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의 연례행사인 올해의 베스트 영화 목록에 가장 넣고 싶었던 작품 중 하나가 <이층의 악당>이었다. 손재곤의 이 인상적인 문제작은 장르성에 대한 깊은 오해로 인해 평가절하된 측면이 있다. 시장에서도 해피엔딩을 맞지 못한 이 영화의 불운을 그냥 넘기기에는 섭섭하다. 좀체 한데 섞이기를 꺼리는 듯한 이종적 요소의 접붙이기가 인상적인 처녀작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재능을 입증한 손재곤은 여기서 단일한 장르의 틀로 요약될 수 없는 다층적 혼성영화의 범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다. 나는 <이층의 악당>이 단조로운 구조로 환원되기 십상인 장르의 알고리즘에 대한 전복 또는 관습의 응용을 통한 재창조의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전작을 넘어설 뿐 아니라, 2010년에 나온 중요한 한국영화 목록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몇 가지 타입으로 요약되는 유습화된 장르영화들의 틈새에서 능란한 어휘의 구성적 재배열로 종래의 장르 질서를 유린하는 이 영화의 해체적 재구성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이창> <서울의 달>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순혈주의적 시각에서 평가한다면, <이층의 악당>은 오리지널리티를 팽개친 교묘한 모작의 혐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삶의 목표가 희미하게 이를 데 없는 염세주의자 모녀 앞에 불쑥 나타난 수상한 세입자 창인(한석규)과 이 수상한 사내와의 관계에서 싹튼 로맨스라는 설정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류의 미망인 로맨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예적인 신체 개그가 컨베이어 벨트처럼 이어지는 연쇄 폭발은 버스터 키튼식의 슬랩스틱, 로맨틱코미디의 원형이라 할 스크루볼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재담 퍼포먼스, 카 체이스로 웅변되는 액션의 클리셰, 진땀나는 긴장을 조성하는 역설적 서스펜스가 현란하게 교차된다.

뿐인가. 당최 조화의 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들이 기거하는 이층집을 의혹의 눈초리로 주시하는 이웃집 여인의 존재는, <씨네21> 783호에서 안시환이 지적했던 것처럼 히치콕의 <이창>에서 구현된 관음증의 재현이며, 주인공 창인이 애절하게 탐문하는 청화용문다기는 그 모습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 텅 빈 기표 또는 맥거핀이다. 여러 장르를 한편의 영화로 섭렵한 듯한 인상을 남기는 <이층의 악당>에서 히치콕의 영향력은 강력한데, 손재곤이 <너무 많이 본 사나이>라는 히치콕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한 문제작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한국 최초의 패러디영화로 알려진 <재밌는 영화>의 각본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또한 이상한 게 없는 일이다.

여하튼 버무리기 쉽지 않은 다양한 요소들을 솜씨 좋게 접붙이기한 손재곤의 응용력은 한국영화계에서 보기 드문 종류의 재능이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을수록 어느 것 하나 제대로인 게 없기 십상이지만, <이층의 악당>은 각 장르의 핵심 요소들에 담긴 진의와 그것을 통해 도달하려는 쾌감에 십분 근접해 있다. 요컨대 이 영화는 탐정 장르와 로맨스, 코미디, 서스펜스, 액션이 한 지붕 아래 얼기설기 엮인 텍스트이다. 창인과 연주(김혜수)가 나누는 한밤의 로맨스는 급작스럽게 서스펜스로 갈아타고, 아슬아슬한 탐문의 서스펜스는 슬랩스틱 적 활력이 넘치는 신체 개그로 이어지며, 아기자기한 실내극에서 격렬한 카 체이스로 스케일을 옮겨 다니는 식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물의 제시와 성격화도 특별하다. 손재곤이 구축한 인물의 배경은 현실 속에 있지 않고, 그것을 배태한 또 다른 텍스트 안에 있다. 이를테면 <이층의 악당>의 남녀주인공 창인과 연주는 선재(先在)하는 텍스트에 구현된 캐릭터 이미지의 ‘겹쳐쓰기’를 보여준다. 감독 자신이 말한 바대로 창인을 연기하는 한석규에게선 즉각적으로 <서울의 달>의 홍식의 이미지가 겹친다. 남을 등쳐먹는 사기꾼이자 제비 기질이 다분하며, 파멸에 이르는 야망의 화신이기도 한 미워할 수 없는 악당. 잘 알려진 대로 <이층의 악당>에서 한석규와 김혜수 커플의 권력 구도는 뒤집힌 <닥터 봉>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르의 클리셰들이 그 원래적 맥락을 상실하거나 재설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재곤의 인용은 오마주의 의미보다 논평적 재구성에 가깝다.

그렇다면 원전에 대한 다시 쓰기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근원적으로 원 텍스트를 다시 쓴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원전의 모티브와 세계관, 표현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원래적 의미와 가치는 퇴색했으나 그 안에 새로운 담론화의 잠재력이 잔존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담론화의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면 그 가치는 적지 않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인 개념들을 혼합하는 패스티시(혼성모방)의 모델은 해석과 창조의 상호보완적 관계에서 성립된다. 하나의 미학으로서 패스티시는 서로 다른 좌표상에 놓인 근사치의 요소들을 혼합함으로써 다른 공간들 사이를 매개하는 기능을 제공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두개의 좌표에 대한 조직자의 이해 능력과 깊이 결부된다. 즉 취해진 소스와 그것이 어디에 투입될 것인가를 매개하는 개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슬랩스틱과 서스펜스의 재배열

<이층의 악당>의 가치는 다양한 소스에서 발췌된 요소들을 재료를 창조적으로 뜨개질하는 능력에서 찾아진다. 때때로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모방 미학의 한 갈래로 설명되는 패스티시에 의지하는 동기는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의도적이거나 과시적이다. <이층의 악당>에서 손재곤은 불현듯 다른 이야기와 공유할 수 있는 무한한 수의 면들을 만들어가면서 외연을 확장한다. 이들이 어디서 어떤 형태로 접속하느냐에 따라 창조적 해석이 가능하다.

<이층의 악당>이 활용하고 있는 혼성 분석의 과정은 명백히 이미 쓰여진 텍스트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수반한다. 남의 것을 그저 탐하기만 하는 도둑질을 초월한 패스티시의 존재가치는 장르와 이야기에 대한 화석화된 관념을 확장하여 참신한 방향으로 재설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주관적인 텍스트 공간이 상호작용하고, 절개되었다가 다른 맥락으로 재통합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층의 악당>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서울의 달>의 이질적인 접합을 시도하는 것, 그리고 슬랩스틱과 서스펜스 히치콕적인 맥거핀을 혼용하는 것은 거죽의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맥락으로의 재배열을 통한 구별된 인식을 가능케 한다. 당신이 청화용문다기의 존재를 좇는 데 정신이 팔린다면, 필연코 어떤 함정에 빠질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연주 모녀가 보물의 존재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 카메라가 지붕으로 솟으며 보물의 모습이 휙 지나가지만, 이 기만적인 서사의 핵심 모티브는 누가 보물을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벌이는 각축전에 있지 않다.

서사의 목표와 욕망을 희롱하는 <이층의 악당>의 성취는 삶의 아이러니에 대한 풍자의 예리함에서 찾아진다. 가장 흥미로운 아이러니는 보물찾기를 위해 홀로 집에 남겨져야 하는 창인의 미션에서 비롯된다. 창인의 미션은 신경쇠약과 불면증으로 고통받는 연주, 사춘기를 통과하며 성장통을 앓고 있는 성아(지우)를 동시에 집에서 내모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어설픈 악당의 곤경은 연주의 가중되는 우울증과 왕따에서 비롯된 성아의 낙담으로 당최 해소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악당의 근심은 날로 깊어지는데, 풀이 죽은 그녀들이 집에서 나갈 생각이 점점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발한 아이러니의 힘이 도출된다. 영화에서 가장 웃기는 장면 중 하나는 생의 의지를 상실해가는 이 모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분투하다가 초죽음이 된 창인이 “그래도 출근은 해야지”, “학교는 가야 한다”며 저들에게 삶의 희망을 부추길 때다. 아이러니하게도 보물을 찾아야 하는 악당의 미션은 모녀의 절망적인 삶을 교정하지 않고는 성취될 수 없다. 악당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악행을 위해 선행을 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이처럼 <이층의 악당>의 패스티시 전략은 장르의 정체성에 대한 창조적인 사고에서 추출되는 아이러니에 있다. 그것은 계산적인 전략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영화와 장르의 개념 안에 이미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영화는 절개된 요소들의 구성과 재배열, 편집과 짜깁기를 그 본성으로 하지 않는가 말이다.

악당의 모의가 모녀의 삶에 서광을

<이층의 악당>에 대한 장르 규정도 제각각이다. 많은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대로 이 영화는 코미디의 문법에 충실한가? 아니면 탐정 장르 또는 서스펜스의 기운이 우세한가?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내리기 곤란한 만큼 손재곤은 하나의 장르에 고착되는 텍스트의 전통으로부터 달아난다. 자신의 역사를 가진 인물(<서울의 달> <닥터 봉>의 한석규)들은 재조합인 동시에 새로운 자리에 기입되어짐으로써 갱신된 차원을 얻는다. 희망을 주는 악당의 이야기인 이 영화에서 대담하게 즐겨 사용한 혼성의 알고리즘 모델은 이처럼 이접적인 요소들의 분리와 재통합을 수행한다. 이 의미상으로 무질서하고 주제상으로 모호한 이야기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새로운 질서로 재편된 이야기의 요소들을 원전과 견주어 능동적으로 접수할 필요가 있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류의 미망인 로맨스 플롯, 히치콕적 서스펜스, 키튼적 코미디로 이어지는 장르의 지류들이 모였지만, 이 의식적인 짜깁기에는 독립적인 텍스트로가 구비해야 할 요건, 이를테면 새로운 이야기와 참신한 주제, 형식적 완전성이 깃들어 있다. <이층의 악당>에서 손재곤은 자신이 숭배하는 원전과 얼마만큼 가까운가라는 사소한 유사성의 유혹에 시달린 흔적도 드러내지만, 다시 쓰기를 통해 화석화된 장르에 활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감각적으로 입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