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일 밤. 해마다 그랬듯 조촐한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을 갖다. 올해는 애니메이션 <크리스마스의 악몽> 캐릭터들을 초대했다.
11월22일
4인의 감독이 둘러앉은 술자리. A감독님은 차기작 시나리오 초고와 씨름 중이고, B감독님은 캐스팅 진도에 제동이 걸렸다. 이날 모임의 주빈 격인 C감독님은 엊그제 개봉한 영화 흥행 성적에 상심했고, D감독님은 영화를 완성했으나 개봉이 늦춰졌다. 불현듯 학창 시절 생물 시간에 배운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설이 떠올랐다. 달리 말하자면 이 풍경은 ‘영화 만들기에서 발생하는 수난의 계통적 진화’를 각 ‘개체’가 단계별로 예시하고 있는 셈 아닌가. 남의 곤경을 놀리며 자신의 우울을 잊었는지, 자학을 선보여 남들의 시름을 덜어주었는지 딱히 분간할 수는 없으나- 옆자리 손님들은 무슨 큰 경사라도 나서 모인 사람들인 줄 알았을 거다- 모두 조금씩 가볍고 따뜻해져서 헤어졌다.
11월23일
손재곤 감독의 <이층의 악당>은 4년이라는 간격을 고려하면 전작 <달콤, 살벌한 연인>(2006)과 놀랄 만큼 가깝다. 1층엔 로맨틱코미디, 2층에는 범죄스릴러가 입주한 연립주택의 모양새인데, 정작 본령은 범죄도 로맨스도 아니다. 본말전도주의랄까. 손재곤 감독은 현실에서 일어날 경우 틀림없이 주의의 초점이 될 사건들을 “우리 동네에서는 늘 있는 일”이라는 투로 다룬다. 살인범이 우연히 녹화된 증거를 인멸하려고 비디오를 모조리 빌려 보다가 영화광이 되는 이야기를 그린 데뷔작 <너무 많이 본 사나이>부터 그랬다. 살인이나 절도라는 ‘센’ 모티브로 이야기에 시동을 걸지만, 정작 사건과 장면으로 만들어지는 부분은 범죄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를 채비하는 과정이나 자질구레한 뒷감당이다. 연애 감정을 따라가다가도 보통 영화들이 꽤 호흡을 고르고 공들여 그리는 관계의 전환점을 성큼성큼 넘어가버린다. 이를테면 <이층의 악당>에서 연주(김혜수)와 강 선생(한석규) 사이에 드리워진 죽은 전남편의 그림자는 통상의 드라마에서 심각한 장애물이 될 법한데도 극중에서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배우 한석규의 연기는 기어이, ‘이죽거리다’와 ‘느물느물’이라는 단어를 다시 우리말 사전에서 찾아보게 만들었다. ‘이죽거리다’는 ‘이기죽거리다’의 짧은 말로 “자꾸 밉살스럽고 짓궂게 빈정거리다”라는 뜻이고, ‘느물느물’은 “능글능글한 태도로 끈덕지고 못되게 구는 모양”이라고 풀이돼 있다. 전자사전의 두 단어 항목에 <이층의 악당> 강 선생의 대사 음성을 지원하면 더할 나위 없겠다. 자꾸, 끈덕지게. 그렇다. 집요하게 말이 쏟아지는 <이층의 악당>에는 남아 너풀거리는 대사들이 많다. 손재곤 감독은 농담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굳이 제어하지 않는다.
시사회장을 나서며 즉각적으로 떠오른 또 하나의 단어는 히스테리였다. 연주와 강 선생은 사랑이나 이권을 넘어 오직 히스테리 안에서 하나가 된다.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의 <히스테리>를 꺼내 뒤적거리다, 히스테리라는 개념에 더 딱 들어맞는 것은 캐릭터들보다 <이층의 악당>이라는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폰 브라운에 따르면 히스테리의 양상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예측할 수 없고, 매력적이지만 피상적이고, 성적으로 대범하지만 스스로는 약간 불감증이다.” 이어서 저자는 다른 증세와 구별되는 히스테리의 특징은, 이른바 정상궤도를 벗어나는 본인의 행동 뒤에 숨은 의미를 스스로 뚜렷이 의식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 이 대목은 대다수 예술가들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라 인용으로서 쓸모가 있을 것 같진 않지만.
11월26일
체험삼아 아이패드를 며칠 동안 만지작거리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세상에는 기능적으로 너무도 교묘정치하게 디자인되고 완벽하게 구동되기 때문에, 기필코 그것을 써서 존재 의미를 완성시켜줘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을 안기는 물건들이 있다. 신 과일을 입에 대지 않는 사람마저 유혹하는 필립 스탁의 레몬즙짜개라든가, (매우 위험한 예로) 루이지 콜라니가 디자인한 날렵한 장총이 그렇다. 즉, 필요가 도구를 만드는 보통의 경로가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다. 아이패드의 매끈한 엽렵함도 일말의 불안을 불렀다. 이 멋진 신세계는 궁극적으로 해야만 할 일을 한없이 유예하고 싶은 우리에게 주어진 어여쁜 미로는 아닐까. 세련된 어플리케이션으로 통하는 무수한 파이프라인은, 굳이 출구를 찾지 않아도 좋다고 여기게 만드는 환상적인 우회로는 아닐까.
웹의 시대는 가고 앱(어플리케이션)의 시대가 온다는 풍문이 들린 지는 꽤 됐다. 월드 와이드 웹의 개방성과 그것이 약속한 새로운 광장의 이미지는 가히 목가적이었다. 하지만 브라우저 앞에서 성장한 세대가 브라우징(browsing)에 지쳐버렸다. 스티브 잡스는 알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구매력을 갖춘 동시에 인생이 유한함을 절감하기 시작한 그들이 무한 공유, 무한 경쟁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데에 진력을 낼 거라는 걸. “자, 이제 호기심은 작작 채웠으니 됐고 돈이 좀 들어도 내 취향에 맞고 질이 보장되는 콘텐츠를 빠르고 편리하게 갖겠어.” 여기서 요점은 “돈이 좀 들어도”에 있다. 웹의 광장에 뿌려질 때만 한 사회적 영향력은 없다고 해도 결국 콘텐츠 기업과 미디어 기업에 필요한 건 수익일 테니까. 저작권자인 아티스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익원이 되는 광고를 직접 만들어낼 광고 전문가의 의욕만 놓고 봐도 웹은 경쟁력이 달린다. 웹 배너 광고는, 이미 TV, 지면, 빌보드에서 발전할 대로 발전해온 광고 분야 전문가들에게 지나치게 조악한 플랫폼이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만드는 사람과 유통시키는 사람, 유통의 플랫폼을 만드는 사람의 이익이 일치할 때 물살은 빨라질 수밖에 없으리라.
지겹지만 다시 <소셜 네트워크>. 페이스북의 성공비결에는 그것이 적당히 닫힌 시스템, 접근성을 계층화할 수 있는 구조라는 점이 있었다. 산업혁명기 인클로저 운동부터 ‘울타리치기’는 자본주의의 자연스런 생명 유지장치였다. 하나의 기술이 대중에 친숙해지고 나면 누군가 그것에 울타리를 쳐서 타인을 배제하고 소유한다. 정말 앱이 웹을 완전히 압도하는 시대가 온다면? 인터넷은 불특정 다수가 부딪혀 난장을 벌이는 게시판/광장의 기능을 축소하고 고속도로의 역할에 치중하지 않을까. 웹에는 눈에 보이는 상품을 거래하는 쇼핑몰만 남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앱 스토어에서 거래되는 세상이 오는 걸까. 상품성을 인증받은 콘텐츠는 앱 스토어로, 아마추어들이 생산한 콘텐츠는 웹으로 원심분리되는 걸까. 아, 이제 그만! 설익은 추측은 이쯤 끊고 생각을 새로 동기화하자.
11월29일
<베리드>(Buried)를 119 소방재난 본부 대원들과 한 극장에서 보았다(자못 안심이 됐다). 영화는 예술적 쉼표인지 영사사고인지 잠시 동요할 만큼 기나긴 암전으로 시작했다. 하긴, 정신을 잃은 사이 생매장된 남자의 이야기이므로 인물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빛도 말소리도 없는 게 맞다. 러닝타임 내내 인물과 영화를 사막에 파묻힌 관 안에 철저히 감금한 이 영화는, 하나의 롱테이크로 찍은 영화나 전체를 시점 숏만으로 편집한 영화 등과 더불어 ‘영화적 스턴트’ 장르로 묶어도 좋을 법하다. 설정을 알고 있던 내겐 두 가지 걱정이 있었다. 하나는, 플래시백이나 플래시 포워드로 영화가 비겁한 탈출을 꾀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고, 또 하나는 혼잣말 대사가 쏟아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다행히 둘 다 기우였다. 딴소리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자, 이제라도 도망쳐!”라는 대피 사이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장면이 있으니, 주인공이 혼잣말로 내면의 감정을 중계하기 시작할 때다. 어쨌거나 이런 부류의 영화답게 <베리드>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양극이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침통한 신음소리를 내며 동행과 다투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쪽에서는 극장의 불이 켜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가 환호를 보냈다. 최근에는 <데쓰 프루프>와 <파라노말 액티비티>의 시사회가 유사한 풍경이었다. 취향을 떠나 폐소공포증 관객에 대한 경고는 첨부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폐소애호증’에 가까운 나 같은 관객의 손톱도 영화를 본 뒤 열 중 일곱이 물어뜯겨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