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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하] 꽃중년의 가면 벗고, 진짜 나를 보여줄 때
이화정 사진 백종헌 2010-12-31

<황해>의 조성하

<황해>는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과 김윤석, 하정우의 만남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옌볜에서 서울, 울산, 부산까지 전국을 종횡하며 쫓고 쫓기는 이 거대한 추격전의 중심에는 또 다른 중요 역할이 존재한다. 조성하가 연기하는 버스회사 사장 ‘태원’은 <황해>의 사건을 일으키는 비극의 씨앗이자 <황해>를 읽는 숨은 키워드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의 정조, <욕망의 불꽃>의 영준에게서 보아왔던 모든 고품격 이미지는 일면에 불과하다. 조성하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밑바닥까지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연기로 태원을 완성한다. 조성하밖에 할 수 없는 연기, 나홍진 감독은 말한다. “다른 배우들이라면 모두 김윤석 선배처럼 하려고 들었을 거다. 고정관념을 탈피한 배우가 필요했다. 그래서 반드시 조성하여야만 했다.”

-기자시사 당일 아침에 영화가 완성됐다. =내가 출연한 영화인데 그렇게 긴장될 수가 없었다. 마치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이 들더라. 처음엔 완만하게 출발하고 딸깍딸깍딸깍 가더니, 바다를 건너고 술렁임이 있다. 그 뒤부턴 순간 확 터지면서 그대로 밀어붙인다. 롤러코스터가 가장 높은 지점으로 올라가 떨어지는 순간, 영화도 끝을 맺는다. 이만한 에너지가 없다. 끝나고 나서야 겨우 릴렉스되더라.

-<황해>의 숨은 키워드는 ‘태원’이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한 기술은 피하겠지만 태원은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데다 영화의 폭발력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활약한다. =처음에 나홍진 감독이 100억원 규모 영화의 주연 세명 중 한명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고민이 되더라. 내가 과연 이 정도까지 해낼 수 있는 공력이 되었나에 대한 자문이었다. 물론 설레기도 했다. 태원을 연기할 수 있는 좋은 배우들이 산재해 있는데 내게 그 기회가 주어졌다니 말이다. 김윤석과 하정우라는 두 배우에게도 손색이 없는 연기를 해야겠다는 부담과 다짐이 동시에 들더라.

-악으로 뭉친 면가(김윤석)와 현실에 희생당하는 구남(하정우)이 캐릭터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면, 폭력배를 거느린 사장 태원은 가장 복합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캐릭터다. =쉽게 생각하자면 한없이 쉬워지는 캐릭터가 태원이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만큼 복잡한 캐릭터도 없다. 나홍진 감독이 처음에 태원을 설명해주는데, 버스회사 운영, 조직도 있고 가정도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얘기만 들어보면 건달이지만, 건달이 아닌 사람으로 이 인물을 표현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렇다고 평범해서도 안되는 캐릭터라는 거다. 어떻게 풀어나갈지가 숙제더라. 결국 나홍진 감독과 함께 태원이 위치한 그 경계를 찾아야 했다.

-촬영 자체가 무한 연장됐던 작품이다. 올해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과 지금 출연 중인 <욕망의 불꽃>까지 스케줄도 만만치 않은 해였다. 어떻게 소화했나. =촬영이 끝난 게 11월 중순이 지나서다. 고생이야 물론 하정우씨가 가장 많이 했다. 처음엔 지난 12월에 시작했으니, 3개월쯤 찍고 올 2월에 촬영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5월이 되고 7월이 됐다. 마지막 버스종점 장면은 비 때문에 촬영을 쉬면서 무려 33일 동안 찍은 장면이다. 여름엔 끝나겠지 하면서. 그때 <성균관 스캔들> 스케줄을 조절하면서 <황해>를 병행했다. 그러다 막바지엔 <욕망의 불꽃>까지 겹쳤다. 다행히 세 작품 모두 잘됐다.

-바쁜 일정 덕에 조성하라는 배우를 대중적으로 알린 해이기도 하다. =드라마 <황진이>에서 황진이의 스승 역할로 방송을 시작했고 <대왕 세종>에서도 세종의 스승으로 출연했다. 반응은 좋았지만, 나를 알릴 정도로 파장이 큰 건 아니었다. 그러다 올해 들어 <성균관 스캔들>을 만나 젊은 팬이 생기고, <욕망의 불꽃>으로 나이 지긋한 여성 팬까지 확보했다. 살면서 가장 많은 닉네임을 하사받기도 했다. ‘따도남’(따뜻한 도시 남자)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꿀성대’, ‘꽃중년’ 등으로 불렸다. 목이 두껍다고 ‘레고성하’라고도 하더라. 팬레터를 받아보는데 눈물이 다 나더라. 유독 바쁜 해가 있게 마련이다. 내겐 올해가 그런 해다. 더군다나 <황해> 때문에 올해는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해야 할 해이기도 하다.

-팬들에겐 아직 추진력과 지혜를 두루 겸비한 <성균관 스캔들>의 정조의 이미지가 유효하다. 고정적이고 틀에 박힌 캐릭터로 치부되던 ‘왕’ 역할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성균관 스캔들>의 최대 수혜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다. 젊은 주인공 넷과 마지막에 같이 붙지 않았나. (웃음) 왕 역할은 배우들에게 기회가 잘 돌아오지 않는데, 얼떨결에 내가 왕 역할에 캐스팅됐다. 작가분 말씀이, 원래 연기는 전부터 보고 있었고 어느 정도 어울리겠다 싶었지만 그렇게 완벽하게 본인이 생각하는 왕의 이미지를 그려줄 줄은 몰랐다며 감사하다고 하더라. 덕분에 나도 용기를 많이 얻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라는 이미지엔 저음의 깊게 울리는 목소리가 주는 믿음이 컸다. =아무래도 목소리에 대한 평가가 가장 컸던 것 같다. 최근에 불교방송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데 내레이션을 부탁하더라. 짧은 줄 알고 갔더니 두 시간이나 되는 분량이더라. 작가분이 <성균관 스캔들>을 너무 좋아해서 아예 나를 염두에 두고 대본을 썼다더라. 나도 내 목소리를 내리 여섯 시간 들은 건 처음이다. 아무리 좋은 소리도 듣다보면 좀 힘든데, 이상하게 내 목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편해지는 거다. (웃음)

-대놓고 하는 자화자찬이지만 인정하겠다. 전문 성우를 해도 문제없었겠다 싶을 정도다. =안 그래도 군대 갔다 와서 성우시험을 봤다. 그런데 3차에서 떨어졌다. 면접 전날 사람들의 유혹에 빠져 술 잔뜩 먹고 알코올 냄새 풍기면서 시험 보러갔으니, 심사위원들이 곱게 볼 리 없었을 거다. 당시 시험에 도전한 건 성우라는 직업이 연극을 하기 위한 생활의 방편이 되겠다 싶어서였다. 연극이란 게 생활이 보장된 직업이 아니다. 그런데 내 꿈은 연극이고, 무대에서 연기를 하려면 비슷한 범주의 고정적인 아르바이트 거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좋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연극배우에 대한 꿈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 당시엔 절실했던 거다.

-고등학생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으니 연기경력이 꽤 된다. 같이 공부한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 동기들에 비하면 다소 늦게 빛을 본 거다. =인터뷰 때마다, ‘연기경력 10년차’라고 써달라고 할 때가 많다. 그전에 뭐했냐고 하면 막상 할 이야기가 없는 거다. 권용운, 김정균, 정은표, 표인봉 등이 동기들이었는데 다들 재능도 엄청나고 개성이 강한 친구들이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게, 난 고등학생 때부터 늘 무대에서 주인공을 해왔다. ‘저 친구도 하는데 나라고 왜 안돼. 하다보면 언젠가 나도 인정받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마음 수련이 대단하다. 조급하지 않은가보다. =원래 성격이 낙천적이고 급한 게 없다. 그래서 집사람이 싫어한다. (웃음) 한번 호되게 그걸로 혼난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책임감을 가지고 앞으로 가족에게도 떳떳한, 보탬이 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영화로 눈을 돌리게 된 것도 처음엔 그래서였다. 대중적으로 알릴 수 있는 매체로 영화를 택한 거다. 출발은 그런 단순한 마음이었다. 첫 작품으로 박경희 감독님의 <미소>를 하면서 새로운 시각이 생기더라. 연기에 대한 각오도 다지게 되고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실리적인 이유에서 출발했지만, 주로 저예산영화에 출연해왔다. 사실 대중적인 영화는 <황해>가 처음인 셈이다. =덕분에 ‘영화제용 배우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웃음) 긴 시간 동안 대중적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그 자체로도 보람이 있었다. 그 작품들을 보고 방송국에서도 섭외를 해주고 다른 감독과도 인연이 닿았다. 한 작품 한 작품 모두가 또 다른 감독을 만나서 성장하고, 더 좋은 연기를 보여줄 기회가 된 것이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에서 폭력과 협박으로 똘똘 뭉친 ‘박석호’나 사형제도를 부활시키는 계기가 된 <집행자>의 악랄한 연쇄살인범 ‘장용두’가 그간 영화에서의 캐릭터를 설명해준다. 드라마에서 보여준 품격있는 이미지와 달리, 영화에서의 캐릭터는 대부분 악역에 치중해왔다. =의도라기보단 내게 그런 면모가 있나보다. 어떤 감독은 날 만나고 나서 살아 있는 내 눈을 봤다더라. 저 눈을 가지고 어떻게 멜로연기를 할까. 사이코패스 눈인데, 라더라. (웃음) 방송에선 나를 정신적 스승이나 로맨틱한 멜로 캐릭터로 만들어주려고 하는데 영화에서는 대부분 악한 이미지를 끌어낸다.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에서의 사육사도 사이코패스의 전형이었다. 태원 역할도 악이 내재돼 있는 경우고. 방송과 영화에서 이렇게 평가가 양분되니 두곳 모두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웃음)

-그게 장점이지만, 한편으로는 배우로서의 색깔로 따지자면 아직은 조성하를 규정하는 색깔이 부족하다는 측면으로도 해석된다. =지금껏 내 어떤 면을 부각하기 위해 연기를 해오지는 않았다. 늘 작품에서 원하는 캐릭터를 만들려고 고민했다. 어떡하면 남들과 다른, 남이 해보지 않은 캐릭터를 만들까. 늘 새롭게, 또 새롭게가 나의 숙제였다. 그런데 그게 내 딜레마가 된 것도 사실이다. <거미숲>의 ‘방송사 국장’을 본 사람이 <성균관 스캔들>의 정조가 같은 인물인지 모르고, <집행자>의 ‘장용두’를 본 관객이 <욕망의 불꽃>의 ‘영준’을 연결하지 못한다. <황해>의 나약한 ‘태원’을 본 사람도 <황진이>의 조선 최고의 학공 ‘엄수’가 나인 줄 모를 거다. 물론 난 지금까지 완벽하게 ‘조성하’를 지우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돌아보니 난 왜 이렇게 힘들었나 싶다. 다른 배우들은 본연의 모습으로 가면 인정을 받는데 난 나대로 해선 안되는 거다. 나 자체에 대한 인지가 없으니 말이다.

-이젠 사정이 좀 달라졌다. 그래서 <황해>의 다음 스텝이 더 중요한 선택이다. =물론이다. 주위에서 이제는 좀더 내 것을 많이 꺼내야 할 때라고들 하더라. 좀더 ‘성하스러운’것을 펼쳐야 관객과 만날 때 수월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변하지는 않겠지만, 나도 그런 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 평소 모습을 보고 ‘이젠 코미디를 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다음 작품은 결정됐나. =아직 없다. <황해>와 <성균관 스캔들> 때문에 <욕망의 불꽃>에선 초반 분량이 적었다. 그러니 이제 그 불성실을 만회해야 한다. 조성하라는 배우의 몫은 피라미드 같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자리에서 점프 훈련을 해서 한 계단을 넘고, 또 훈련을 해서 다른 하나를 넘는 거다. 그렇게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다시 내려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주어진 숙제는 계속 넘어가야 하는 거다. <황해>로 조성하라는 이름을 조금 업그레이드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영화 역시 피라미드를 오르는 과정 중의 한 계단일 뿐이다.

-영화의 성공과 별개로, 한 가지 걱정은 드라마로 쌓아온 품격있는 미중년의 이미지가 밑바닥까지 드러낸 태원 때문에 추락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그건 단단히 각오하고 있나. =원래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라 여자애들 앞에선 얼굴 빨개지고, 오히려 여자들이 날 지켜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커서는 ‘목석 같다’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연애도 잘 못하는 게 내 실체다. 그러니 지금의 로맨틱한 이미지는 터무니없는 거다. 이제 그게 밝혀질 테니, 팬들에게 방송에 나가서라도 무릎 꿇고 석고대죄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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