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대학로의 한 술집에서 이송희일 감독을 본 적 있다. 곁엔 이영훈과 소유진이 있었다. 인사만 나눈 뒤 옆 테이블에 앉은 터라 자세히 듣진 못했지만, 세 사람은 늦은 시간까지 <탈주>에 대한 이야길 나눴던 것 같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뒤 1년 만에 개봉하는 이송희일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탈주>를 보면서 자꾸 그날의 노곤한 술자리 풍경이 떠올랐던 게 사실이다. 누구에게 기대지도, 손 내밀지 못하고 길 위에서 탈진해가는 탈영병 재훈(이영훈)과 민재(진이한), 그리고 두 남자와 실상 같은 처지인 소영(소유진)의 모습은 관객과의 만남을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날 세 남녀의 실루엣과도 흡사했다. 신작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도 독립영화 죽이기에 나선 정부에 맞서 부부젤라를 부느라 정신없이 6개월을 보냈다는 이송희일 감독, 잠도 얼마 못 잔데다 이전 인터뷰가 예상보다 오래 걸려 진이 다 빠졌다며 기력 충전의 시간을 달라는 부탁부터 꺼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이후 개봉까지 1년이 걸렸다. =애를 낳았으면 집에 데리고 가서 키워야 하는데 곧바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간 셈이 됐다.
-인디스토리 배급이 결정된 뒤 7월에 개봉한다고 들었는데. =제작사인 청년필름에서 여름 개봉작으로 <귀>를 택했다. <귀>에 밀렸지. 근데 <귀> 관객 수가 얼마더라. (웃음)
-불만이 많겠다. =대놓고 뭐라 하진 않고 뒤에서 단단히 삐치지. 그럼 뭐하나. 지금 나 혼자 개봉 뒤치다꺼리하고 있다. 청년필름은 <의뢰인>과 <조선 명탐정 정약용> 찍느라 정신없다.
-시사회 때 전투장면이 너무 어둡다는 반응이 나왔다. =밝기를 좀 올려뒀는데 실수로 조정 전 버전으로 상영됐다. 개봉을 해도 좀 걱정이다. 각 극장의 영사시설이 제각각이라 <후회하지 않아> 때도 많이 싸웠다. 여기서 어둡게 나와 올려두면 다른 극장에선 너무 밝게 나온다. 필름은 영사기사가 경험치에 따라 눈대중으로 하는데 디지털이다 보니 그게 어렵다. 몇 백개 스크린이면 어쩔 수 없다며 가겠지만 우린 20개 극장이니까 일일이 체크해야 한다.
-그레고리 추카라 감독의 <병사의 시>(1959)를 보고 탈영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런데 <병사의 시>는 휴가 나온 군인이 주인공이다. =탈영병 이야기는 원래 하고 싶었다. 전에 소설로도 썼다. 군대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난 보수적인 놈이었다. 신학교에 가고 싶었고, 대학 가서도 운동권 선배들의 유혹도 참아 넘겼고. 그런데 군대에 가서 처음으로 내 신체와 의지가 국가에 구속됐다는 사실을 느꼈다. 겨울에 불침번 서는데 ‘아, 저기 철조망을 넘으면 어떻게 될까’, ‘최서해의 단편소설 인물처럼 비참한 죽음을 맞겠지’ 뭐 그런 상상도 하고.
-현역인가. =육방이다. 전설의 육방. 기동타격대에서 6개월 근무했는데, 말만 육방이고 매일매일이 훈련이었다. 오죽했으면 복학해서 총학생회에 들어갔겠나. 애가 싹 달라져서 들어오니까 한동안 프락치로 오해받았다.
-소설까지 쓰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 =고등학생 때 하교하는데 집 앞 비닐하우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었더니 시커먼 군인 둘이서 총을 겨누더라. 뒤도 안 보고 도망갔지. 근처에 공수부대가 있었는데 뒤늦게 그들이 탈영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사의 시>를 봤을 때도 언젠가 탈영병 영화 만들어야지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침 준비했던 정치스릴러를 엎어야겠다고 맘먹었던 때라.
-재훈 역할을 탐낸 배우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이영훈을 고집한 이유는 뭔가. =귀찮아서. (웃음) 새 사람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나랑 같이 가야 할 사람이구나 하는 가족 같은 이들이 있다. 신뢰감을 주는 배우들이 아직은 더 편하다. 또 저 친구한테 아직 못 뽑아먹은 게 있겠지 싶고. 물론 작업할 때는 편안함이 늘 좋은 건 아니다. 늘 함께해온 박미현과도 전에 크게 싸운 적이 있다. 이영훈과도 언젠가 그런 시기가 오겠지.
-소유진, 진이한은 의외의 캐스팅이다. =소영 역할은 분량이 적어서 여배우들이 그다지 큰 관심을 안 보였다. 두 남자보다 나이가 많은 역할인데 신인배우를 쓸 수도 없고. 고민하던 중에 김남길 매니저한테 추천받았다. 유진은 이전에 <내 인생의 콩깍지>에서 인상 깊게 봤고. 민재 역할은 더 어리고 생양아치 같은 느낌을 줘야 해서 20대 초반 배우들을 찾고 있었는데 잘 안됐다. 현중이는 생각보다 나이가 많다. 전에 드라마 <한성별곡>을 재밌게 봐서 현중을 마지막 카드로 갖고 있다가 택한 거다.
-현중이라니. =진이한의 본명이다. <후회하지 않아>의 김남길을 부를 때 남길 혹은 가끔 극중 인물 이름인 이한으로 불렀는데. 헷갈려서 이한 대신 본명을 불렀다. 그게 버릇이 돼서.
-연간 탈영병이 1천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보도자료 보고 처음 알았다. 취재도 좀 했나. =감추고, 눙친 건까지 치면 실제 탈영은 더 많겠지. 시나리오 쓰면서 해병대 탈영병 잡으러 다니는 분을 만나기도 했다. 신원이 노출될까봐 막을 치고 인터뷰를 했다. 재훈의 경우는 실제 인물이 있다. 극중 재훈과 똑같은 상황에 처한 누군가가 인터넷에 자신의 사연을 올려둔 적이 있어 참조했다. 어떻게든 만나보려고 했는데.
-이전 영화들에 비해 촬영에 공을 들였다. 핼리캠과 바이퍼카메라에 만족하나. =핼리캠은 세컷 찍으면 하루가 간다. 띄우는 데 너무 오래 걸린다. <조디악>으로 유명해진 바이퍼카메라는 음. 애물단지였다. 소프트하고 밝은, 동시에 필름 느낌도 나는데다 공짜로 준다고 해서 덜컥 썼는데. 데이터 저장장치가 무겁고, 연결하는 선도 엄청 많다. 스튜디오 촬영에 적합한 카메라를 이 산, 저 산 낑낑대며 들고 다녔다. 한컷 세팅하는 데만 20분 이상 걸린다. 원래 10컷을 찍기로 했다면 평균 6컷 정도밖에 못 찍었다.
-절친인 조용규 촬영감독도 조언을 해줬을 것 같은데. =용규 형은 나중에 힘들었다고 했더니 한마디 하더라. ‘원래 그게 그런 거야.’
-전투 혹은 대치장면은 규모가 생각보다 꽤 컸다. =예산문제도 있고. 쫓는 이들을 많이 보여주진 못했다. 게다가 엑스트라들이 대부분 방학 때 아르바이트하려고 나온 고등학생이었다. 심지어 총을 거꾸로 든 친구도 있고.
-학도병이네. =군복 입고 넘어지는 거 보면서 많이 웃었다. 스탭들은 군 협조를 받는 게 어떻냐고 했는데, 그때마다 국방부가 개봉 앞두고 문제삼은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고생할 수 있다고 말렸다.
-영화를 보지 않은 누군가는 <탈주>를 게이영화라고 오해하더라. 영화를 본 누군가도 밑에 어느 정도 그런 감성이 깔려 있지 않냐 하고. 아무래도 민재라는 캐릭터 때문인 것 같다. =크크. 나를 지우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전혀 의식 못하는데. 민재라는 인물의 성 정체성에 대한 힌트가 없긴 하다. 내 입장에선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얄궂은 장난 혹은 실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민재가 게이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부정하진 않은 거지. 팬 서비스라고 해두자.
-재훈의 대사에도 얄궂은 장난이 묻어 있다. =‘네가 힘들까봐’ 이거? 그렇게 보면, 저쪽에 소영이 서 있는데 두 남자가 오줌 싸는 장면이나 헤어질 때 서로 껴안는 장면도 그렇겠지. 그런데 군대만 한 동성애적 공간도 없지 않나. 끈끈하잖아. 따지고 보면 극중 대사는 그들이 실제로 흔히 쓰는 말이다.
-세 인물의 전사(前史)에 대한 언급은 지극히 짧게 묘사했는데. =애들이 왜 탈영을 했을까, 소영이 애들을 왜 따라갈까, 뭐 이런 설명의 장면들을 편집 과정에서 모조리 쳐냈다. 대신 로버트 알트먼의 <보위와 키치>처럼 뉴스로 그들이 처한 상황을 흘려 보여주자. 뉴스 중엔 88만원 세대를 비롯해 지금 세태에 대한 정보도 있었는데, 탈영에 집중하기 위해 다 걷어냈다. 소영의 장면도 매우 많이 잘랐고.
-엔딩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이브 세즈윅이라는 레즈비언 이론가에 따르면 남자 둘, 여자 하나가 등장하는 가부장적 로드무비에는 누락된 동성애의 욕망이 존재한다. 로드무비 속 여자는 가부장제 사회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한 위장 교환물에 불과하다는 건데. 이걸 어떻게 비틀어볼까 고민이 많긴 했다. 이 자리에서 다 이야기하긴 좀 뭣하지만 웃기는 건 시나리오와 다른 지금의 엔딩을 놓고 내부에선 ‘거봐. 완벽한 퀴어영화의 결말이잖아’라는 말이 나왔다. (웃음)
-지금 택한 결말은 당혹스럽고 동시에 잔인하다. =안 그래도 영훈이가 그랬다. 너무 싸가지없는 결말 아니냐. 그래서 물었다. 사는 게 좋아, 죽는 게 좋아. 그랬더니 그렇게 살 거면 죽는 게 낫다고 하더라. 그 말을 들으니 더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갇힌 시스템, 출구없는 절망의 폐쇄회로 안에 인물들을 다시 구겨넣고 싶더라.
관객 입장에서 인물들을 자꾸 관찰하게 된다. 그 위치가 조금 애매하다. 쫓는 자 혹은 쫓기는 자 중간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번엔 깊숙이 들어가보자 했는데 어느 순간 뒤로 쭉 물러나 있다. 내 포지션을 명확하게 선점하지 않다 보니 그랬겠지.
-촬영 전 인터뷰를 보니, 장르적 쾌감에 대한 언급이 많더라.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면 웃기는 장면에서도 웃기가 힘들다. 상황이 짓누르니까. =누가 트위터에 도대체 이 영화 장르가 뭐냐고 올렸더라. 촬영하면서 조건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힘을 장르적인 세공에 들이느니 다른 쪽에 쏟아야겠다 싶었다. <후회하지 않아>는 장르를 꼬고 비트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번엔 그렇게 장난을 치기가 쉽지 않았다. 가장 아쉬운 건 민재라는 캐릭터다. 생양아치처럼 마음껏 놀아도 된다고 했는데 배우에겐 첫 영화이고, 욕도 한번도 안 해봤다면서 많이 얼었다. 스스로 캐릭터와 이야기의 주름을 좀더 만들었어야 했는데. 지나치게 선언적인 것 아닌가 반성도 한다.
-점점 자신의 영화에 가혹한 평가를 내리는 것 같다. 신인 감독도 아니면서. =통렬한 자아비판이지. 자기 영화를 극장에서 보면서 크게 웃는 감독을 본 적 있는데 정신구조가 잘 이해가 안된다. 호흡을 다듬는 점에 있어 장편 연출은 여전히 부족하다. 편집할 때 내가 왜 저렇게 시나리오를 쓴 거지 한다니까. 로드무비는 섣불리 덤벼선 안되겠구나 하는 것도 절감했고. 그동안 주로 카메라를 들고 찍었으나 이번엔 픽스, 픽스, 픽스 이렇게 찍어서 붙여보려고 했는데, 성취보다 배움이 훨씬 더 크다.
-성직자가 유년 시절 꿈이라고 했는데. 구도자의 자세네. =천재도 아니고, 체계적으로 영화를 배웠던 것도 아니고. 98년부터 독립영화 일하면서 운 좋게 지금까지 왔는데. 워낙 이쪽 시장이 작다보니 내가 좀 유명하구나 했던 거지. 게다가 게이라는 상징자본도 갖고 있고. 이름 팔아서 우려먹어 왔는데 <후회하지 않아> 끝낸 뒤 처음으로 강박이 생기더라. 잘 만들어야 하는구나. 그래야 오십 돼서도 영화 만들겠구나.
-마흔이다. 어른이 다 된 사람들이 왜 여전히 청춘, 젊은 이야길 할까. =영화 찍다보니 나이 든 것뿐이지.
-딜레이된 욕망인가. =20대의 자신을 투영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준비하다가 10년 후딱 가는 경우 많잖냐. 반대로 나이 좇아 영화 찍는 것도 웃기잖아. 물론 10년 뒤에 이젠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구나 싶을 때 주변을 돌아보겠지.
-차기작 시나리오를 쓰고 있을 텐데. <후회하지 않아>도 <야만의 밤>이었고, <탈주>도 <사냥꾼의 밤>이었고. 이번에 붙인 시나리오 가제도 ‘밤’이 들어가나. =아니 너무 식상해해서. 이번엔 <야간비행>. 한동안 안 한다고 했는데, 다시 퀴어멜로다. 고등학생 때부터 군대 제대할 때까지의 두 소년의 성장기라고만 해두자. 영화로 만든 다음에 인터넷을 기반으로 아시아 시장 온라인 배급을 계획 중이다. 반응이 좋으면 8부작 드라마 형태로도 만들 계획이고.
-시장이 그 정도 되나. =중국에 게이 인구가 1천만명이라는 거 아나. 공안당국의 공식 발표만 해도 그 정도다.
-공안당국 요주의 감독이 되겠네. =표현 수위가 사실 세진 않다. 지상파 방송보다 조금 더한 정도지. <탈주>의 이선미 프로듀서와 함께 준비 중이다. 주변에 ‘이 아이템 죽이지 않아’ 그러면 다들 그런다. 넌 프로듀서나 마케터가 더 어울린다고. (웃음)