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혹시 다시 시작할 때 도와줄 사람들이 있는 도시가 있나요? 맥브라이드 글쎄요, 우린 샌프란시스코를 좋아해요. 보스턴도 좋아요. 아는 사람이 좀 있거든요. 뉴욕이나 시카고도 좋고 애틀랜타도 괜찮죠. 메리 뉴멕시코는요? 앨버커키는 어때요? 맥브라이드 앨버커키요? 앨버커키에 진짜 누가 살긴 해요? - <인 플레인 사이트> 시즌1 에피소드7, 배치할 도시를 가려내려는 메리와 증인과의 대화
누구나 과거는 있다. 자랑스럽고 화려해서 돌아가고 싶건, 부끄럽고 궁상맞아서 지우고 싶건, ‘옛날의 나’는 모두에게 존재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게 만들어요”라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대사는 로맨틱한 동시에 사람의 성취와 감정에는 기준이 될 만한 과거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예리하게 짚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한 사람의 과거는 현재의 그를 만드는 재료가 되고, 소리없이 자라나 그 뒤를 따르는 그림자가 된다. 그런데 그 그림자를 지워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쩌다 운없게 범죄현장을 목격한 무고한 시민 또는 너무 많은 비밀을 알게 된 범죄조직의 내부자가 그 주인공들이다. 검거할 현장이나 뚜렷한 물증이 없는 경우에 검사는 신뢰할 만한 증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범죄자를 기소한다. 그런데 증인의 말 한마디에 옥살이가 결정되니 재판 전까지 그 목숨이 안전할 리 없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증언을 하려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리하여 재판을 지키기 위해 정부에서 마련한 대책이 바로 증인보호프로그램이다. 그리고 개똥밭에서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생존본능을 가진 사람들은 프로그램에 들어간다.
증인보호프로그램은 자신의 삶에 만족했던 사람일수록 적응하기 힘들 ‘이승의 개똥밭’이다. 과거의 나와 완전한 작별을 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함께한다면 고생도 나눌 수 있겠지만, 혈혈단신으로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경우는 가족, 친구 등 지인과의 연락을 일체 끊어야만 한다. 직업도 그렇다. 정부에서 끝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지는 않기에 첫 6개월의 적응기간이 끝나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과거와 연관이 있는 직업은 가질 수 없다. 그때 곁에서 계속해서 프로그램에 남아 안전하게 생존하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바로 증인보호프로그램을 실행하는 US마셜(미국 연방보안관)의 조사관들이다. 과거를 지우고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조사관이니, 증인들에게 이들은 새 인생의 첫 친구인 셈이다.
나쁜 여자? 거친 여자?
미국 케이블 네트워크 <USA>에서 방영하는 <인 플레인 사이트>는 증인보호프로그램의 조사관으로 일하는 US마셜 메리 섀넌(매리 매코맥)이 주인공인 TV시리즈다. 앨버커키의 조그만 사무실에 3명의 보안관이 상주하며 각자에게 배치된 증인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정착을 돕는다. 한데 그 돕고 보호하는 정도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증언을 대가로 약속 받은 시민권을 위해 이민국에 가서 싸워주는 것은 기본이고 포르노 잡지를 함께 넘기며 유방확대술에 적합한 가슴모양을 골라주는 것, 가짜로 여자친구 노릇을 하는 등 아주 특별한 보모가 되어야 하는 고충이 따른다. 수사물의 형식을 따르는 터라 증인의 신분이 발각되어 위험에 빠지는 상황도 종종 전개되고, 보안관들은 동분서주하며 증인을 구해낸다. 증인들에게 메리가 첫 친구였던 것처럼 메리에게 그들은 보살펴야 하는 가족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메리에게는 알코올 중독인 엄마와 트렁크 한가득 코카인을 들고 집으로 찾아온 여동생 브랜디(니콜 힐츠)까지 골칫덩어리 진짜 가족도 있다.
그런데 순순히 보모가 되기에 메리는 너무 특별하다. 에둘러 말할 방법이 없는 강력한 떡대를 소유한 35살의 결혼할 생각도 없는 메리는 어쩌다 남자들에게 섹시하다거나 예쁘다는 칭찬을 들으면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입술을 샐쭉거리며, 무관심인지 무신경인지 모를 감정으로 주변 이성의 관심을 차단한다. 게다가 매사 불만이 많다. 미간에 ‘나는 행복하지 않다’라고 쓰고 다니는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다. 같이 일하라고 하면 정말 피하고 싶은 캐릭터다. 그래도 메리에게 정말 뭔가 특별한 게 있기는 한 모양이다. 보안관 사무실의 두 남자 스탠(폴 벤-빅터)과 마샬(프레데릭 웰러)은 메리의 그 오만방자한 태도와 변덕, 퉁명스러운 언사를 일상처럼 받아내면서 딱히 불만도 없는데다가, 간혹 연모하는 것처럼도 보이니 말이다. 게다가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야구선수 라파엘(크리스티안 드 라 후에르타)은 메리에게 결혼하자며 컵케이크 속에 약혼반지를 넣어 선물한다.
정말 후하게 마음을 먹고 찾아보면 발견되는 한 가지 장점은 그녀가 워커홀릭이라는 사실이다. 메리가 워커홀릭이 된 이유는 7살 때 동생과 엄마를 남겨두고 떠나버린 아버지 때문이다. 아버지는 떠난 뒤에도 몰래 메리에게 편지를 보내 소식을 전해왔고, 메리는 ‘내가 열심히 살면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붙들고 ‘그때까지 나는 행복해지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살아왔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가족은 나의 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 상냥하거나 온화할 리 없다. 그럼에도 메리가 때때로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거추장스러운 가식을 치워버린 담백한 솔직함 때문이다.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그 자리에서 쏘아붙인다.
<인 플레인 사이트>는 2008년 할리우드의 작가들이 단행했던 작가조합의 대규모 파업을 기적처럼 피하며 데뷔해 2011년 네 번째 시즌을 준비 중인 <USA>의 효자드라마다. 사실 이 드라마는 수군거림 속에서 출발했다. 당시 <TNT>에서 방영해 인기를 얻은 <클로저> <세이빙 그레이스>의 히로인들과 비슷한 터프한 여자 수사관 캐릭터를 내세운 ‘미투 전략’이라 별볼일 없을 거라는 의혹이었다. 커리어는 훌륭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안되는 여자들이 주인공이라는 점은 비슷하다. 그런데 <인 플레인 사이트>의 메리는 ‘여자’라는 꼬리표를 거부하는 것처럼 생생하고 거칠다. 여자의 강함은 종종 ‘드세다’고 표현되는데, 메리는 드세다기보다는 루저(loser)에 가깝다. 재미있는 점은 이른바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해”라는 드라마적인 설정이 성별이 바뀌어 적용되는 점이다. 남자들은 자석에 끌리듯 마성의 메리에게 끌리지만, 스스로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메리로 인해 상처받고 결국 떠나간다.
유난히도 특징없는 도시에서
<인 플레인 사이트>라는 제목은 ‘뻔한 곳에 숨기다’라는 영어 표현 ‘Hide in plain sight’에서 가져왔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앨버커키가 사람을 숨기기에 좋은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인 플레인 사이트>의 증인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면 앨버커키에서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뒤 1년도 채 되지 않아 지역 유지와 약혼한 전직 사기꾼 트리나가 지역 신문에 결혼 소식을 사진과 함께 실었을 때, 메리는 새로운 지역에 재배치해야 한다고 흥분하지만 트리나는 쿨하게 한마디 한다. “여긴 앨버커키잖아요? 세상에, 고등학교 교지 발간부수가 여기 신문보다 많겠어요.” 시즌3까지를 통틀어 앨버커키를 좋아한, 아니 싫어하지 않은 증인은 한손에 꼽힌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인 플레인 사이트>의 앨버커키가 도시의 매력을 발산하는 순간은 별로 없다. 멕시코와 마주한 접경지역임에도 이국적인 매력은커녕 꼭 앨버커키일 필요가 없는 에피소드가 대부분이다. 네이티브 아메리칸을 등장시키거나 매년 가을에 열리는 ‘국제 열풍선 축제’ 등을 언급하는 등 지역 정보를 드러내는 건 파일럿에서가 전부였고, 앨버커키가 가진 사회적, 문화적 인장은 일부러 숨긴 듯 찾기 힘들다. 한데 이렇게 유난히도 특징을 내세우지 않은 덕분에, “뻔한 곳에 무난하게 섞여 들어가야 생존할 수 있는” 증인보호프로그램과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사실 100% 현지에서 촬영되기 때문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화면 그 자체로 무대를 각인시킨다. 듬성듬성 선인장이 솟은 사막과 내리쬐는 태양, 심어서 기른 것처럼 도시 가운데 밀집한 빌딩숲, 도시의 남북을 가로지르는 리오 그란데 강, 낮게 솟은 산디아 산맥이 미국 특유의 넓은 하늘과 어우러져 이미지로 장소를 증언한다. “여기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