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가 갤러리를 내밀한 취향으로 채우고자 하는 열망에 대해 말하자면 모든 영화평론가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그것과 한통속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들은 ‘영화제’라는 이벤트에 기대어 이러한 욕망을 채우거나, 시시때때로 자신을 매료시킨 영화의 리스트를 열거하며 허기를 달랜다. 그리고 아주 희귀한 경우라면 취향을 드러내는 영화를 찍기도 한다. <카페 느와르>는 영화제를 통해, 간혹 베스트영화 목록을 갱신해가며 이런 평론가의 욕망에 충실했던 정성일이 이례적으로 ‘연출’에 투신한 영화이다. 그의 만연체 문장처럼 길고 장황한 ‘2시간78분’의 <카페 느와르>는 문학과 영화, 지정학적 장소의 미학, 기독교주의, 심지어 발리우드 퍼포먼스의 흥취를 오가는 종잡지 못할 카오스이다.
정성일이 영화를 만든다고 할 때 솔직히 나는 그의 도전이 이해되지 않았다. “프랑수아 트뤼포와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가 있다고, 가까운 일본만 해도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가 평론가를 거치지 않았느냐”고 그는 반문했지만 평론가가 감독이 되는 것은 여전히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이 지면을 위해서는 아니지만 <카페 느와르>를 보고 나는 정성일을 만났고,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만나자마자 그는 “병원씨가 올 줄은 몰랐어요. 그냥 영화만 보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라고 말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말처럼 그냥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본 뒤, 또 이 영화에 대해 쏟아져 나오는 다기한 감상과 견해를 접한 뒤 할 말이 생겼다. 결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카페 느와르>는 내게 근자에 정성일이 쓴 평문보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냥 넘기기 섭섭한 이 영화의 쟁점들을 건드려보기 위해 쓰여졌다.
서울에 대한 지정학적 탐구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정성일의 비극적 로맨스는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 크리스마스이브에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기구할 팔자의 음악교사 영수(신하균)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부녀 연인 미연1(문정희)에 의해 영수가 차갑게 버려지는 것으로 영화는 열린다. 실연의 장소는 서울천년타임캡슐이 저장될 남산한옥마을의 콘크리트 바닥이다. 이 시간의 저장고에서 가롯 유다처럼 자신을 부인하는 연인으로 인해 상심한 영수는 그녀를 되찾고자 고투를 벌이지만 역부족이다. 영수에게는 사랑을 맹세하는 또 다른 미연2(김혜나)가 있으나 그가 순정을 준 여인은 미연1뿐. 낙심한 사내는 이태 전 괴물이 출몰했다는 한강으로 스르르 걸어들어간다. 그 급작스러운 투신의 리듬을 타고 2단원이 시작된다. 그제야 이제까지의 이야기가 이후에 드라마의 서곡이 될 것임을 암시하듯 대뜸 제목과 크레딧이 뜬다. 2단원에서 영수는 청계천을 헤매는 또 다른 여인 선화(정유미)에게 끌린다.
1774년의 프랑크푸르트(<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와 1848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백야>)를 소환하여 2008년의 서울에 이입하기로 한 이 두 갈래 플롯의 태피스트리는 시공의 좌표 축 사이를 어지러이 오가며 서로를 마주본다. 명확하게 연결되지 않는, 어찌 보면 무관해 보이기까지 하는 액션의 라인들이 이정표를 상실한 영수의 발걸음마냥 섞이는 것이다. 참조 삼았다는 두편의 문학작품과 별개로 1단원과 2단원의 차이를 보여주는 요소들은 여럿 있다. 1단원은 카메라의 움직임이 완곡하게 자제되고 있으며, 강박적으로 대칭적인 구도로 화면을 가른다. 2단원으로 넘어가면서 각 인물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감에 따라 감각적으로, 신체적으로, 스타일적으로 역동적인 움직임의 기운이 승하다. 이를테면 한산한 야간의 거리를 달리는 메신저 은하(신수진)의 오토바이 질주, 한밤의 청계천 변을 따라 이동하는 영수와 선화의 걸음, 카페에서 흐드러지는 선화의 춤사위 따위.
누차 지적되었던 것처럼 <카페 느와르>는 문학과 영화의 범례들에 대한 논평을 숨기지 않는다. 문학과 영화의 합일을 꿈꾼 로베르 브레송의 대기획, 르누아르풍의 자연주의,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를 상기시키는 하늘을 잡은 숏의 반복과 애상적 정조의 <엘리제를 위하여>, <라탈랑트>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중 결혼장면, 오즈의 조형적 유사성에 의거한 편집,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텔지아>, 스트라우브-위예의 구성적 형식미학까지, 모두 헤아려지지 않을 흉내의 목록이 표면을 도포하고 있다. 문학과 영화, 음악, 회화, 성서를 종횡무진하는 인용과 레퍼런스로 기워진 <카페 느와르>를 평론가 출신 감독의 영화적 편력이 과시된 이식과 교양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여기서 영퀴를 할 생각은 없다. 짝사랑과 그에게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정신적 사랑을 다룬 고전 텍스트들을 끌어들인 다시 쓰기로서 이 영화를 조명할 생각도 없다. 그렇다면 이 감상적인 사랑의 엘레지 뒤에 감춰진 작가의 진의는 무엇인가?
<카페 느와르>는 밝은 눈으로 시대를 읽어내는 지정학적 텍스트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정성일은 문학적 레퍼런스로 손쉽게 환원될 수 없는 엄정한 스타일을 구사하는데, 이 영화에서 그가 빚진 게 있다면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라기보다 발터 베냐민이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더 확장한다면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더 유익하리라 생각된다. <카페 느와르>에서 정성일의 관심사는 모더니티라는 당의정을 입힌 서울의 풍경이다. 불과 몇년 사이 상전벽해를 이룬 서울의 도시경관은 한국 현대사를 관류하는 근대화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요즘 저잣거리에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도시의 외경을 선진과 진화의 바로미터로 치환하는 ‘망국적’ 졸속의 기획. <카페 느와르>에서는 여전히 이 저개발의 기억에 묶여 있는 도시경관 프로젝트들에 정면으로 맞서보고자 한 결기가 느껴진다. 환언하면 <카페 느와르>는 20세기 파리의 도시경관에 매료된 베냐민의 메트로폴리탄적 욕망에 견줄 만한 21세기 서울의 아카이브 기획이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베냐민이 광휘에 찬 파리의 모더니티에 매혹된 반면, 정성일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 가짜와 인공의 조형물로 얼기설기 기워놓은 서울의 모더니티에 몸서리친다는 것이다. 이는 중대한 차이이다. 정성일은 이 땅에 임재한 참담하고 불길한 징조들을 멜랑콜리한 치정 로맨스 위에, 그리고 문학사의 전범들 위에 슬쩍 얹어놓았다. 양피지에 휘갈긴 이 겹쳐쓰기가 적절한 맥락화에 기초한 것인지를 시비하기보다 엇나간 짝사랑의 멜로드라마가 서울에 대한 지정학적 탐구로 전환되는 방식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흥미롭다.
안토니오니와 에이젠슈테인의 그림자
21세기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을 조망하는 베냐민적인 기획으로서 <카페 느와르>는 서울의 조형에 대한 영화이다. 재건과 중건, 복원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된 허구적 근대화 프로젝트에 대한 지정학적 고찰을 통해 정성일은 서울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조형물과 거리를 공간(space)이 아닌 장소(place)로 다룬다. 공간이란 지점적 위치로서 특정한 자리들이 맺는 수평적 관계에 의해 의미 맥락을 획득하는 반면, 장소는 한 지점 또는 자리에 층층이 새겨진 역사성에 기초해 그 수직적 관계를 성찰하도록 이끈다. <카페 느와르>에서 정성일이 그려 묘사하고자 하는 것은 쌓이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이곳의 청산의 역사, 상실된 ‘장소성’(placeness)이다.
도시경관의 스펙터클에 대한 이 영화의 시각화 전략을 읽기 위해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를 갖다붙이는 것보다 선행해야 할 일은 시각적 컨셉의 기원으로서 안토니오니적인 건축 디자인을 말하는 것이다. 가짜 모더니티에 홀린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인간과 세계의 내면 풍경으로서 경관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형상화된다. 삭풍한설의 서울을 소요하는 영수의 발걸음만큼이나 <카페 느와르>는 도시 자체가 주인공인 영화이다. 옛것을 허물고 새것을 건설하겠다는 갱신의 다짐은 망집에 가까운 이 도시의 모토다. 딴에는 재건축 또는 복원, 아니면 복구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고 다시 지어지면서 서울은 환속적인 디자인의 캔버스가 되어간다. 메트로폴리스의 엠블렘 같은 마천루의 위용과 퇴락한 과거의 유물, 흉물스럽기는 어느 것이 더하거나 덜하지 않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카페 느와르>는 망령의 도시가 되어가는 서울에서 구천을 떠도는 유령들이 교차하고, 서로를 알아보며 연대를 도모하는 이야기라고 봐도 좋다.
1단원과 2단원에서 반복 등장하는 인물들(영수, 선화, 영수의 어머니, 카페녀, 김상경)은 죄 유령들이다. 장소에 깃든 혹은 그곳을 떠도는 인물을 보여주는 방식은 일관되어 있다. 그들은 전통가옥의 잔해와 네온, 변화하는 도심의 스카이라인에 에워싸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서울천년타임캡슐사업에 동원된 타임캡슐의 형상처럼, 군림하는 모더니티의 유물들에 의해 짓눌린 압살의 이미지. 장소들의 지정학적 관계는 사실적 고증을 따른다. 이를테면 도입부 정윤의 가족이 탄 자동차가 남산한옥마을에서 한남대교로 향하는 시간, 영수는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타워에 오른다. 한옥마을에서 국립극장 앞을 지나 한남동, 한남대교로 이어지는 자동차의 궤적은 영수가 위치한 남산타워를 감싸안고 진행된다.
유달리 실재하는 장소의 현장성에 공을 들인 로케이션을 통해서 보증되는 것은 서울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남산타워의 편재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서울을 굽어보는 남산타워의 다양한 형상은 주의 깊은 프레이밍을 통해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미연의 남편이 최초로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는 남산타워를 병풍 삼아 서 있고, 정윤과 친구가 난간에 기대어 행복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강 유람선에서 영수가 투신한 직후, 영수의 주검을 붙들고 어머니가 섧게 곡을 할 때, 눈 내리는 정윤의 학교 건물 뒤편에, 햄버거 소녀가 남자친구를 만나는 성당의 예수상 너머에 남산타워는 어김없이 버티고 서 있다. 혹자는 <극장전>의 남산타워를 연상할 수도 있겠지만, 홍상수의 남산타워가 인물의 반복적인 궤적에 대한 기하학적 꼭짓점 역할을 한다면, 정성일의 남산타워는 지정학적 맥락으로 거기에 삽입되었다. 말하자면 홍상수와 정성일의 남산은 지리적인 좌표와 지정학적 좌표로 갈린다. 영화에서 질리도록 반복되는 남산타워와 청계천의 함수관계. 지정학적 맥락에 따라 두 장소의 관계는 여기서 시간의 심도를 갖는다. 근대화의 아버지로 추앙되는 박정희의 유산으로서 남산타워와 박정희의 서얼쯤으로 위치지어질 수 있는 MB의 치적(?)으로서 청계천이 공명하는 것이다. 부수고 다시 짓는 건설공사에 의해 이런 흔적들은 사라진다.
컬러와 흑백, 삶과 죽음, 죽음과 부활…
도시경관에 대한 시각화 방식과 쌍을 이루는 것은 몽타주적인 사고이다. 심지어 <카페 느와르>는 영화 전체가 에이젠슈테인적인 충돌 몽타주 방식에 기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카페 느와르>가 도시경관을 보여주는 방식은 1단원에서는 몽타주이지만, 2단원에서는 무한히 길어지는 고다르적인 트래킹숏이다. 1단원에서 서울은 조각조각 절개된, 그래서 어떤 연속성이나 조화도 찾아볼 수 없는 부유하는 조형물들의 집산지처럼 몽타주된다. 기하학적으로 얽힌 고가도로와 대한문, 공사용 바리케이드가 쳐진 광화문 대로, 폐허의 집터, 복원공사 중인 숭례문, 위압적인 마천루의 숲, 남산타워, 독립문, 국회의사당, 한강의 몽타주. 이 충돌적인 몽타주를 뒤따라 “이렇게 그냥 계속될 순 없어요”라는 미연의 대사가 이어지는데, 그녀의 선언적 읊조림은 도시를 폐허로 만드는 건설공사의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서의 표제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어지는 2단원에서 우리는 건설과 복원의 기치에 밀려난 시간을 본다. 잘리지 않은 실제 시간으로 기록된 하염없는 롱테이크에는 금속상가와 조명상가, 광장시장, 문 닫은 재래식 극장이 줄지어 도열해 있다. 대개 그들은 셔터가 내려진 폐점 상태이다. 현재의 역숏으로서의 과거는 낡고 쇠잔한 건물들이 운집한 청계천의 맞은편이며, 그곳에 놓인 건 가짜 모더니티에 밀려난 천변풍경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청계천 역시 근대화의 미명하에 지옥 같은 노동이 관행화된 장소(전태일로 대표되는 청계천)였다. 이로부터 한 차원 깊이 시간을 굴착해 들어간 청계천의 대과거는 흑백의 기록 사진으로 보여진다.
몽타주적인 충돌과 관련해 특별히 주목할 것은 인물과 그들을 감싼 세팅의 관계이다. <카페 느와르>의 작중인물들은 구체성을 결여한 추상적 관념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그들은 역사와 뿌리를 드러내지 않는 안개 속의 존재들이며 실제적, 역사적 인간이라기보다 인위적으로 구성된 관념에 가깝다. 괴테와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정성일이 빌려오고자 한 것은 예술 일반에 통용되는 캐릭터의 타입, 환언하면 ‘전형’이다. 영수의 외양은 중학교 음악교사이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서울의 공기에 질식되어 죽음에 이른 다른 희생자(들)처럼 걸어다니는 관념이다. 카메라는 영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좇지만 영화가 끝난 뒤에도 우리는 그의 실체를 완전히 본 것 같지 않다. 사랑의 대상을 잃은 영수의 상실감, <극장전>이 틀어지고 있는 DVD방에서의 오럴섹스, 질투에 신음하는 손에 들린 망치 따위를 보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보았다고 하기는 망설여진다.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오프닝을 장식하는 햄버거 소녀도 관념의 덩어리이다. 영수의 죽음을 대가로 삶을 얻는 그녀는 기독교적 관념의 조형이다. 한국사회의 집요한 부계적 전통과 결부된 미연의 남편 역시 근대화를 관장해온 철권적 독재자이자 파시즘의 표징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추상화된 관념의 구현으로서 인물들이 지극히 현실적인, 흡사 다큐멘터리적인 질감으로 표현되는 서울의 조형 속에 놓인다. 이외에도 <카페 느와르>에 놓인 충돌적 구성의 일례들은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컬러와 흑백, 삶과 죽음, 죽음과 부활, (카메라의) 정지와 움직임, 수직과 수평, 전경과 후경, 숏과 숏의 충돌이 완고하고 집요하게 쓰인다. 관념과 관념, 관념과 현실을 하나의 장(長) 속에 배열함으로써 정성일은 충돌의 이물감이 텍스트의 표면을 떠다니게 만든다.
감독의 삶을 얻는 평론가
서울의 모더니티를 성찰하고 있다고는 하나, <카페 느와르>는 모던 시네마의 주류적 계보학에 집어넣기는 어색한 영화다. 도리어 정치적 모더니즘의 한 갈래로서 지정학적 미학을 개척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장르적으로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소재인 젊은 남자와 유부녀의 일탈 심리를 다룬 멜로드라마인데다 조화와 합일을 거부하는 해체적 구성으로 일관하고 있다. 영화의 1단원은 속류의 인상마저 풍기는 통속적 치정드라마지만 정성일은 불륜이라는 패덕을 저지르고도 죄책보다 상실에 빠지는 부도덕한 인간으로 영수를 비난할 수 없도록 만든다. 전통적인 내러티브의 사건 전개 방식을 따르지 않는 <카페 느와르>에는 아름답지만 지나치게 많은 장면들이 우겨넣어진 느낌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재림을 둘러싼 성서적 우화로도 영화는 읽힌다. 2단원의 부활을 통해 영수는 그리스도가 되어간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타인의 불행에 동정적이 되어가는 그는 1단원에 비해 관대하고 이타적이다. 골고다의 예수 수난을 상연하는 연극에서 부활은 보는 자의 몫으로 남겨지지만, 정성일은 재림한 예수의 형상과 궤적으로 영수의 두 번째 삶을 이끈다.
기독교적 구제의 스토리로서 <카페 느와르>를 읽을 때, 말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우악스럽게 햄버거를 밀어넣으며 신의 기호를 간구하는 수태한 소녀의 존재이다. 이 소녀의 잘 드러나지 않는 여정을 따라 이 영화는 재구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갈급한 심정으로 삶을 호소하는 가련한 소녀의 궤적을 따라가보자. 1단원의 처음과 2단원의 마지막, 그러니까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이 소녀는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순간 홀연히 출몰한다. 이를테면 횡단보도 앞에서 정윤 가족의 교통사고를 목격하는 것은 그녀이며, 미연2가 박해일을 닮은 남자(윤희석)를 만난 뒤 서울랜드 코끼리열차 안에서 목격하는 것도 매몰차게 뿌리치는 소년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이 소녀이고, 영수가 한강에 투신하기 전 유람선에서 머리에 손을 얹는 소녀 역시 그이다. 계기적 순간마다 프레임 한구석에 스며드는 수태한 소녀, 종래에는 <카페 느와르>가 이 동정녀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삶과 구제의 이야기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수는 궁극적으로 그녀의 삶을 구제하기 위해 한강에서 걸어나왔고, 남산타워로 향하는 케이블카 안에서 소녀는 갱생을 다짐하는 것이다.
여하튼 <카페 느와르>는 할 말이 많은 영화이다. 정성일이 레퍼런스들의 이합집산 이상을 겨냥했을지라도 인용된 장면들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보는 이의 마음은 거의 마비 지경에 이른다. 그러므로 교양과 취향의 다양성이 한 텍스트 안에서 적절하게 다스려지고 있는가는 여전히 검토되어야 할 문제들을 남긴다. 그러나 이 영화가 텍스트의 완결성이나 통일성이라고 하는 고전적인 개념을 위반하려는 충동의 소여라는 점은 기억될 필요가 있다. 이미 쓰여진 텍스트의 해체와 풍요한 재구성을 시험해 보이는 영화로서 <카페 느와르>는 흘러간 시간과 그 흔적이 말소되어가는 장소의 지정학을 겨냥하고 있다. 정성일은 미끈해 보이는 메트로폴리스의 광채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매끄럽게 포장된 모더니티의 표면과 카메라의 장구한 도로여행은 공허한 모더니티에 대한 냉랭한 응시와 겹친다. <카페 느와르>가 말하려는 것은 문학이나 사랑, 구원만이 아니다. 정형을 파괴하는 구조와 너른 참조의 목록, 완만하고 노곤한 템포의 스타일, 관념적인 대사, 강박적으로 대칭적인 구도와 반복되는 요소들을 통해 이루려는 것은 동시대적 삶의 지정학적 위치짓기이다. <카페 느와르>가 21세의 서울의 묵시록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뿐더러 이러한 테마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정성일의 야심은 예상보다 훨씬 광대하다. <카페 느와르>가 하나 이상의 방식으로 말해져야 하는 중층결정의 영화라는 점에서 이것은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곳곳에 자기 탐닉이 어른거리기는 하지만 이렇게 영화를 만들기로 한 결정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죽어도 죽지 않을 것”임을 공표하는 소녀의 다짐처럼, <카페 느와르>는 감독으로서 정성일의 또 다른 삶이 시작되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