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의 이야기가 가능할까? 이는 형식이 어느 정도의 폐쇄된 체계를 갖추게 될 때 이어지는 질문이다. 탄생 이래 영화는 꾸준히 일정한 체계를 갖추기 위해 노력해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많은 작가들이 형태를 병치하고 혼합해 자신의 색을 드러내려 애쓰고 있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혼성 형태의 동시대성, 이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레인보우>는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메타영화, 그러면서 그 형식엔 명증이 없음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주인공은 데뷔작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감독 지망생인데, 그녀는 감독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감독인 신수원은 배우 박현영에 자신을 투사해 주관적 영화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완성했다. 이 속엔 스펙터클한 비장미와 과장된 드라마투르기가 없다. 하지만 진정성이라 불리는 기묘한 매력이 숨어 있다.
충무로 시스템을 경험한 과정을 감상하다
대개 관객이 영화관에서 느끼는 경험은 두 방향 중 하나다.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가거나 아니면 자발적 판단으로 (스스로가) 이야기에 들어가(길 선택하)거나. 대부분의 경우 관객의 태도는 전자에 속한다. 그리고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영화가 지켜야 하는 법칙들’도 생겨난다. 영화 속의 프로듀서가 감독인 지완에게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종류의 배려심이다. 예를 들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려면 장르가 명확하고 20분 안에 관객을 사로잡아야 하며, 갈등구조는 분명하고 주인공은 20대 중반의 중산층 이상, 플롯은 기승전결을 충실히 따라야 한단다. 물론 영화를 만들 때, 강제적인 주입이냐 자발적인 감상이냐는 감독이 설정하는 문제다. 그리고 영화 전체에서 살필 때 이 작품은 후자에 더 가깝다. 만일 관객이 스크린에 참여하길 원한다면 감독은 이상에서 나열된 조건들을 깨트려야 할 것이다. <레인보우>가 이들 법칙에서 벗어나며 진행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지완은 주인공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30대 후반의 주부이며,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선악구도)도 명확하지 않다. ‘돼지족발 꿈’이 등장하면서 장르 또한 드라마의 통상적 궤도를 이탈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판타지인지 리얼리즘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의 항해는 이어진다. 다큐멘터리가 가미된 음악영화로의 정체성 역시 상황은 같다. 아들 시영에게서 출발한 음악적 시도들은 영화를 결코 온전히 장악하지 않는다. 간간이 가미된 다큐풍의 영상처럼, 이는 다만 ‘착하게’ 나타나서 ‘적당하게’ 사라진다. 결말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엔 결정적으로 인생을 빨주노초로 물들이는 장밋빛의 조명이 없다. 감독으로서 지완은 어느 수준에 오르거나 혹은 오를 수 있을 거란 인상을 풍기지 않은 채 엔딩을 맞는다. 그렇지만 극적이진 않더라도 관객은 어느샌가 이 성장담의 진솔함에 빠져들게 된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가 그러했던 것처럼 개인의 경험에는 보편성의 정서가 담겨 있다.
신수원 감독은 기존의 충무로 시스템에서 받았던 경험을 시나리오로 옮기면서 ‘예술 창작’이 일종의 ‘미적 체험(감상)’에 속한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인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 이야기는 그러니 그 체험에 이입되지 않으면 언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를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책상에도 영화 속 지완의 책상처럼 커피잔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간혹 내 모니터에서도 개미는 발견되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이 시퀀스들에 폭소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화를 준비하는 이들이라면 더욱더 이 작품은 흥미로울 것이다. 어쩌면 영화 <레인보우>의 장점은 이런 ‘심심한’ 점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언뜻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주인공이 되어 영화를 살핀다면 한없이 복잡다단해진다. 관객이 지완에게 이입하면 할수록 창작을 미적 체험에 포함시키려던 감독의 시도는 의도에 더 근접한다. 그러니 이 체험은 충분히 창조적이라 할 만하다.
결국 <레인보우>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감독에게, 그 감독이 이입된 ‘지완’에게 몰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어찌 보면 모호한- 판타지를 구축하다가도 어느 선에서 멈추고, 음악영화를 지향하다가도 중단하는 것과 같은- 지점들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를 둘러싸고 있는 실제와 이미지의 배열은 모두 주인공 지완을 향한다. 이는 영화 속 판타지의 기법들이 어떤 특정한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한 현상이기 때문에 사용되었다는 것을 추측게 한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처럼 <레인보우>의 기법들은 ‘창조적 갈등구조’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록의 문제’ 때문에 선택된 듯 보인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다. 다만 등장인물의 서투른 행보, 지친 육체, 정서적 난관을 묘사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완성된 영화의 플롯이 기존의 짜임새들을 격파하면서 제자리걸음하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가 가진 또 다른 장점이다. 다시 말해 <레인보우>의 어떤 시퀀스들은 발전하고 바뀌기 위해 특정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필요한 현상이기 때문에 이를 선택했다. 그럼에도 그 밸런스가 한곳으로 치우치지는 않는다. 흔히 데뷔작에서 자전적 이야기를 할 때의 우려되는 지점들을 신수원의 이 작품은 가벼운 터치로 뛰어넘는다. <레인보우>는 주인공의 긍정적 성공을 암시하며 이야기를 끝내지도 않고, 영화 속 다른 캐릭터들 역시 주인공이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위해 움직인다. 그리고 현실의 조각들이 이 사이에 일관성있게 나열된다.
‘정해진 규칙 없음’을 증명함
최근 들어 국제 영화제에서 언급되는 영화들을 살피면서 몇 가지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10여년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던 리얼리즘 작품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첫 번째 특징이라면, ‘카타르시스’와 같은 고전적 미적 체험이 더이상 가장 중요한 척도는 아니란 것이 두 번째이다. 나머지 경향은 차치하고라도 <레인보우>는 이 두 측면을 꽤 진솔하게 만족시킨다. 작품이 어떻게 지각되고 맛보아지는가 하는 것, 즉 주관지향적 관점이 우세한 것은 이 작품의 최대 강점이다. 물론 이때에 문제될 수 있는 것은 개인 사이의 관념 차에서 발생하는 미적 체험의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개별적 편차’일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른바 비영화인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을 거라는 우려를 이 영화의 ‘클로즈업’은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레인보우>를 볼 때 혹여 이야기의 축을 따라가다가 실패한 관객이라면, 그저 주인공의 얼굴을 따라 이 영화를 감상할 것을 권한다. 감독이나 어머니의 역할을 포함한 인물의 성장과정이 지완의 클로즈업을 통해 물리적으로 드러난다. 영화의 시작부(introduction)에서 무표정하게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그녀의 얼굴은 영화사의 개인 사무실을 얻으면서 생기를 얻고(development), ‘행인3’으로 등장하는 영화 속의 엑스트라를 거치면서 자연스레 전구(轉句, turn)를 찍는다. 마침내 콘서트 장면에서 노래를 들을 때엔 묘한 안도감마저 느끼게 되는데, 작가로서의 행복한 결말(conclusion)을 대신하는 이 시퀀스는 아들의 노랫소리와 어우러져 단정하게 영화를 마무리짓게 한다. 이때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적나라한 현실의 단편을 드러내는 보조 역할을 맡는다. 이는 단순한 기승전결의 포인트를 넘어 현실의 표상들을 생성해낸다. 지완을 질책하는 프로듀서의 모습에서, 캠코더의 부속품을 던지는 남편의 행동에서, 동아리의 일을 숨기는 아들의 뒷모습에서 웬일인지 우리는 안도하게 된다. 할리우드영화처럼 무언가 대단한 것을 성취해내지 않아도 나아가고 있음을, 이 현실의 파편들은 일러준다.
스스로 영화 만들기의 첫벽을 넘은 이 신인감독은 적어도 자신이 어떠한 의무감을 가지고 작품에 매달려야 한다고 믿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처음부터 박현영의 클로즈업이 묘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아마 신수원 감독의 이 유별난 자세에서 기인한 것 같다. 작품을 바라볼 때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혹은 연출자가 가져야 할 태도는 어떠한가? 이에 정해진 규칙이 없다는 것을 일깨우려 감독은 악전고투했다. “모두가 바라보는 하늘에만 무지개가 뜨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한 시퀀스가 마침내 전체의 주제를 대변한다. 영화 <레인보우>가 보여주는 무지개는 각자의 마음속에 이미 속해 있다. 그걸 발견하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성장임을 이는 알린다.
이지현 한겨레 훅(hook.hani.co.kr)에 글을 연재하고 있다. 칼럼의 명칭인 시네마룩스(Cinema Lux)는 유학 시절 자주 들르던 시네마테크의 이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