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와 손 사이의 중재자는 심장이어야 한다.” <메트로폴리스>(1927)의 그 유명한 대사를 응용하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성영화와 관객 사이의 중재자는 음악이어야 한다.” 과천SF영화제 상영작인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대사와 효과음이 부재하는 화면에 영혼을 불어넣는 건 전적으로 독일 음악가 요하임 베렌즈의 몫이다. 상영관에서 영화와 함께 진행되는 그의 피아노 연주는 <메트로폴리스>의 템포와 심장박동 수가 일치한다. 인물이 울면 건반도 울고, 화면이 요동치면 베렌즈의 손놀림도 바빠진다. 이와 같은 영화와의 만족스런 호흡은 독일 본 무성영화제, 스위스 필름 포디엄 등 세계 주요 무성영화제와 필름 아카이브에서 41년 동안 “안 맞춰본 무성영화가 거의 없을 정도”로 꾸준히 피아노 연주를 해온 베렌즈의 내공 덕이다. “<메트로폴리스>만 20~30번은 연주했을 것”이라는 그를 독일문화원에서 만났다.
-한국에 어떻게 오게 됐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초청받았다. 자료원의 ‘영화적 체험2 특별전’에 상영되는 <메트로폴리스>와 <밀랍인형전시실>의 피아노 연주를 맡았고, 더불어 과천SF영화제의 연주도 맡게 되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일로 한국을 찾은 적이 있고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메트로폴리스>의 음악은 어떤 컨셉으로 만들었나. =나는 원래 공연을 맡은 작품의 90% 이상은 즉흥적으로 연주하지만, <메트로폴리스>만큼은 원작의 음악을 작곡한 고트프리드 후퍼츠의 악보를 사용해서 연주한다.
-그렇다면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로서 후퍼츠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나. =후퍼츠가 작곡한 <메트로폴리스>의 음악은 리하르트 바그너 음악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바그너는 오페라에서 특정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같은 멜로디를 사용하는 ‘라이트 모티브’ 기법을 즐겨 썼는데, 후퍼츠도 <메트로폴리스>에서 그런 기법을 사용하더라.
-연주는 어떤 방식으로 준비하나. =<메트로폴리스>를 예로 들어보겠다. 예전에 TV에서 이 영화에 음악을 넣어 상영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걸 녹화해 악보를 앞에 두고 함께 보며 어떻게 연주할 것인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한 다음 연주 하루 전날에는 영화도 악보도 보지 않는다.
-연주 전날엔 왜 아무것도 하지 않나. =<메트로폴리스>는 상영시간이 두 시간 반이 넘는데다 체력 소모가 심한 작품이라 하루 전날엔 휴식을 취하는 게 좋다.
-영화가 상영되는 한 쉬지 않고 연주해야 하니 물리적으로 힘들었겠다. 가장 장시간 연주한 작품은 뭔가. =역시 프리츠 랑의 영화였다. (웃음) <니벨룽의 노래>인데, 1부가 2시간20분, 2부가 2시간40분으로 모두 5시간을 연주했다.
-<메트로폴리스>처럼 악보를 보며 공연할 경우, 영화와의 타이밍은 어떻게 맞추나. =악보에 몇 소절마다 키포인트가 적혀 있다. 예를 들면 “프레더가 앉는다”라고 악보에 적혀 있다. 그러면 나는 영상을 보며 템포를 맞춘다. 간혹 영화에 비해 내 연주가 조금 뒤처지거나 앞서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다음 키포인트에서 맞추면 된다.
-무성영화의 음악을 연주하게 된 계기를 말해달라. =어렸을 때부터 무성영화를 즐겨봤는데 대학생 시절 어디선가 이런 공지를 발견했다. “우리 극장에서 무성영화를 상영하는데 음악을 연주해줄 사람을 찾고 있다”고. 관심이 있어 찾아갔고 그때부터 연주를 시작하게 됐다. 아, 그때 상영했던 건 장 르누아르의 회고전이었다.
-2009년에 본 무성영화제와 뮌헨영화박물관에서 한국영화 <청춘의 십자로>의 음악도 연주했다. 그 사연이 궁금하다. =우선 한국영상자료원 관계자가 본 무성영화제쪽에 <청춘의 십자로>를 추천했고, 본영화제 작품을 꾸준히 맡아 연주하던 내가 그 영화의 음악을 맡게 됐다. 영화는 드라마틱한 사랑 이야기라 마음에 들었고 음악은…. 사실 어떻게 연주했는지 생각이 잘 안 난다. 영화에서 받았던 감동을 바로 그 순간 즉흥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지금 생각나는 건 연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찾아보다 한국 노래 두곡을 들었다는 거다(영상자료원 관계자는 그 곡이 <아리랑>이라고 귀띔했다-편집자). 연주할 때 그 노래의 영향을 받았다.
-41년 동안 무성영화 음악 연주를 해온 소감은. =무성영화도 작품의 인기에 영향을 받는다는 걸 알게 됐다. 이를테면 <노스페라투>나 <메트로폴리스>,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 같은 작품은 두세번 보러오는 관객도 많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무성영화에 관객이 눈길을 주지 않는 것이 슬프다. 오히려 그런 영화들이 평생에 한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영화인데 말이다. 무성영화 음악 연주를 계속해오면서 잘 모르는 좋은 작품을 만날 때마다 기쁘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