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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 스크린 속에서 대신 말할게요
이영진 사진 백종헌 2011-02-11

<혜화,동>의 유다인

유다인은 ‘말’을 자꾸 먹었다. 시시한 질문을 던지면 눈은 ‘그럴 줄 알았다, 그래 답해주지”라고 말하면서도 입은 “음…”에서 그쳤다. 누군가의 전언처럼 그저 말 주변이 없어서라면, ‘음’ 뒤에 ‘그러니까’ 혹은 ‘뭐였더라’ 등과 같은 사족이 응당 달라붙어야 하는데 그러질 않았다. 여러 번 듣다보니 유다인의 ‘음∼’은 허밍처럼 들리기도 했다. 말을 뱉기 전에 말을 입안에서 굴렸다. 침묵이 어색하고 또 참을 수 없는 건 물어보기 바쁜 쪽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유다인은 적절한 대꾸인지 아닌지를 입안에서 수십번 곱씹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슬그머니 삼켜버렸다. 사진 촬영을 위해 잠깐 인터뷰를 멈춘 사이 어느샌가 와 있던 <혜화,동>의 민용근 감독에게 물어봤다.

“왜 뽑았어요?” “말이 없어서요.” “말이 없어서요?” “현장에서 괴롭혀도 불평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실제로도 그랬어요?” “운명처럼 받아들이던데요.”

1년 전, <혜화,동>의 촬영현장에 간 적이 있다. 옷을 두텁게 껴입었는데도 으슬으슬 추운 날이었다. 유다인은 그날 유기견을 잡으려다 되레 자신이 케이지에 머리가 끼는 장면을 찍고 있었다. 카메라는 철창 안 배우의 눈동자를 단박에 잡아내진 못했고, 유다인은 무릎 꿇고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여러 번 바둥거려야 했다. 계속되는 테이크, 유다인은 손이 빨개지고 코가 빨개진 다음에야 허리를 폈다. 그 장면 촬영을 끝내고 나서 유다인은 그 흔한 한숨 한번 안 쉬고 조감독에게 곧바로 물었다. “다음 장면은요?” <혜화,동>을 보고 나서야 1년 전 철거촌 촬영현장에서 처음 봤던 유다인의 또렷하고 야무지고 차분한 인상이 떠올랐다. “혜화는 힘들어도 힘든 내색하면 안되거든요.” 촬영을 끝내고 나서 스탭과 배우들과의 회식자리에서 들었던 유다인의 한마디도 뒤늦게 생각났다. 어쩌면 혜화를 규정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 유다인은 <혜화,동>의 혜화를 아직까지 제 마음속에 두고 더 보듬어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혜화(들)의 마음을 위해

영화 속 혜화는 동물병원에서 일하며 유기견을 돌보는 씩씩한 20대 여성이다, 라고 말하기엔 사연이 많다. “우리 아이 살아 있어.” 절룩거리는 발로 찾아온 한수(유연석)가 던진 한마디에 혜화는 틈나는 대로 자르고, 또 꽁꽁 봉해뒀던 과거의 상처들과 대면하게 되고, 조금씩 흔들린다. 중요한 건 ‘조금씩’이다. 10대에 미혼모가 된 혜화, 자신이 낳은 아이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연인과도 이별해야 했던 혜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20대의 혜화, 그리고 불쑥 찾아온 과거 앞에서의 혜화. <혜화,동>의 혜화는 한명이 아니다. 혜화를 갖고 싶은 건 배우로서 당연한 욕심이었지만, 혜화(들)를 표현하는 건 배우로서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현장에서 모니터 보면서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큰일났다. 나 정말 못하는 것 같은데’ 그랬어요. 표현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하는 사람은 (팔을 벌려) 이만큼 표현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모니터에서 보면 요만큼밖에 안되거든요. (감정을 뽑아올리는) 시간도 (다른 배우보다) 더 오래 걸리고. 심지어 강아지들보다 더 못할 때도 있었어요. (웃음)”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연기 잘했다고 상까지 받았지만, 유다인은 민용근 감독 덕분이라고 공을 돌린다. “제가 아쉬운 부분을 ‘샥샥샥’ 편집해주셨어요. 음악으로 감정을 더 크게 만들어준 장면도 있고, 과하다 싶으면 잘라서 눌러준 부분도 보이고. 영화 후반부에 혜화가 나연의 얼굴을 씻어주는 장면이 있는데, 촬영하면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그랬어요. 오죽하겠어요. 그런 생각하면서 찍었으니.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전 분명히 감정을 못 만들어냈는데, 카메라가 들어오는 속도랑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랑 혜화 주변의 소품이 혜화의 감정처럼 보였어요. ‘휴, 다행이네’ 했지만 감정을 딱 잡고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싶긴 하죠.” 물론 이건 다 엄살이고 겸손이다. “이거, 이거, 이거, 이 새끼, 이거, 체육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한수의 손톱에 하트를 그리다 말고 발길질을 하는 혜화, “왜 난 아니에요?” 결혼한다는 선배를 빤히 쳐다보면서 생뚱맞은 질문을 던지는 혜화, 입양된 아이를 납치하려다 마음을 바꾸고 고개를 떨구는 혜화, 유다인은 다른 표정, 다른 목소리의 혜화(들)를 놓치지 않고 따라간다.

많지 않은 연기 경험에도 불구하고 유다인이 혜화(들)를 오롯이 담아낼 수 있었던 건 혜화에 대한 간절함 때문일 것이다. 혹은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는 혜화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드라마 <청춘예찬>의 주인공을 하고 나서 꼭 1년을 쉬었어요. ‘내가 잘 못했구나’ 하면서 쉬는 시간이 힘들었죠. 힘들면 집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에 올라가고 그랬어요. 그러다 <혜화,동> 시나리오를 봤는데 위안이 됐어요. 민용근 감독님을 만났을 때도 꼭 해야겠구나 싶었어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시는데 따뜻한 느낌들이 좋았어요. 정작 감독님이 “왜 혜화를 하고 싶어?” 물어봤을 때 “혜화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죠. 마음속 이야기를 다 할 수도 없었고, 해봤자 이해시킬 수도 없을 것 같았거든요.” 두번의 미팅으로 같이 하자고 했던 민용근 감독은 그때까지만 해도 유다인에게 무모한 내기를 건 셈이었다. “걱정되셨는지 촬영 전에 독백집을 주셨어요. 혜화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다가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 때문이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하루는 감독님 앞에서 감정을 보여야 했어요. 물론 잘 안됐죠. (웃음) 달랑 혼자 서서 연기를 해야 하는데….”

할까 말까… 소심한 애드리브

촬영현장에선 “참고 기다려 준” 민용근 감독만큼 두살 어리지만 연기로는 선배인 유연석의 도움도 컸다. “마지막 울음 터지는 장면이 걱정이 됐죠. 현장 가면 잘되겠지 하면서도 과연 잘될까 싶었고. 그날은 한수가 많이 도와줬어요. ‘너, 나한테 왜 그래. 나 겨우, 겨우 참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 울음이 터졌거든요. 그런데 클로즈업이잖아요. 감정은 터졌는데 얼굴은 구겨지고. 나도 모르게 손도 올라가고. 테이크가 계속되니 감정은 점점 줄고. 한수가 내 앞에서 ‘어떻게 해줄까, 어떻게 해줄까’ 안절부절못하더니 쓱 보니까 내 앞에서 울고 있는 거예요. 그걸 보니까 다시 감정이 났죠. (웃음)” <혜화,동>을 유다인이 각별하게 생각하는 건 “스탭들이 평소 좋아하는 간식을 몰래 차에 가져다주는” 등 주연배우라고 챙겨줘서가 아니라 주연배우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실컷 맛볼 수 있어서다. “강아지 똥 치우면서 ‘많이도 쌌네’ 뭐 이런 대사를 하는데. 그 장면의 대사들은 시나리오에 없어요. 사실 대사 만들어서 연기할 용기가 전엔 없었거든요. 이 상황에서 안 맞을 거야, 지레 겁먹었죠. 그날 좁은 방 안에서 스탭들에게 빙 둘러싸여 연기하느라 좀 창피했는데 눈 딱 감고 하고 나니 이것도 괜찮네 싶은 거예요.”

유다인은 촬영장에만 가면 유난히 “허기가 졌다”. 그래서 밥도 꼭 두 그릇씩 챙겨 먹었다. 배고파서 배고픈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았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고 무기력했던” 고등학생 시절, 교문 앞에서 받아든 매니지먼트사의 명함 한장으로 시작된 배우의 길은 “운도 따랐지만” 그만큼 시련도 많았다. <건빵선생과 별사탕>(2005)에서 “이름도 없는 단역이었다가 한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발탁되는” 행운을 누리고, 한 커피 광고에선 “선배, 나 열나는 것 같애”라고 칭얼대며 “유다인이 누구야?”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정작 영화에선 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솔직히 <신데렐라> <맨데이트: 신이 주신 임무> 등에 출연한 유다인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혜화,동>은 유다인의 데뷔작이라고 불러도 좋다. <혜화,동>의 편집본을 본 <의뢰인>의 제작진이 극중에서 살해당하는 아내 서정아 역할을 선뜻 맡긴 것만 봐도 그렇다. “이제 두 장면 찍었어요. 아직 장혁 선배님이랑은 카메라 앞에 서보지도 못했어요. 저 스트레스받으면 살이 좀 빠지는데 지금이 딱 그 시기예요.” 좀더 배우의 길을 가다보면, 그래서 “황정민, 류승범처럼 카메라 앞에서 마구 날아다닐 수 있게 되면” 유다인이 인터뷰 때 속엣말까지 털어놓으며 뒤통수칠 여유도 갖게 될 거다. 그때까진 스크린의 복화술만을 들으며 기다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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