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인상이 선하다. 아니 뭔가 억울하다. 벌써 11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을 통해 올해 처음으로 여우주연상 수상을 경험한 서영희는 작품마다 적지 않은 존재감을 차지한 것에 비해 그 역할의 폭이 좁았다. 그녀에게 허락된 역할은 단 두 가지. 피해자가 되어 죽거나 과장되게 웃기거나. “이제껏 다른 사람들은 한 계단 한 계단 쉽게 올라가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렇게 한 계단이 높고 험난할까 생각했었다”는 그녀의 푸념 섞인 수상소감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녀는 분위기를 지배한 적은 있을지언정 한번도 직접 이야기를 이끌어가보진 못했다. 그런 그녀가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을 통해 드디어 의미있는 한 계단을 내디뎠다. 스스로 밝히듯 높고 험난한 한 계단이었던 만큼 단순히 계단 한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도약에 가깝다.
그녀는 언제나 죽는 쪽이었다. 비극의 끝에서 생을 마감하는 피해자. <추격자>의 흥행으로 이러한 이미지는 대중성마저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비슷한 이미지의 작품이 축적된 결과라기보다는 그녀 내면에서 뿜어진 본질처럼 보인다. 그녀의 얼굴에는 꾹꾹 눌러 담은 슬픔의 정조가 감돈다. 버림받았지만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 <궁녀>에서부터 <추격자>, 최근의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까지 그녀는 일관되게 벙어리의 정서를 가지고 간다. 그녀의 표정에는 침묵을 강요당하는 부조리가 깃들어 있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 그전과 달랐던 것은 그녀가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피해자의 얼굴을 한 가해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이르러 그녀는 드디어 ‘움직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의 불균질함을 매혹으로 바꾸는 에너지는 배우 서영희의 표정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그동안 축적된 피해자로서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가져와 영화의 정서를 지배하고, 중반 이후 휘두르는 낫으로 영화를 이끌어가며, 이윽고 매혹과 혐오의 중간지대에서 스스로 영화가 된다.
배우가 특정 이미지를 구축한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많은 배우들이 변화의 강박에 눈이 멀어 자신이 지닌 천연의 색마저 빛바래게 만들기도 하지만 다행히도 서영희는 긴 호흡을 지닌 배우다. 입버릇처럼 끝까지 연기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는 천천히, 하지만 어쩌면 가장 빠르게 영화를 지배하는 법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신중한 한 걸음. 그녀의 다음 계단에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다.
올해의 장면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 예나 지금이나 클로즈업은 영화가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스펙터클 중 하나다. <영화 속의 얼굴>에서 자크 오몽이 밝힌 바 있듯 하나의 얼굴 표정은 때로 영화 전부보다 많은 이야기를 남기기도 한다. 평상에서 한가롭게 노는 마을 할머니들을 뒤로하고 밭 한가운데 서서 따가운 태양을 응시하는 김복남의 표정은 이 영화의 시작인 동시에 끝이다. 정남이 피해자에서 복수자로 돌변하는 이 순간은 하나의 얼굴 위로 겹쳐지며 영화의 모든 인과를 담는다. 명백하지만 모호한. 이중적이지만 분명한. 말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유일한 수단은 오직 그녀의 얼굴이다. 카메라는 그녀를 온전히 담아내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 렌즈 끝에 그녀가 있고, 그곳에서 영화는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