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1. 슈만과 브람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는 클라라는 누구? 클라라 슈만(1819~96)은 19세기 독일에서 명성을 떨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다. 5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9살 때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한다. 소녀 클라라의 연주를 들은 괴테는 ‘클라라는 대여섯명의 사내아이들이 지닌 힘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다. 클라라의 외모는 당시 라이프치히 오페라 극장 지휘자 헨리 도슨의 말을 참고하면 될 것 같다. “클라라는 우아한 용모, 장밋빛 피부, 부드럽고 하얀 작은 손, 풍성한 검은 머리, 영민하게 빛나는 눈빛을 지녔다.” 14년 결혼생활을 함께하는 R. A. 슈만(1810~56)은 클라라의 나이 9살 때 처음 만난다. 클라라의 아버지는 라이프치히의 유명 피아노 선생 프리드리히 비크였고, 비크의 제자가 바로 슈만이었다. 비크는 자신의 딸과 슈만의 결혼을 극렬 반대했는데, 결국 1840년에 슈만과 클라라는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다. 슈만과 클라라 부부는 당시 젊은 음악가 요하네스 브람스(1833~97)와 깊은 우정을 나눈다. 슈만은 아직 애송이 피아니스트에 불과하던 브람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연정을 품지만 클라라는 브람스에게 ‘모성적 우정’만을 강조한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 뒤 40여년간 연주여행을 다니며 홀로 지낸다. 슈만과 브람스 음악에 대한 클라라의 곡 해석은 지금까지도 하나의 규범으로 떠받들여지고 있으며, 유로화 이전의 독일 100마르크 지폐에는 클라라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Q2. 클라라와 슈만의 사랑을 왜 세기의 러브스토리라고 하나? 슈만은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 6년간의 소송도 불사했고, 결혼 뒤엔 정력적으로 작곡했다. 슈만은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로맨티시스트이기도 하다. 슈만이 결혼식 전날 <미르테의 꽃>(Myrthen)이라는 가곡집을 클라라에게 바친 일화는 유명하다. <미르테의 꽃>에는 괴테, 바이런, 뤼케르트, 하이네 등의 시에 클라라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담아 만든 총 26곡의 노래가 들어 있다. 결혼 이듬해인 1841년에 슈만은 교향곡을 두편 발표했다. <교향곡 제1번>(일명 <봄의 교향곡>)을 작곡한 뒤 다음 교향곡에는 ‘클라라’라는 표제를 붙이겠다고 했고 <교향곡 제4번>을 쓴 다음 이 곡을 클라라에게 헌정한다. 클라라는 슈만의 사후에 쓴 일기에 이런 글을 남긴다. “이 세상 남자들 중 가장 훌륭했던 그이는 내가 요즘 그의 작품을 제대로 연주하는 걸, 연주다운 연주를 하는 걸 결코 듣지 못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자주 슬픔에 빠지곤 한다.” 물론 여기서 ‘그’는 슈만이다. 클라라는 자존심이 세고 강직한 성격이었지만 슈만에게만은 헌신적이고 순종적이었다.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이 세기의 러브스토리가 된 건 브람스 때문이기도 하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간직한 채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슈만이 두통, 환청, 망상 등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1854년 2월 라인강에 투신하고, 엔데니히 정신병원에 수용돼 사망했을 때 슬픔에 잠긴 클라라를 위로한 건 브람스였다. 브람스는 <피아노 트리오 1번> <슈만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해 클라라에게 바쳤다.
Q3. 클라라, 슈만, 브람스의 관계를 다룬 또 다른 영화나 책은? 이들의 러브 스토리는 일찍이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됐다. 클라렌스 브라운 감독이 연출한 <송 오브 러브>(1947)는 클라라와 슈만의 결혼, 클라라, 슈만, 브람스의 우정, 슈만의 죽음 뒤 클라라와 브람스의 관계를 그린다. 클라라는 <밤으로의 긴 여로> <초대받지 않은 손님> <아침의 영광>의 캐서린 헵번이 연기한다. 슈만이 1838년에 작곡한 피아노곡 제목인 트로이메라이를 따와 번안 제목을 붙인 <애수의 트로이메라이>(원제 <Spring Symphony>(1983))도 있다. <클라라>가 <라인 교향곡>을 중심으로 한다면 <애수의 트로이메라이>는 <봄 교향곡>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책으로는 베톨트 리츠만의 <슈만과 클라라>, 카트린 레프롱의 <클라라 슈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