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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려주세요~ 작고 아름다운 세계를 위해
김혜리 2010-09-09

도쿄 현지에서 스튜디오 지브리의 <마루 밑 아리에티> 세계를 미리 보다

“그해 여름”으로 시작하는 많은 이야기가 그러하듯 <마루 밑 아리에티>도 한 소녀와 한 소년의 삶을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결정적 만남을 그린다. 다만 이 이야기 속 소녀는 인간 몰래 인간의 물건을 조금씩 빌려 마룻장 밑에서 살아가는 작은이 가족의 딸이다.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온 병약한 인간 소년 앞에서, 멸망해가는 종족의 소녀는 안간힘을 다해 외친다. “우린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 지난 7월17일 개봉해 일본 관객 500만을 넘어서며 미야자키 하야오가 아닌 감독이 연출한 지브리 작품으로서는 우수한 흥행성적을 거두고 있는 <마루 밑 아리에티>가 9월9일 한국 극장가에 온다. <씨네21>은 영화의 면면을 미리 살피고 스튜디오 지브리를 찾아 제작진 인터뷰에 참석했다. 덧붙여 미야자키 하야오 이후 지브리의 미래를 도쿄 통신원이 전망한다.

아리에티는 작은 신의 아이다. 올해 열네살인 그녀의 키는 10cm. 대략 가늠하면 인간의 손목에서 엄지손가락 끝까지 길이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지브리의 ‘작은’ 영화다(이하 <아리에티>). 약 2년에 한편씩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을 내놓고 있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은 ‘큰’ 영화와 ‘작은’ 영화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 크고 작다는 표현은 작품성이나 예산이 아니라 소재의 규모를 말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노노케 히메>가 ‘큰’ 쪽이라면 <마루 밑 아리에티>는 <이웃집 토토로> <붉은 돼지>와 같은 계열인 ‘작은’ 영화에 속한다. 지브리의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는 “2년 전 미야자키 하야오가 ‘앞으로는 5년간 계획으로 진행하자’고 했다. 그동안엔 계획을 세워 뭘 한 적이 없었는데, ‘3년은 신인 감독 작품을, 2년은 큰 작품을 하자’고 했다”고 밝혔다. 이른바 신인 감독 프로젝트의 첫 케이스가 <아리에티>인 셈이다.

여느 때보다 성숙한 지브리의 소녀

아리에티 가족은 마룻장 밑에 숨어 인간의 세간살이를 빌려 살아가는 바로워즈(Borrowers)족이다. 증조부 때부터 한집에 보금자리를 틀어온 아리에티 가족은, 심장 수술을 앞두고 외갓집에 요양 온 소년 쇼우가 정원에서 아리에티를 발견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또래로부터 떨어져 책에 파묻혀 지낸 쇼우는 어떤 일에도 놀라지 않는 12살 소년이다. 아리에티는 이상하리만큼 침착한 소년이 내미는 손길에 두려움과 설렘이 엉킨 감정을 느끼고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꽃과 풀 가운데에서 만나는 병약한 소년과 건강한 소녀, 그리고 나중에 합류하는 씩씩한 야생의 소년까지, <아리에티>의 극적 구도는 <비밀의 화원>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984)부터 대다수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소녀가 지배했고 모성이 아닌 소녀성이 구원하는 세상을 그렸다. 아리에티는 수많은 지브리 소녀들 가운데 가장 여성미가 강하고 처녀티가 흐른다. 그녀는 눈에 띌 염려를 무릅쓰고 좋아하는 빨강색 옷을 고르고 거울 앞에서 빨래집게로 머리를 올린 다음 꼼꼼히 옆모습을 점검한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은 “<아리에티>를 연출하기로 결정한 다음 프로듀서와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처음 받은 주문은 아리에티를 아주 관능적으로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며 미소짓는다. 뚜렷한 로맨스 일화가 없음에도 아리에티의 이같은 분위기는 영화에 줄곧 첫사랑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멸망의 불안, 이삭줍기의 도덕

그리고 아리에티는 우리가 아는 또 한명의 소녀를 연상시킨다. 벽 뒤 비밀의 방에서 매일 발각될까 가족을 잃을까 마음 졸이며 살았던 소녀, 안네 프랑크. <아리에티>는 무엇보다 불안한 삶의 기반에 관한 이야기이며 밑바닥에 흐르는 공포의 정서를 숨기지 않는다. 쇼우와 아리에티의 첫 대면에서 소년의 거대한 이목구비는 가히 위압적이며 까마귀가 아리에티가 서 있는 창가로 달려드는 에피소드는 히치콕의 <새>를 떠올릴 만큼 위협적으로 연출되어 눈길을 끈다. 생활 소음을 소인의 청각에 맞추어 증폭시킨 사운드 디자인도 작은 존재가 느끼는 아득한 공포를 살리고 있다. 한편 요네바야시 감독이 관객을 불안하게 만들 위험을 감수하고 거듭 강조하는 주제는 ‘멸종’이다. 아리에티의 부모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의 딸이 마지막 바로워로 고독하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한다. 쇼우는 가혹하게도 “너희는 곧 멸망할 거야”라고 아리에티에게 예언한다. 이미 많은 종족이 사라져갔고 그것이 섭리라고. 아리에티는 반발한다. “우린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 너가 뭘 안다고 그래? 다들 나름 열심히 살고 있어!”

바로워스에게 열심히 사는 방법은 ‘빌리기’다. 말하자면 <아리에티>는 이삭줍기의 도덕을 주장하는 영화다. 가진 것 없고 약한 사회 구성원이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남아도는 재화를 공짜로 취해 생존을 유지하도록 용인하는 세계가 <아리에티>의 이상이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빌리는 일과 훔치는 일이 다름을 수차례 강조한다. 첫 빌리기 모험에 나선 아리에티가 “아빠, 빌리는 일은 재미있어요”라고 해맑게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나쁜 행위라고 상상할 수조차 없다. 한데 ‘빌리기’를 더이상 허용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면? <아리에티>는 문명의 이기가 필요없는 수렵과 채취의 야생으로 돌아간 소인 소년 스피라를 통해 쓸쓸한 대답을 제시한다.

수작업 판타지 공방의 세공품

<붉은 돼지>(1992) 정도를 예외로 하면 스튜디오 지브리는 어린이를 가상 관객군의 중심에 두고 영화를 만들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린이 영화에는 다시 시작할 가능성이 있지만, 어른을 위한 작품이 그리는 세계에서는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어린이 영화를 선호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편 소년 쇼우의 회고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의 <아리에티>를 관통하는 마음은 안타까움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대표작에 흐르는 거침없이 벋어가는 상상력과 약간의 광기, 에너지가 결핍된 대신 <아리에티>에는 사춘기의 쓰라림과 쓸쓸함, 소멸해가는 것들을 향한 향수가 초여름의 숲 그림자처럼 일렁인다. 화려한 비상의 운동으로 수놓아진 지브리의 몇몇 대표작들과 대조적으로 <아리에티>는 동세보다 미장센의 영화다. 이를테면 아리에티 네 가족이 엉뚱한 용도로 활용하는 인간의 생활소품들- 시침핀, 양면테이프, 화분 등- 은 뜯어볼수록 재미있다. 요컨대 <아리에티>는 화면 구석구석을 음미해야 만끽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가장 격렬한 모험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가는 행위일 수밖에 없는 <아리에티>에서 스릴은 속도가 아니라 크기의 대조에서 발생한다. 찬장 모서리에 선 아리에티가 바라보는 부엌의 숨막히는 거대함을 카메라가 잡아낼 때 관객은 자연히 이 기획이야말로 3D와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나 8월20일 도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는 지브리의 3D 제작 가능성을 매몰차게 일축했다. 그것은 철학에 관련된 질문에만 나올 수 있는 종류의 단호한 반응이었다. 스튜디오 지브리를 나서는데 오래전 미야자키 하야오가 한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 새삼 떠올랐다. “가상현실은 판타지와 다르다. 가상현실은 리얼리티의 부인이다.” 지브리는 어디까지나 다른 현실을 그리는 수작업 판타지 공방이고 <아리에티>는 그 공방의 내성적인 젊은 장인이 내놓은 아담한 세공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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