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춘선 운행이 중단된다. 복선전철이 생기면서 사라질 노선 수요에 맞춘 운행 계통의 합리적인 변화. 하지만 그 구간에 사연이 있는 지인 몇은 아쉬운 감정을 토로한다. 웬만하면 마실보다는 방 안 가부좌를 선호하던 나로서는- 대학생 때 그 흔한 강촌 MT도 사절했었다- 딱히 얽힌 추억이 없는데도 덩달아 아쉽다. 요새 들어서 슬슬 역마 기질이 생기기 시작, 이제 조금씩 작은 여행의 묘미를 알아갈 참인데 열차계의 성문기본이 없어지다니…. 비유하자면 고전영화 나들이에 늦은 취미를 들이자마자 시네마테크 예산 끊어지는 꼴이랄까.
복고 비유가 나온 김에 통일호를 타던 추억으로 타임 워프(애매한 시차를 체감시켜드리기 위해 서론은 길어진다). EBS가 KBS 제3TV이던 초등학교 시절, 극장관람은 수년에 한번 있는 이벤트, 심야의 TV영화는 교육상 금물, 게다가 딴 집보다 늦게까지 흑백 브라운관을 고수한 탓에 스머프가 파란 인종임을 친구의 색연필 케이스를 보고 알 정도, 따라서 천연색을 온전히 인지할 수 없는 컬러영화들을 보면 왠지 억울, 일요일 낮 로터리를 최대 우회전하면 나오는 13번 채널에서 방영하던 흑백영화들만 오롯한 내 몫이 되어줄 때, 학급과 동네의 친구들은 컬러TV로 심야의 미드를 시청함은 물론이고 CIC 배급가맹점인 비디오 대여점에서 스필버그와 성룡, 스탤론의 신작들을 격일로 빌려보는 실정이었다. 신흥 주거도시의 왼쪽과 오른쪽, 고층단지와 연립단지의 간격은 매체의 향유뿐 아니라 여행의 운임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래들이 아버지의 ‘르망’이나 ‘스텔라’, 가끔은 대한항공이나 새마을호로 ‘바캉스’라는 걸 떠날 때 우리 집의 유일한 휴가는, 여름과 겨울 각 한번씩 통일호를 타고 아빠, 엄마 공히 고향인 정읍을 왕래하는 것.
쇠고리로 이어진 객차와 객차 사이에서
한번은 열차 출발시간에 촉박하게 도착, 제 칸에 승차하질 못해 앉을자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멤버는, 나, 누나, 여동생, 엄마, 그리고 맞벌이 교사인 엄마를 도와 경기도 우리 집에서 살림을 도와주시던 외할머니 조석순 여사. 당시 4시간여 걸리던 서울-전북 구간을 이 조합에 입석으로 갈 수는 없는 거라서- 물리적으로도 힘들지만 기왕 지불한 거 금전적으로 손해- 칙칙폭폭 열차가 열심히 달리는 와중에 우리 좌석이 있는 칸까지 꽤 여러 칸을 이동했다. 그 시절 객차와 객차 사이는 지금처럼 옆에 보호막 같은 게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은 보호막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열차 사이를 잇는, 그리고 그 사이를 승객이 이동할 수 있는, 자동개폐기가 설치된 공간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당시 객차와 객차 사이는 그저 커다란 쇠고리로 이어진 상태. 물론 정차한 상태라면 그리고 한창 달리는 시점이라도 건장하고 날렵한 성인이 지나가기에는 위험의 여지가 거의 없지만, 이미 일흔을 넘어 어깨도 허리도 목도 작고 굽은 외할머니와 유치원에 갓 들어간 여동생 등이 만에 하나 발을 헛디디거나 열차가 곡선을 그리는 중에 몸이 휘청하면 그 다음은… 어휴….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이 칸과 저 칸 사이를 걷는 조급한 고행을 할 때 이런 생각을 되뇌었다.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 3학년 선생님이다. 그것도 그냥 선생님이 아니라 우리 옆 반 선생님이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자기가 낳아 자기가 근무하는 학교를 다니는 남매, 그리고 그 삼남매의 외할머니와 귀향을 하다 그중 누군가 철로로 실족하는 어이없고 끔찍한 상황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매스컴 한쪽을 장식할 수도 있는 그런 사건이 AM라디오 하나밖에 없는 우리 집안에서 일어날 리는 없다.’ 이렇게 이상한 확률에 대한 믿음을 보호막 삼아 삐거덕 쇠고리 위의 허공을 반 걸음씩 건너다보니 지나온 량이 더 많아진 ‘철로역정’. 혹시나 외할머니나 동생 수진이 몸이 휘청하면 내가 언제든 확 붙들겠다는 계산으로 그 꽁무니에 딱 붙어서, 예의 주시하던 기억.
외할머니는 나 5학년 때 고향에서 돌아가셨다. 핵가족으로 쳐도 한 식구 같은 분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삼남매 모두 주말의 특별활동 따위를 핑계로 상갓집에 따라가질 않았고 엄마, 아빠도 굳이 강권하지 않았다. 초딩 신분으로 장례에 참석 안 한 건 그렇다쳐도 그 주말 동안 어른들도 없겠다,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같은 프로를 양껏 보며 유쾌해하던 건 아직까지 죄책감으로 남는다. 그래서 지금 어디 결혼식은 못 가도 문상은 꼬박꼬박 간다.
나한테 공갈 젖을 주시던 외할머니
외할머니, 나한테 공갈 젖을 주시던 외할머니. 미안해요, 저는 작고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던 외할머니가 귀여웠던 것 같아요. 귀여워하던 어른을 염하는 곳에 가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래도 제가 할머니를 많이 좋아한던 건 기억이 나요. 그때 토요일 낮이면 공중파에서 해주던 <배달의 기수>라는 반공 시추에이션 드라마를 외할머니랑 보곤 했지요(독서를 제하면 주말 낮의 TV프로만이 유일한 오락거리였지요). 군복 색깔 대신 군모의 타입으로 구분되던 북한군은, 몇분 단위로 선량한 남한 양민을 괴롭히곤 했지요. 곡식을 뺏거나 이웃을 괜히 개머리판으로 치거나. 그러다 만만한 양갓집 규수를 본 인민군들은 항상…. 그런 흉악한 상황을 나열하는 프로를 보다 꼬마 성호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죠. 아니 예감이라기보다는 사악하고 불운해서 왠지 자극적인 상상. 그 판단을 차마 발설하진 못하고 산만하게 외할머니를 의식할 때 마침 함께 있던 엄마랑 외사촌 누나의 채근. “왜 그러냐, 할머니한테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라.” 그래서 또박또박 조심스럽게, 그리고 ‘나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또래에 비해 좀 똑똑하긴 한 것 같아’ 자평하면서, “예전에 북한 공산군은 툭하면 혼자 있는 부녀자를 강간했는데, 알고 보면 외할머니도 6·25 때 혼자이지 않으셨냐. 그러니까 혹시 공산군이 외할머니를 겁탈하려 한 적은 없느냐?” 결국 외할머니는 호호 웃으시며 “그런 적은 없어” 말씀하셨고, 우리 엄마랑 외사촌 누나도 너털 웃었고, 나는 정말 많이 안심이 됐죠. 아마 내가 ‘겁탈’이라는 용어를 쓴 덕에 ‘우리 성호는 참 어휘력이 뛰어나’ 하며 칭찬도 받은 듯하고. (*필자 주; 어릴 때 고전 군웅소설들을 애독했는데, <초한지>나 <삼국지> 등에서는 꼭 ‘겁탈’이라는 용어를 쓰곤 했다. ‘음욕’ 이런 말과 함께)
그렇게 어떤 어휘의 활용 폭이나 타이밍을 충분히 습득하지 못했음에도 일단 한번 뱉은 뒤 반응을 보고픈, 그래서 소규모의 청중에게라도 호응을 받고 있는 나를 확인하고픈 욕구가 내 영상 작업의 규모와 성격에도 이어진 것 같다. 그렇게 여전한 소아(小兒)로서 청중을 마주하지 않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있다. 나름의 서사랍시고 작은 작업들의 발차 정차는 하면서 정작 쾌적한 브리지의 공간은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 다만 그때 통일호의 거친 이음새에서 외할머니와 동생의 실족을 미리 상상하며 언제든 붙들 요량으로 주시하던 아이의 성정은 남은 듯하여 다행. 그 아이가 자신의 몫을 알 때 어른이 되겠지. 이 연재도 마찬가지. 마주한 적도 없는 경춘선을 억지로 소환하는 이 아슬아슬한 복문들. 조만간 다른 운행계통에 양보하는 게 마땅한 미욱한 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