뉴욕 시티 발레단의 발레리나다. 소극적이고 연약한 니나는 엄마(바버라 허시)와 단둘이 살고 있는데 엄마는 그녀를 인형 다루듯이 한다. 니나가 할 줄 아는 것은 오로지 발레뿐이다. 남자친구도 없고 발레 이외의 생활도 없다. 그즈음 오랫동안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로 활동했던 선배(위노나 라이더)가 은퇴하고 발레단은 <백조의 호수>를 새로운 마음으로 상연하기로 한다. 단장(뱅상 카셀)은 오디션으로 백조와 흑조를 연기할 발레리나를 새로 뽑겠다고 선언한다. 기본기는 가장 뛰어나지만 어딘가 도발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백조는 잘하지만 흑조는 잘 못할 것 같다는 이유로 니나는 탈락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니나와 단장 사이에 있었던 사고가 계기가 되어 니나는 결국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즈음 신입단원 릴리(밀라 쿠니스)가 새로 들어온다. 그녀의 실력은 정교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지만 본연의 마성적인 매력을 갖추고 있다. 니나는 그걸 경계하지만 릴리와 친구로서 가까워지기도 한다. 릴리에 대한 친숙함과 경계심을 오가며 니나는 점차 두려움을 느끼고 한편으론 사방에서 자신을 닮은 도플갱어의 출현을 목격하며 분열의 세계로 빠져든다.

무엇보다 <백조의 호수>였던 것이 중요했다. 애로노프스키가 어느 날 우연히 보러 간 발레극이 <호두까기 인형>이나 <지젤>이었다면 이 영화는 성사되지 못할 프로젝트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 소설 <분신>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면 좋을까 구상 중이던 애로노프스키가 발레극 <백조의 호수>를 보게 되면서, 백조와 흑조를 한명의 무용수가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블랙 스완>은 성사된 것이다. 때문에 <블랙 스완>의 방점은 이 영화가 단지 발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조의 호수>라는 점이다. 그러니 이야기의 구조는 이렇게 완성되어갔을 것이다. <백조의 호수>에서는 백조와 흑조를 한 사람이 하게 된다, 그렇다면 그걸 하는 주인공은 두개의 자아를 가져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그 주인공의 강박이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그 강박을 몰아붙여 본다면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생겨날까, 그리고 그건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일까. <블랙 스완>을 가리켜 <이브의 모든 것>이나 <베이비 제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를 참조할 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일부분 타당하다(<블랙 스완>의 초고는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주연 여배우와 대역 여배우 사이의 사건에 관한 것이다). 이 두편의 영화 모두 배우들의 욕망과 강박관념이 만들어낸 심리적 스릴러이기 때문이다.

“시네마 베리테를 호러 장르에 섞는 것”

이제 <레슬러>에 비교하여 <블랙 스완>의 차별점이 확연히 보이기 시작한다. <레슬러>에는 환각장면이 거의 없다. 랜디가 하룻밤 약에 취해 딸과의 약속을 어기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게 <레슬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아니다. <레슬러>에서 애로노프스키는 그답지 않게 예외적으로 내내 마치 다르덴 형제처럼 영화를 찍었다. 애로노프스키가 종종 말하는 “시네마 베리테처럼” 이라는 표현은 <레슬러>에 잘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황량함은 미키 루크라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육체의 전시, 그 전시를 더 두드러지게 하는 보조적인 시각적 장치들에서 나왔다. 가령, <레슬러>에는 신체적 변형에 대해 두려움 섞인 판타지 장면이 한순간도 없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이미 배우 미키 루크가 반인반수로 변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미키 루크가 등장했을 때 우리가 놀라며 했던 말, ‘사람이 저렇게 변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그 말은 한 인간의 형상이 저렇게 처참하게 변형된 것이 그 어떤 환상보다 더 놀랍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레슬러>는 많은 부분 바로 그 미키 루크의 육체의 형상을 빌려 버티지만 <블랙 스완>은 주인공의 심리적 모티브라고 할 만한 것들이 총동원되면서 그녀의 변신을 고안해낸다.

먼저, 분열되어가는 자아가 등장한다. 니나는 <백조의 호수>를 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얌전한 소녀에 불과했지만 이 발레극을 시작하면서 일종의 불경스러운 성인식을 겪는다. 엄마와의 관계는 틀어지고 그럴수록 엄마는 점점 더 가혹하고 무섭고 소름끼치는 존재가 되어간다. 엄마 역으로 등장하는 바버라 허시는 여기서 등골이 오싹한 연기를 보여준다. 니나는 자신과도 부딪치게 된다. 어디서나 튀어나오는 자신의 분신들, 즉 도플갱어에 시달린다. 도전적이고 마성적인 상대방 릴리의 존재도 니나의 자아분열을 자꾸 재촉한다. 니나는 한편으로 릴리의 자유분방함을 경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혐오한다. 그리고 니나에게는 앞선 프리마 발레리나 선배의 절망적인 현재도 정신적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주인공의 강박관념은 애로노프스키 영화의 강력한 인장이었다. 그는 이것을 영화에 담을 때 꼭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는 주인공을 그려냈으며 실로 그들은 미치광이에 가까워진다. 이런 경우에 애로노프스키는 심리 상태가 즉각적이고 강력한 시각적 장치로 모조리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건 <파이>나 <레퀴엠>에서 이미 드러난 그의 영화적 방식이다. <블랙 스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심리 스릴러를 소형 카메라(슈퍼 16mm)를 들고 찍으니 흥미진진했다. 다른 스릴러영화에서 소형 카메라를 들고 괴물의 시각에서 촬영한 장면이 몇번 나오기는 했지만 이번 영화 같은 경우는 없었다. 이번처럼 전 장면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찍으면 아주 독특한 느낌인 든다. <레슬러>에서 링을 찍었던 것처럼 소형 카메라로 발레장면을 찍으면 무대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카메라가 무용수들과 함께 춤을 추며 돌게 된다.” 그러니까 두 가지 방식이 병행된 것이다. 한쪽으로는 <레슬러>에서 한번 실험해본, 감독 자신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시네마 베리테 방식의 다큐멘터리 촬영법을 유지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파이>와 <레퀴엠>에서 그 극단을 선보였던 짧고 강렬한 클로즈업과 화려한 카메라 무빙 그리고 색감의 대비가 강조되는 것이었다. 애로노프스키는 이걸 두고 “시네마 베리테를 호러 장르에 섞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중에서도 주요하게 등장하는 시각적 장치가 거울이다. “거울은 영화 속 어디에나 있다. 그것들은 무용수의 풍경이다. 무용수들이 훈련할 때 그들은 자신을 끊임없이 거울을 통해 관찰한다. 나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비주얼 모티브가 될 거라는 걸 알게 됐다. 거울은 도플갱어에 시달리는 니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니나는 수시로 거울과 마주하는데 이 시각적 모티브들이 주인공 니나의 주변을 두겹 세겹으로 감쌀 때 그녀의 현실 감각은 상실되고야 만다. 특히나 시각적 장치들이 집약되는 곳은 후반부 <백조의 호수>가 상연되는 장면인데, 니나가 공연일을 맞아 무대에 오를 때, 무대 위의 화려한 안무와 무대 뒤 대기실에서 벌어진 사건이 긴박하게 교차하면서 마침내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박차고 올라간다.

발작과 충동의 끝까지…

<블랙 스완>은 발레를 아름답게 찬미하는 영화가 아니라 발레리나의 강박증을 빌려 혼돈과 혼란에 가득 찬 카오스의 세계를 완성해보려는 기획이다. 애로노프스키가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를 사랑한다며 그의 영화의 영향을 말하는 것에도 그러므로 일리가 있다. <블랙 스완>은 <분홍신>과 같은 발레영화의 전통에 있지 않고 대다수 폴란스키 영화의 심리호러영화의 전통에 더 가까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른바 발레영화로 이름 높은 마이클 포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분홍신>은 발레극 자체를 매우 공들여 촬영했고 배우가 무용을 할 때 그 무대와 배우의 신체를 존중하였으며 컷은 조심스럽게 그 모두를 상연하는 데 바쳐졌다. <블랙 스완>의 발레장면은 다르게 찍혔다. 무대는 여기서 변신과 분신을 위한 환상의 공간이며 자기 혼돈의 극치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다만 영화 <분홍신>에서 주인공이 어떤 선택도 내리지 못하고 마침내 운명 혹은 충동에 이끌려 기차에 스스로 몸을 던져 자신을 망친 다음에야 모든 걸 멈춰 세우는 것처럼, 혹은 원작 <분홍신>에서 분홍신을 신은 소녀가 끝없이 춤을 추어야만 하는 것처럼 <블랙 스완>의 주인공 니나는 쉽사리 멈춰지지 않는 발작과 충동을 끝간 데 없이 몰고 가서 기어이 결판을 내는 인물이다. 그런 게 애로노프스키의 인물이며 그가 매혹된 상황이다. 그러니 애로노프스키도 자신이 신은 영화의 분홍신이 그를 어디까지 춤추게 할지 아직 잘 모를 것이다. 그의 앞으로 남은 반인반수 프로젝트에서 우린 또 다른 니나, 또 다른 애로노프스키의 인물을 보게 될 것인데, 그걸 기대하는 수밖에.

<백조의 호수> 엔딩이 두개라고?

우린 발레극 <백조의 호수> 정도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일까.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3대 발레극이라고 그냥 무심코 외웠던 건 아니었을까. 실은 <블랙 스완>의 감독 대런 애로노프스키도 영화 <레퀴엠>을 만들 당시에나 <백조의 호수>를 처음 보았다고 하니 아직 실망할 때는 아니다. 다음의 공연을 기다리며 예습을 한번 해보자. 차이코프스키는 볼쇼이 극장의 극장주에게서 발레 작곡을 의뢰받아 <백조의 호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전에 이미 조카들을 위해 동화를 바탕으로 한 공연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백조의 호수>는 1877년 초연됐으나 주인공 안나 소베슈찬스카야의 솜씨는 그다지 훌륭하지 않았고 당시는 혹평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훗날에는 발레리나 하면 곧 <백조의 호수>를 떠올릴 만큼 고전 발레극의 대명사가 됐다. 1막. 지그프리트 왕자는 성인의 날을 맞아 축제를 한바탕 벌인 뒤 선물로 받은 화살을 들고 사냥을 나간다. 숲속에서 백조를 보고 뒤따라가게 된다. 2막. 지그프리트는 백조에서 인간으로 변하는 오데트를 보게 된다. 그리고 오데트에게 반해 청혼한다. 하지만 영원한 사랑만이 오데트의 마법을 풀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다음날 있을 무도회에서 그녀와의 결혼을 발표하기로 한다. 3막. 하지만 무도회장에는 오데트 대신 악마 로트바르트와 그녀의 딸 오딜(흑조)이 등장하고 지그프리트는 (버전에 따라 다른데) 오딜에게 반하여 혹은 오딜을 오데트로 착각하여 청혼을 하고 만다. 그리고 4막. 모든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지그프리트가 오데트를 찾아 숲으로 오고 악마도 함께 나타나 결말을 맞는다. 4막의 경우 버전은 보통 두 가지인데, 지그프리트와 오데트가 이승에서 사랑을 맺어 악마 로트바르트의 마법을 풀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버전과, 오데트와 지그프리트가 함께 죽음을 선택한다는 버전이다. 그 밖에도 내용과 무관하게 안무는 각 발레단의 상연에 따라 안무자에 따라 제각각 다르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 <블랙 스완> 중 상연되는 <백조의 호수>의 4막은 이 영화만이 따로 선택한 버전이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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