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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이제 그의 주인공도 행복해지면 안될까?

<부당거래>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최철기에 대한 동병상련

<부당거래>

영화평론가인 허문영 시네마테크 부산 원장은 지난해 <주먹이 운다>를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상영한 뒤 “개봉 당시에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굉장했다. 클라이맥스에선 눈물이 났다. <주먹이 운다>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온 영화가 아닐까?”라고 말했다. 흔히 류승완이 과대평가된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과소평가된 감독에 가깝다. 그는 흥행에 크게 성공한 적도, 국제영화제에서 각광받은 적도 없다. 불운하게도 그는 장르영화의 전범으로도, 작가영화의 색깔로도 조금씩 부족한 영화를 만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르영화의 자장 안에서 작업했지만 그의 영화가 장르영화의 규칙을 제대로 지킨 적은 없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은 영웅이 되기에는 어딘가 빠진다. 게다가 류승완은 1970년대의 뉴할리우드영화의 특질이었던 작품의 불균질성을 당당하게 내세운다. 어떤 대목에서든 류승완의 영화는 과잉으로 치닫고 대개는 그것을 봉합하지 않은 채 과잉 그 자체로 내러티브의 흐름 옆에 놔둔다. 서사가 멈칫한다거나 길게 늘어지는 것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주먹이 운다> 역시 감상주의를 배격하고 밀어붙이는 클라이맥스의 복싱 경기 장면이 동물원의 우리에 갇힌 짐승들의 울부짖음 같은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과유불급이라고 할 만큼 지나친 클라이맥스는 그의 연출의 트레이드 마크다. 이 과잉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류승완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렸다.

<부당거래>는 지금까지의 류승완 영화와 다르다. 스토리텔링의 리듬감이 거의 완벽하게 성취된 영화이며 이야기의 발단부터 결말까지 한 호흡에 내달린다. 슬로 퀵 박자가 은은하게 요동치는 강물에 뗏목을 타고 떠내려가는 기분이다.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를 공개하고 난 뒤 류승완은 내게 자신의 영화가 리듬감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대개의 클라이맥스가 영화 중반에 느껴지고 중반 이후 급격하게 페이스가 떨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반성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영화에 드러나는 과잉이 벌써 거장이 되려는 자의식의 소산이며 이제부터는 꾸준히 영화를 찍으면서 장인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당거래>는 자기 색깔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주문형 감독으로서 입지를 모색하는 장인 류승완의 새로운 출발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등장인물들의 감정묘사는 균형이 잡혀 있고 클라이맥스의 톱니바퀴형 극적 굴곡도 적당히 주름잡혀 있다.

승패가 예정된 먹이사슬의 약자

경찰 수뇌부의 명령으로 가짜 범인을 조작해야 하는 광역수사대 소속 형사 최철기(황정민)가 건설회사 사장 장석구(유해진)를 시켜 가짜 범인을 만들고, 최철기가 잡아넣은 부동산 업계 김 회장을 스폰서로 둔 검사 주양(류승범)이 최철기를 견제하면서 범인 조작의 내막을 알게 되는 것이 <부당거래>의 내용의 중요 골자다. 이 먹이사슬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는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뀐다. 최철기는 장석구를 이용했지만 장석구는 범인조작의 전말을 지휘한 입장에서 거꾸로 최철기를 적당히 어르고 구슬러 향후 사업의 이권을 유리하게 만든다. 최철기는 주양 검사가 김 회장과 지근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주 검사를 조종하려 하지만 주 검사는 최철기가 범인을 조작했다는 것을 알고 역시 최철기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각자의 머리싸움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이 싸움의 승자는 이미 권력의 위계에 따라 정해져 있다. 각자 파국을 맞는 결말에서도 유일하게 주양 검사만이 위기 앞에 당당하다. 주양의 뒤를 봐주는 검찰 고위간부인 주양의 장인은 남자가 이런저런 일을 겪을 수도 있으니 주눅들지 말라고 격려한다. 카메라는 상승하고 검찰청 입구에서 건물 위로 올라가는 주양과 장인의 걸음걸이도 활달하다.

이것이 새롭지 않은 스토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감독 류승완은 이미 승패가 예정된 먹이사슬의 구조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하중이 무거워지는 관계의 특성을 스케치하는 한편 그걸 견디는 인물 각자의 방식을 명쾌한 행동주의로 끌어낸다. 장석구가 최철기의 지시대로 가짜 범인을 잡게 해준 뒤 뭔가 떡고물을 기대하며 만남을 청한 자리에서 최철기는 한강 어느 다리 밑 인적 드문 곳에서 장석구를 만나자마자 유도기술로 장석구를 수차례 메다꽂는다. 신음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지는 것은 장석구인데 뭔가 위엄을 과시하려는 듯한 최철기가 오히려 초조해 보인다. 다소 과한 최철기의 장석구에 대한 폭력은 그 자신의 위축된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등장인물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이런 식의 행동 패턴을 통해서다. 영화 속 표현대로라면 백이 없어서 가지치기도 좋은 출신 성분의 최철기는 절대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될 수 없고 인형극의 주인공을 잠시 맡을 수 있을 뿐이지만 인형줄을 조종하는 사람에게 매달린 그의 운명은 불우하다. 영화에서 그는 연기에 가장 서투르다. 부하 형사들에게도, 장석구에게도, 주양 검사에게도 그는 연기하지 못한다. 이에 반해 그의 상대역들은 모두 유들유들하다. 이런저런 말로 눙치는 장석구는 말할 것도 없고 주양 검사도 상황에 따른 퍼포먼스가 능하다. 최철기가 주양 검사를 만나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분명히 마이클 만의 <히트>에서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가 만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되는 이 장면에서도 최철기의 기운은 전혀 발산되지 못한다. 그는 비극의 주인공이지만 위엄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다.

이상하게도 경찰 상사뿐만 아니라 부하들에게도 그는 군림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상명하복의 절대적 충성을 보이는 태호를 비롯한 그의 휘하 형사들의 태도에 비춰볼 때 이는 흥미로운 면모다. 주위로부터 쥐어짜일 대로 짜인 듯한 그의 캐릭터가 가끔 분출하는 것은 오로지 폭력뿐인데 앞서 말했듯이 그의 폭력은 상대에게 별로 위협을 주지 못한다.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자신의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한 그가 유일하게 무너진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비교적 성공적으로 연기하는 것은 주양 검사가 자신의 가족 친지들을 잡아넣자 요정에 그를 초청해 옷을 벗고 용서를 구하는 퍼포먼스를 펼칠 때다. 주양 검사뿐만 아니라 관객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 대목에서 그는 비로소 연기에 성공하는 듯이 보인다. 요컨대 그가 제대로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상대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척할 때뿐이다.

영화에서 핵심인물이라 할 최철기의 이런 비극적 풍모는 류승완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데뷔작 이래 줄곧 장르영화를 찍었지만 한번도 영웅적 역할을 주인공에게 제대로 부여한 적이 없다. 그의 주인공들은 코미디나 과도한 비극적 색채 속에서 속절없이 죽거나 비루한 인생 그 자체를 노출하는 캐릭터의 영역에 속해 있다. 최철기가 이런저런 이유로 형제 같은 부하 형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뒤 승진계급장을 달 때 화면은 크로스 커팅으로 부하 형사의 시체에 옷을 입히는 의식을 보여준다. 신분상승과 인간적 추락의 극단을 제시하는 이 장면 뒤로 최철기는 부하 형사의 납골당에 참회의 의식을 치르지만 감독은 가혹하게도 그가 제대로 반성하고 참회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응징을 당할 때 카메라는 한순간도 감상주의가 이입할 틈을 열어두지 않고 그의 최후를 간결하게 응시하고 있다.

숏과 반응숏의 접합으로 구축되는 캐릭터

대중영화에서 주인공의 위엄은 거의 필수덕목이다. 존 포드나 하워드 혹스 등의 고전기 할리우드영화에서 경이롭게 성취된 것은 바로 등장인물의 위엄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그들의 영화는 선악의 가치가 이분된 경계에서 해체될 때조차도 자신만의 위엄을 지키는 방식으로 내러티브에 종결을 고한다. 류승완의 영화에서 그런 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에서처럼 등장인물들은 영웅이 되지 못할 자질을 지닌 인간이 응당 받아야 할 대접을 받으며 스크린에서 곧잘 비참하게 퇴장한다. 길거리의 개싸움으로 피칠갑을 하며 끝나는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비롯해 <짝패>에선 주인공이 쌍욕을 내뱉으며 승리했지만 보람이 없는 싸움의 최후를 견디고 있고 <주먹이 운다>에선 죽도록 돌진했지만 너덜너덜해진 육신에서 겨우 살아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결말로 끝난다. 심지어 경쾌한 오락영화인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서도 주인공은 절대강자인 고수와의 싸움에서 기진맥진할 정도로 싸움을 끌어 관객을 탈진하게 만들 지경에까지 이른다.

자주 코미디로 숨통을 열어놓고는 있지만 류승완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등장인물의 위엄이 아니라 피로다. 이것이 대중장르영화의 외피를 쓰고 아닌 척 제시되는 것이 그의 영화가 주는 당혹감의 부분적인 실체이다. 기능적으로 절묘하게 안배된 <부당거래>에서 등장인물의 감정은 감독이 판단하지 않고 괄호를 쳐두는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에게 접근하는 방식 덕분에 오히려 밀도가 생긴다. 류승범이 연기하는 주양 검사나 유해진이 연기하는 장석구는 모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순간을 영화에서 허락받지 않고 있다. 이 영화에서 그들의 감정은 모두 상대나 주변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슬쩍 드러난다. 영화 초반부에 주양은 검사라는 권력을 절대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연기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심지어 부하 직원들에게 뭔가 명령할 때조차 그는 연기한다. 굳이 존댓말을 써가며 직원들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비아냥대는 그의 스타일은 군림하지 않는 척 군림하는 그의 연기 스타일의 일단을 드러낸다. 장석구는 영화 초반 처음 소개될 때 경찰의 명에 따라 관련 서류를 들고 나오는 부하의 뺨을 소리나게 때리며 부하 직원의 안경을 그 자리에서 멀리 날려버린다.

이런 방식, 오로지 인물의 행동과 반응을 통해 캐릭터를 축적시키는 방식은 미국영화에서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고 숏과 반응숏의 접합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무수하게 많은 숏과 반응숏의 접합이 드러나는 <부당거래>에서 류승완은 그들의 감정에 한시라도 이입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를 보인다. 심지어 부당한 거래의 희생자인, 연쇄 살인용의자로 몰린 남자의 불행한 입장을 보여주는 몇몇 숏에서도 류승완의 카메라는 감정이입의 순간들을 남겨두지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그를 협박하는 장석구 일행의 모습들, 또는 그를 마지못해 변호하는 국선변호인의 관료적인 반응들, 그를 위해주는 척하면서 자신의 계산을 챙기는 주양 검사의 모습들이다. 나중에 그를 굳이 우리가 동정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밝혀질 때 우리가 이 극적 반전에서 속았다는 느낌을 굳이 갖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장르영화의 외피를 취하되 리얼리티의 조각을 모은다는 명제는 진부할 정도로 상투적이지만 류승완의 영화에서처럼 그것이 일관되게 비타협적으로 제시되는 경우에는 격려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공감하거나 동정할 만한 인물을 만들지 않는 것은, 심지어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인물들이 등장했던 이전 영화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견디는 방책으로서의 판타지를 그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류승완은 이상한 함정에 빠지는데 그가 현실의 있음직한, 또는 정직한 재현방식으로서 채택하는 비극적 수사학이 때로는 장르영화의 수사학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부당거래>에서 과잉의 정도가 많이 완화되어 내러티브에 보이지 않는 흐름으로 유연하게 삼투되기는 했지만 이 영화에서의 비극적인 결말도 류승완식 장르영화의 장치로 보이는 것은 다소 뜻밖이다. 현실에서 능히 있음직한 결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부당한 죽음이 꼭 이 인물에게 필연적인 것이었을까 질문하게 된다.

인간의 위엄을 위한 이상주의

요컨대 류승완은 너무 냉정하다. 그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이런 비극적 레토릭이 괜한 치기로 보이지는 않는다. 앞서 <주먹이 운다>에 대한 허문영 평론가의 반응처럼 그는 남들보다 일찍 더 민감하게 현실의 비극적 기운을 체감하는 안테나를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앞으로는 그가 등장인물들에게 좀더 관대해졌으면 좋겠다. 인물들을 충분히 고생시켰으니 그들이 고통을 견디고 극복하는 것보다는 그들에게 반성하고 추스를 순간도 주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이는 연출의 정직성이나 대중영화에서의 판타지의 필요성과는 좀 다른 얘기다. 어쩌면 <부당거래>에서 큰 악이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작은 악은 비참한 대가를 맞는 결말은 현실의 상투형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좋은 의미에서 긍정적인 이상주의도 필요하다. 그 이상주의는 무엇보다도 사람에게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부당거래>의 마지막 장면에서 최철기를 연기하는 황정민의 육체에서 피가 쿨럭쿨럭 솟아나올 때 나는 이 영화의 중반에서 그가 옷을 벗고 주양 검사에게 용서를 빌 때보다 더한 굴욕감을 느꼈다. 그가 주인공이라서가 아니다. 줄이 없고 백이 없는 그가 누군가가 조종하는 인형놀이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치른 악행은 물론 단죄받아 마땅하지만 결국 영화의 내러티브가 제시한 것은 원인도 결과도 없는 일종의 허구였다. 가짜 범인을 세우고 벌인 이 게임에서 확인된 것은 누가 범인이냐가 아니라 누가 더 연기를 잘하느냐에 있었다. 최철기는 제대로 연기하지 못했다. 그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고 그러니 그가 그토록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많이 안됐다. <부당거래>는 장르영화의 외관을 매끈하게 잘 뽑아낸 작품이자 지독할 정도로 현실성을 끌어들인 맨 얼굴의 초상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위엄을 가차없이 부정하는 영화이다. 나는 류승완이 부디 자신의 피조물들을 긍휼히 여겨 그들이 재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면 좋겠다. 인간은 위엄을 상실할 수도 있지만 위엄을 회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당거래>는 그런 점에서 감독 류승완의 위엄이 당당하게 빛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가 계속 이 상업영화판에서 살아남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앞으로는 우리에게 그가 인간의 위엄의 확인이라는 덤도 얹어주기를 바란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 <부당거래>를 통해 우리 시대의 과소평가된 감독 류승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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