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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웨이] 안개 속에서 빛의 3일을 살다
김성훈 사진 오계옥 2011-02-18

<만추>의 탕웨이

영화 속 탕웨이의 얼굴은 항상 그림자로 드리워 있었다. 고난의 역사에서 홀로 짐을 떠안거나(<색, 계>(2007)), 시집 가라는 외삼촌의 성화에 억지로 선을 보지만 감옥에 있는 연인을 쉽게 잊지 못하는(<크로싱 헤네시>(2010)) 등, 그간 그가 연기한 인물에게서‘밝은 미소’를 찾기란 쉽지 않다. <만추>에서 탕웨이가 연기한 ‘애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지금까지 했던 역할 중 가장 쓸쓸한 여인인지도 모른다. 극중 애나는 살인죄로 7년째 감옥에 복역 중인 수감자다.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친언니의 전화를 받은 그는 교도소로부터 3일간의 외출을 허락받는다. 가족이 있는 시애틀로 가는 버스에서 애나는 ‘훈’(현빈)을 만나고,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3일을 함께 보낸다. 그러면서 ‘무감각적’인 애나는 ‘훈’에게, 그리고‘세상’에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한다. 마치 시애틀의 눅눅한 안개가 밝은 햇살에 의해 천천히 걷히는 것처럼.

다소 어두운 극중 이미지와 달리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탕웨이는 유쾌했다. 말수가 많진 않았지만 자신의 스타일리스트에게 별 까다로움 없이 대하는, 소소한 그의 모습은 또래의 여배우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의식’이 전혀 없었다. 최근 한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나는 스타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그의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지금부터 탕웨이와 함께 나눈 <만추>와 그가 맡은 역할 ‘애나’, 그리고 연기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공개한다.

-춘절(春節)은 잘 보냈나.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다. =벌써 5일이나 지났다. 중국의 춘절은 한국의 설과 비슷한 기간인 것으로 안다. 어제(2월9일)부터 중국인들은 휴가를 마치고 업무에 복귀했다.

-<만추>를 떠나보낸 지 꽤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 시간이 지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일도 있다. <만추>와의 첫 만남은…. 시나리오 버전이 여러 가지라 버전이 바뀔 때마다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애나는 어떤 여자 같던가. =아무런 표정이 없고, 마음이 텅 비었으며, 마음속 깊은 곳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여자였다.

-애나는 원작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 속 여주인공인 혜림(문정숙)과 전혀 다른 성격의 여자다. 훈(신성일)에게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고, 자신의 머리핀을 빼내어 훈에게 주기도 한다. =원작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혹시 원작을 볼 수 있나.

-필름 프린트가 아직 세상에 발견되지 않았다. 시나리오만 있을 뿐이다. =(원작 시나리오를 탕웨이에게 건네자) 아…. (문정숙을 가리키며) 이 여자가 우리 <만추>의 ‘애나’인 것 같다…. 애나는 지금 <만추>의 애나다. 이 세계에서만 살아 있는 인물이다.

-애나와 달리 실제 탕웨이라는 사람은 매우 활발하다고 들었다. =애나는 현실과 동떨어진, 적막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서 자기만의 적막함을 찾고 있다고, 또 적막함을 따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시나리오를 읽고 애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촬영 전 김태용 감독이 당신에게 ‘애나는 감각이 없는 여자’라고 말했다고. =상상을 해보자. 7년 동안 독방에 갇혀 있던 한 여자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과연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나와보니 세상은 너무나 많이 변해 있고, 동시에 자신만 (세상과) 동떨어져 있고. 그때 그녀는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고,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만 그걸 어떻게 표현하고 말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이는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애나가 조금씩 변한다. 그것도 아주 더디게…. =사람이 어떤 사물을 볼 때 머릿속으로 ‘이건 무엇이다’라고 판단하고 반응한다. 막 감옥에서 나온 애나는 그렇지 않다. 버스며 집이며, 자신에게 생소한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잖나. 그런 것들이 애나의 몸과 머리에 자극을 해도 애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른다. 3일은 애나에게 너무 짧은 시간이다.

-감옥에서 나와 가족을 만난 다음 시퀀스가 떠오른다. 애나는 옷가게에 들러 새 옷을 입고, 귀걸이를 하고,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칠한다. 시간이 잠깐 지났을까, 그런 모습이 거추장스러운지 애나는 화장실에 들러 원래 입던 옷으로 갈아입는다. =변한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감옥에 있을 때 애나의 ‘심장’은 이미 산산조각이 난 채로 잠들고 있었다. 그걸 깨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누가 나를 치면 자연스러운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애나는 맞고 한참 뒤에야 ‘아, 내가 맞았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런 애나가 훈을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그게 영화의 초반부, 훈이 애나의 손에 자신의 시계를 풀어 쥐어줄 때인가. 애나가 훈의 시계를 가짐으로써 ‘애나의 시간이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장면 연기할 때가 기억난다. 훈이 시계를 건네는 순간 애나를 둘러싼 얼음벽이 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묘하게 떨렸다고나 할까.

-그런 감정이 한번에 들던가. =시애틀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안개로 가득한 시애틀의 이국적인 분위기와 낯선 환경이 나를 더욱 낯설게 만들었다. 훈은 갑자기 땅에 뚝 떨어진 천사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훈은 하늘이 애나에게 선물한 천사인 셈이다.

-두 사람이 만나면서부터 시간은 물리적인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특히 두 사람이 시애틀 거리를 함께 걷거나 뛰는 장면은 현실적인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다. =왜냐하면 우리(애나와 훈)는 현실적인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웃음) 애나는 사랑에 버림받고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여자고, 훈은 천사고.

-현장에서 상대역인 현빈과의 관계도 극중 훈과 애나처럼 어색했을 것 같다. =현빈씨와 나, 두 사람에게 시애틀은 이국이다. 게다가 현빈씨는 나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배우다. 감독님, 스탭들도 그렇고. 현장의 모든 게 낯설었다. 지금 기자님과 내가 한국어와 중국어로 인터뷰하고 있잖나. 그런데 우리가 파리에서 우연히 만나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해보라. 지금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느낌과 또 다를 것이다. 낯선 그 느낌…. <만추>에서는 그게 중요했다.

-<만추>는 안개에 젖은 시애틀의 풍경만큼이나 애나의 얼굴이 중요한 영화다. 그런데 극중 애나의 표정은 단순한 무표정이 아니더라. 무표정 속에 나름 미소를 짓고, 화를 내고, 신경질적이고 무심한 것 모두 표현하려고 하더라. =애나의 무표정은 감독님의 설정이었다. 땅을 파야 하는데 아무리 파도 흙만 나오는 느낌이랄까.

-(갑자기 탕웨이가 크게 웃는다.) 왜 웃나. =시간이 한참 지나 다 까먹은 줄 알았는데 지금 어렴풋이 생각난다. 당시 현장에서 감독님께서 요구하신 게 “아무 표정도 짓지 마”였다. 감독님 말씀대로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넌 지금 웃고 있어.” 나는 원래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인데, 아무것도 보이지 말라고 하니까 너무 힘들더라. 그래서 다르게 접근했다. 무표정을 표정으로 표현하자고. (감정을) 숨기라는 감독님의 주문에 따라 부자연스럽게 숨기려고 하는 것이 애나의 얼굴이 되었다.

-어쩌면 김태용 감독은 처음부터 탕웨이라는 사람이 얼굴에 감정이 드러난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배우의 익숙함에서 새로움을 끄집어낸다고나 할까. =언뜻 보면 감독님이 안경을 쓰고 멍하게 있는 것 같지만 그 사이에 사람들을 다 관찰한다. 촬영 전 감독님과 캐릭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등 사적인 것 하나하나 전부 관찰했다.

-역으로 당신 역시 김태용 감독을 관찰했을 것 같다. =상상력이 매우 풍부하고 엉뚱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춤추고 하늘 위로 날아가는 무대장면이 탄생할 수 있지. 그 장면은 내가 <만추>에서 가장 좋아하는 신이다. 아, 극중 훈은 정말 감독님과 비슷하다. 몸매만 빼고. (웃음)

-베이징중앙희극대학에서 연출을 전공했다. 그런 배경이 연기를 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 =학교에서 연기가 아닌 연출을 하는 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린 시절에 경험한 모든 학습 과정이 연기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여느 배우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배운 것들이 전부 쓸모가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역할 혹은 작품에 임할 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끄집어내는 게 중요하다. 끄집어낸 것 중에 확신이 가지 않는 건 다시 쳐내고. 그 안에서 또 끄집어내고 쳐내고. 이 반복이 ‘좋은 연기를 찾는 과정’인 것 같다.

-한 중국 언론에서 중국의 연극연출가 위안홍은 ‘탕웨이는 또래 여배우들과 달리 자기중심이 잡혀 있는 느낌을 준다’고 말하면서 ‘스타라기보다 배우의 느낌이 강하다’라고 평했다. =이제 겨우 서너편 찍었다. <만추>를 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지금은 ‘과연 좋은 배우란 어떤 배우인가’, ‘도대체 좋은 연기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좋은 배우란 뭐라고 생각하나 라고 묻자) 모르겠다. 어쩌면 연기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좋은 연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만추>는 어떤 작품인가. =현빈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나이는 나보다 어린데, 연기 경력은 훨씬 선배더라. 현장에서 그에게 놀라웠던 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훈’이란 어떤 남자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중국에서 <시크릿 가든>을 봤는데, ‘훈’과 또 다르더라. 그때 느꼈다. ‘아, 이 사람은 자기 안에서 새로움을 찾아가는 사람이구나.’ 김태용 감독님도, 나도 마찬가지다. 세 사람이 시애틀에서 만나 같은 자세로 작품을 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만추>가 내게 그런 작품이다.

-차기작은 진가신 감독이 연출하고 견자단, 금성무와 함께 출연하는 <무협>이다. 장철 감독의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독비도)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알려진 것과 달리 <무협>은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와 관계가 없다. 촬영 첫날, 원래 시나리오를 현장에서 다 버리고, 전혀 다른 이야기로 찍었다. 촬영은 지난해 10월에 완료됐고, 올해 극장 개봉할 예정이다.

-다음 작품은 정해졌나. =여러 작품 제의가 들어왔는데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대화를 나눠보니 실제 성격은 알려진 대로 발랄한 것 같다. 누구한테 물려받은 건가. =엄마와 아빠? (웃음) 내 실제 성격의 많은 부분은 그분들에게 물려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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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크업 Arris Law·헤어 박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